#02.
#02. 위기의 전조
그녀와의 결별은 생각보다도 쉽게 끝이 났다.
아마도 유전자 검사라는 단어 하나가 미친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유진은 커피숍 카운터로 가 소란을 피운 것을 사과하고, 홀케이크를 하나 사는 것으로 미안함을 표시했다.
가격에 비해 너무 작다 싶은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들고 커피숍을 나온 유진은 결혼 전에 살던 자췻집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식 파행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비용은 책임지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면 정반대였지만, 뭐. 작은 투자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내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 개새끼. 나가 죽어.
음. 좋은걸?
그녀의 부들거리던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쯤은 이 황당한 사실을 어떻게 부모님께 알리고, 청첩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거다.
사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고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결혼식 전날의 파혼이야말로 진정한 난관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생의 좋은 경험 했다 치고 견딜 수밖에······.
다시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사과하기도 하며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내다가, 차를 몰고 본가로 내려간다.
“그래, 왔니? 오늘 고생이 많았겠구나.”
거하게 사고를 치고 돌아온 탕아를 맞이해 준 사람은 모친이었다.
“어여 씻고 쉬고 있어. 빨리 밥 차려 줄게.”
자신 때문에 하루가 고역이었을 터인데, 가타부타 묻지도 않고 오히려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친을 보니 유진은 가슴이 매어졌다.
“어서 오너라. 힘들 테니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쉬어라.”
부친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아요. 옷만 벗고 나올게요.”
오랜만에 건강하신 부모님을 보니 왠지 울컥한다.
유진은 항상 그대로인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내던 방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부친과 모친의 노고가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집이다.
앞으로 몇 년 뒤에, 그가 이혼하고 연이어 닥친 불행으로 이 집마저 빼앗기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유진 자신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형, 왔어?”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동생 녀석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자식아, 노크 좀 해.”
“남자끼리 노크는. 근데 일 좀 저질렀나 봐?”
동생, 유성이 웃으며 물었다.
왠지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어. 저질렀다.”
“괜찮아? 많이 좋아했잖아?”
“뭐.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사실 그 감정이 어땠는지는 좀 가물가물하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좋았던 감정은 삭아 버렸고, 고약한 기억만이 남았다.
좋지 않다. 누군가를 증오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 끔찍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자신 대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쪽이 훨씬 더 낫다. 피해자로, 또 희생자로 사는 것은 지난번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잘 한 거 같아?”
“응. 틀림없이.”
“뭐,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유진의 집안사람들은 그랬다.
엄한 일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너한테도 폐를 끼쳤구나.”
“폐는 무슨. 그냥 추억 하나 생긴 거지 뭐. 내일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어.”
내일 있을 결혼식에서는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도와줄 예정이었다.
“이거 갖고 술들 사 줘.”
동생에게 두툼한 지폐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오오! 이 정도면 진짜 크게 쏠 수 있겠는데? 흐흐. 고마워, 형.”
그때, 밖에서 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들 먹어라.”
조금 갈라진 걸 보니 몰래 눈물을 훔치셨던 모양이다.
“나가서 밥 먹자.”
저녁 식사 자리는 무척 조용했다.
가족들 누구도 밥 먹는 동안에는 오늘의 소동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애는······ 하유, 어떻게 하니?”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모친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부친도 조용히 유진을 바라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아닌 거 같아요.”
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모친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거니? 혹여라도 네가 잘못 안 거면 그거야말로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다.”
부친이 엄숙하게 말했다.
“네. 당연하죠.”
“그래. 네가 정말로 많이 힘들겠구나. 앞으로 다시는 거론하지 않으마. 당신도 알았지?”
주방으로 가 버린 아내에게 말을 던진다.
“그럼 그걸 뭐 하러 말하겠어요.”
모친이 힘없이 대답했다.
“살다 보면 뭐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거죠.”
유진은 여전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제 들어가서 쉬거라.”
“참! 저 내일 미국 갑니다.”
“미국? 설마 너······.”
“네. 맞아요. 티켓하고 호텔이 아까워서요.”
“그건 그러네. 미국까지 왕복 비행권에, 호텔도 1주일이나 예약했지? 아깝기는 하다.”
동생이 거든다.
“아니, 그게 아깝다고 해서······. 아니다. 너도 뭔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
부친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힘들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취소하면 얼마간 환불받을 수 있지 않나?”
“그렇기는 한데. 그냥 다녀올란다. 너도 심심하면 같이 갈래?”
