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03. 산타 모니카 비치 선셋 베드
다음날 유진은 느긋이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했다.
가족들에게 말해 놓았듯이 나홀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집을 나서는 아들을 보며 모친은 다시 한번 눈시울을 적셨다.
오죽 마음이 안 좋으면 혼자서 거길 가겠냐는 심정이었다.
물론, 유진의 목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목적지인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유진은 예약해 둔 호텔로 가 짐을 풀었다.
산타모니카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멋진 호텔에 들어서며, 유진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미 한 번 와 봤던 곳이다.
신혼여행의 목적지였으니 당연하겠지.
사실은 다른 호텔로 옮길까 잠시 고민도 해 봤지만, 그냥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던 호텔 방을 보면 뭔가 불쾌한 감정이 살아날까 싶었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쓸데없는 감정은 이미 전부 사라져 버린 모양이다.
그녀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꽤 만족스러운 곳이다.
그녀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꽤 비싼 돈을 지불했던 곳이니까.
무엇보다 해안에 딱 붙어 있어 호텔을 나서 열 발자국만 걸으면 모래사장을 밟을 수 있었다.
3월의 캘리포니아는 한국에 비해서는 따뜻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기기에도, 해변에 놓인 선베드에 누워 오후를 즐기기에도 딱 좋은 날씨였다.
지난 삶에서 대륙 반대쪽인 뉴욕주에서 살았었던 유진은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는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LA 시내를 다녀오기도 하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석양이 질 무렵 선베드에 누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부담이 없는 휴가를 마음껏 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며칠인가 보내다가, 시내에 나가 복권 판매점에 들러 복권을 구입했다.
자신의 생일, 자신의 나이, 그녀의 생일, 그녀의 나이, 그리고 결혼하기로 한 날짜.
나머지 한 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떤 기억은, 그리고 어떤 숫자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복권을 사서 돌아오는 길, 유진은 다시 한번 그날을 돌이켜 보았다.
* * *
“그러길래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몸도 무거운데.”
신혼여행의 막바지, 라호이아 해변을 구경하고 돌아와 피곤해하던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꼭 와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래. 여하튼 쉬자.”
“어. TV 좀 틀어 봐. 뭐라도 보고 싶어.”
유진은 신부의 말에 리모콘을 찾아 TV를 켰다.
마침 로또 추첨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거 볼래?”
“어? 잠깐만 있어 봐.”
남의 나라 로또 방송을 볼 생각은 없어 리모콘으로 화면을 돌리려는데, 그녀가 저지했다.
“뭐야? 저 번호? 05, 11, 15, 27, 32······ 웃기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5는 내 생일이고, 27은 내 나이, 11은 당신 생일, 32은 당신 나이잖아. 그리고 15는 우리 결혼한 날이고.”
“그러네.”
그때까지 나온 번호 5개가 전부 두 사람과 관련이 있는 숫자였다.
“당첨금이 4억 9천만 달러나 된다. 한동안 1등이 안 나와서 엄청나게 오른 모양이야.”
“그러네. 확실히 미국은 스케일이 크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메가볼 추첨까지 지켜보았다.
이어서 나온 마지막 하나의 숫자는 24였다.
그건 딱히 두 사람과 관련이 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유진은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 신기하네. 저 숫자들 전부 우리랑 관련 있잖아?”
하지만 금세 그 표정은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다시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하나만 빼고 말이야.”
“우리 저걸로 로또 샀으면 부자 됐겠다. 그지?”
“다섯 개 맞아도 부자가 될 수 있나? 음······ 5개 맞으면 100만 달러네! 부자 맞구나!”
“또 알아? 24도 써넣고 진짜 부자가 되었을지.”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때 유진은 그 24라는 숫자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있는 숫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까지는 없었다.
* * *
그리고 아주 먼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지금에서야 그 24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홈 카메라에 등장한 주인공에 대해 알아보니 생일이 12월 24일이었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어찌 되었던 결과적으로는 개이득이네.’
증오해야 할 사람의 생일 덕분에 엄청난 액수를 손에 넣을 수 있다니,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며칠 동안 유진은 다시 호텔에서 두문불출하며 시간을 보냈다.
1등 당첨이 확실한 복권을 들고 밖을 돌아다니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객실 금고 안에 넣어 두고 나갈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룸서비스나 시켜 먹고 노트북으로 인터넷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뉴스 따위를 보며 그가 거슬러온 시간을 되새기는 일도 나쁠 거야 없었다.