“어? 뭐, 가고 싶기는 한데, 요즘 일이 좀 바빠서 말이야. 그리고 머리 식히려면 혼자 다녀오는 게 나을걸?”
“그래.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사실은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가는 것 따위가 아니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공장 확장하고 나서 대양중공업 주문이 꽤 늘었다며?”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로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공장을 들락거리더니 적성이 맞는지 공대에 들어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는 아무 고민도 없이 그리로 들어가 버렸다.
장남임에도 부친이 일군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던 유성은 그런 동생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 정신없을 만큼 오더가 들어와서 걱정이야.”
유성이 살짝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오더가 늘면 좋은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이러다가 완전히 대양중공업 하청회사가 되겠어. 지금도 반쯤은 그런 셈이지만. 그 자식들 처음엔 정중하더니, 날이 갈수록 얼마나 거만한지 모른다니까. 대기업 다닌다고 지들이 귀족이고 우리는 상놈으로 보이는 모양이야. 이제 대기업 다닌다고 하면 다들 얼굴에 금칠이라도 하고 다니는 거 같다니까.”
“뭐,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다들 그런가.”
“형이 대기업 다니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참! 형도 어디서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우린 그러면 큰일 나. 그것도 다 회사마다 달라. 뭐랄까? 회사의 사풍? 그런 게 있어서, 어떤 회사는 신입이 들어오면 일부러 협력업체에 데려가서 갑질하는 것부터 가리킨다더라.”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양에서도 주기적으로 신입 데려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평소보다 훨씬 고압적으로 하더라고.”
“그래야 신입이 그런 행위에 익숙해지니까. 또 그런 걸 못하면 능력 없는 걸로 취급하기도 하고 말이야.”
“대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그래야 도움이 되니까. 납품받는 회사를 압박해서 단가를 내리고, 필요할 때 이런저런 협력도 받고.”
“아, 싫다. 이런 꼴 보려고 공부한 거 아닌데.”
유성의 말에 형제의 부친이 한마디 했다.
“그런 꼴 보기 싫으면 너도 대기업에 가면 되지 않느냐? 사회생활이 어디 쉬운 게 하나라도 있는 줄 아느냐?”
“맞는 말씀이야. 대기업 다니면 그런 꼴 안 보고 사는 줄 알아? 똑같아. 어디든 위에서부터 압박받고, 자기 밑으로는 갈궈야 하는 거야.”
유진이 부친의 말을 부언했다.
“누가 몰라서 그래?”
동생은 여전히 툴툴거렸다.
“여하튼 대양중공업이랑 거래하면서 회사는 꽤 커졌잖아?”
“매출이야 확실히 늘었지. 하지만 고민이 많다. 사실 유성이 말이 틀리지는 않아. 지금이야 대양중공업 주문을 우리밖에 처리 못 하니 아직 갑질이랄 것까지야 아니지만,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겠냐?”
부친이 대신 대답을 한다.
“공장을 확장하라고 종용해 놓고, 막상 그래놓으니 원자재 가격을 점점 높인다니까. 아무리 자기네가 갑이어도 그렇지, 시장가보다 50%를 더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
납품 가격을 낮추라 압박하는 방법은 차라리 신사적이다.
원청업체에서는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자신들을 통해서 공급받게 하면서 공급 가격을 마음대로 조절해 이중으로 수취한다.
이럴 경우 매출액 대비 얼마로 정해 놓고, 재료값을 선지급 받아가기 때문에 하청 업체에서는 그저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수밖에 없다.
“내년부터는 우리 회사도 재무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하더라. 웃기는 건 거기 필요한 신용평가회사 비용도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나?”
“결국은 영업이익률도 제한하겠다는 거지?”
그런식으로 회사 장부를 들여다보고, 터무니없는 단가를 요구하는 일은 너무 흔한 일이다.
“영업이익률을 1, 2%로 제한하는 업종도 있더라고. 나, 참. 우리가 자회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압박이 심하네.”
“확실히 그건 안 된다고 말해 놓았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부친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리고 공장 확장할 때도 그래. 뭘 그렇게 요구 조건이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우리 공장인데, 마치 자기네 공장 짓는 것처럼 간섭이 많다니까.”
유성이 다시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공장 확장하면서 그쪽이 요구한 것들 전부 서류로 남겨 두었죠?”
“서류로야 남겨 두기는 했지. 하지만 중간에 계속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서 대충 넘어간 것도 적지 않다.”
“그러면 안 되는데······.”
유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기업과의 협력이란 것이 철저한 갑을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그런 걸 다 알면서도 내린 결정이니 감내할 수밖에.”
“그런······.”
“계약대로 5년 동안 약속한 물량을 생산해 납품하면서, 신상품 개발에 열중하면 돼. 그 뒤로야 굳이 대양중공업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될 거다.”
“아버지도 다 계획이 있으셨네요.”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양중공업 건은 될 수 있으면 자료는 충실하게 챙겨 놓으세요. 계약 기간이야 5년이지만, 사실 앞날은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노파심에서 한마디 거들자, 부친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봤다.
“그렇기야 하지.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약속대로 되는 게 있더냐?”
하기는. 결혼식 하루 전날 취소하는 사람도 있는데······.
“조만간 대양 쪽에서 요구하는 물량이 늘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유진은 비로소 용건을 꺼내놓았다.
“음. 지금도 라인이 꽉 찼는데 더 늘어난다라······ 그런데 그건 어디서 들었니? 그 애가 그러든?”
“그런 건 아닙니다. 따로 들은 소리가 있어서요. 대양중공업에서 이번에 유럽에서 고가의 LNG선 수주를 꽤 받은 모양입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니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잘된 일이지만, 우리로서는 곤란하지. 이미 라인을 확충한 상태에서도 정신이 없는데.”
“그리고 납품하는 물건도 좀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유진이 이번엔 동생에게 말했다.
“품질이야 아무 문제 없지. 검수를 얼마나 까다롭게 하는데.”
“나도 알아. 그래도 그쪽으로 넘기기 전에 불량이 없다는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기록해 놓는 편이 좋을 거야.”
“뭔가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유진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부친이 말했다.
“대금 지급도 점점 늦어지고 있지 않나요?”
유진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조선업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벌써 여섯 달 째 미뤄지고 있어. 공장 확장하고 몇 달쯤 지나면서 그러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아예 신경도 안 쓰더라고. 자기네 아니면 그 큰 공장을 그냥 놀리겠냐는 거지.”
동생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그럼 요즘은 부채가 꽤 늘었겠군요.”
원청 회사에서 돈을 받지 못하면 어디서라도 빌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 그나마 대양중공업이 소개해 준 저축은행에서 대출은 쉽게 나오고 있어서 숨통을 트고 있다.”
“될 수 있으면 다른 금융도 알아보세요. 가능하면 대양중공업과 관련이 적은 곳으로요.”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경고가 아무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말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저축은행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서 트리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데?”
동생도 이제 형이 의미 없이 말을 꺼내지 않았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요즘도 세금계산서 줄 때 발행 일자 비우고 주지?”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뜯어 먹는 방법은 아주 여럿이 있다. ‘설마 그런 것까지’하는 짓을 그들은 아무 부담도 없이 해치운다.
“어? 어······ 그런 것도 있지. 전부는 아냐.”
“뭐든 비정상적인 요구 들어올 때마다 기록해 놔. 아니면 녹음도 좋고.”
“뭔가 심각한데?”
“그냥 혹시나 해서 그래. 그쪽 시황이 그리 밝지 않은 것 같아서. 대기업이 어려워지면 협력업체부터 쥐어짜잖아.”
유진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기는 하다. 조선업이 워낙 경쟁이 심한 분야인 데다가, 요즈음은 중국의 추격이 만만치가 않으니······.”
“그렇다면 대양중공업의 추가 주문을 거절하는 쪽도 고려해 봐야겠구나. 지금의 물량을 줄이는 거야 계약상 불가능하니 그건 어쩔 수 없고.”
“만일 거절하면 더 골치가 아파질 겁니다.”
유진은 지난 삶에서 대양중공업이 벌였던 수작들을 전부 알고 있다.
아마 이번에도 그 비슷한 짓거리를 하려고 들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 대책을 세워 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거부하면 또 어떤 다른 짓을 꾸밀지 모른다.
차라리 처음에는 그쪽의 수작에 넘어가 주는 편이 낫다.
“그렇기야 하지. 한 번 눈 밖에 나면 여기저기 우리한테 물건을 받아가지 말라고 하고 다닐 수도 있으니.”
사실 한 번 대기업과 엮인 다음에 헤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네트워크가 무척이나 공고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자신에게, 혹은 다른 대기업에 반항하는 중소기업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쪽에서 주는 물량을 받아들이라고?”
“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흐음······.”
“대신 그쪽 사람들과 만나는 동안은 모든 사항을 기록해 두셔야 합니다. 우선은 녹음도 하시고요.”
“그래. 이래저래 고민은 해 보겠다.”
부친의 얼굴에 수심이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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