로또 당첨이 있던 날은 유진도 꽤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틀림없이 그 숫자가 나올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
하지만 오차는 없었다.
이번 차 메가밀리언 당첨 번호는 유진이 써놓은 그대로였다.
“됐다. 일이 훨씬 쉬워지겠네.”
물론 메가밀리언이 아니라도, 돈을 벌 방법이야 잔뜩 있다.
젊은 시절부터 이런저런 투자를 열심히 해 본 유진이었기에, 머릿속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정보가 가득하다.
아마도 메가밀리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보들이다.
하지만 처음에 지갑이 두둑하면 다음 일도 편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유진은 그날 호텔에서 가장 비싼 샴페인을 주문해서 욕실에 뿌리며 홀로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어쩐지 혼자라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음 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았다.
- 나야. 그래, 잘 지내고 있나?
그의 상사가 어쩐 일인지 전화를 주었다.
“나름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그래······.
잠시 상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가 뭔가 불편한 심정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시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편히 하세요.”
- 그래. 다름이 아니라, 자네 이번 파혼 때문에 말이야. 위에서 얘기가 나왔어. 파혼 사유가 자네의 부도덕한 행동 때문이 아니냐는 거지. 나 참. 뭐, 진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상사는 다시 한번 말을 멈추었다.
“설마 징계라도 내리겠다는 건가요?”
- 설마 그걸로 징계를 내릴 수야 있어? 요즘 노무 관계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대신 재배치 명령이 내려왔어. 보고타 영업소로 전보 발령이야. 어차피 휴가 끝나면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보고타요? 거기 영업소가 있던가요? 아니면 준비 중인 프로젝트라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 번 물어본다.
- 없지? 남미 쪽 정보 수집 역량 강화라는데······. 핑계지, 뭐······.
“그만두라는 거네요.”
유진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대답했다.
- 꼭 그만두라는 건 아니니까. 뭔가 해 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노력해 보자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완전히 눈 밖에 난 것 같으니까요. 그만두지요.”
- 유진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 주신 것도요.”
- 하아, 난처하네.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아마 꽤 위에서 내려온 것 같습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 야! 너, 이렇게······ 여하튼 네가 잘못한 건 없지? 난 너 믿는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 그래. 뭔데?
“저 그냥 바로 퇴사 처리해 주세요. 다시 회사로 가서 사람들 얼굴 보기가 고욕이네요.”
별일 아니라는 듯한 나의 요청에 전화기 너머로 큰소리가 터져 나온다.
-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래도 얼굴은 봐야지? 이젠 나 다신 안 볼 거야?
“뵈야죠. 들어가면 연락 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자진 퇴사하는 쪽이 회사 입장에서도 편할 거예요.”
- 뭐. 어차피 그리될 거라면······. 알았다. 내가 처리는 해 놓을 테니, 들어오면 꼭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이왕 이리된 거 좀 더 천천히 쉬다 들어갈게요.”
- 그래. 또 연락해. 그렇다고 아예 거기서 눌러살지는 말고.
“또 그럴지도 모르지요.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비행기 표 보내겠습니다. 한 번 방문해 주세요.”
상사와 웃으며 전화를 마무리한 유진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쫓아내 주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 정말 거침이 없잖아? 설마 다른 기업에까지 손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진은 자신을 쫓아낸 원흉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뒤, 유진은 다시 전화를 한 통 걸었다.
“나다. 시간 좀 있냐?”
- 시간 없다. 정신없어. 위에서 영업 좀 열심히 뛰라는데, 죽을 지경이다.
“위에서라고 해 봐야 너희 형님밖에 더 있냐?”
-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여기서야 하늘 같으신 사장님이다. 그러니까 니가 나 일거리 좀 주라.
“그래? 잘 됐다. 그럼 일거리 주지. 열심히 할 수 있지?”
- 진짜? 그럼 오랜만에 명성상사 홍보 일 좀 하는 거냐?
“명성상사 일은 아냐. 나 짤렸다.”
이번에도 역시 격한 반응이 튀어 나온다.
- 뭐? 왜? 너 일 잘하는 걸로 이름났는데?
“누구한테 잘못 보인 일이 있나 보다.”
- 나 참······. 근데 너 며칠 전에도 그런 말 없었잖아? 그리고 지금 혼자 신혼······ 풉! 여하튼 미국 간 거 아니야?
“그래. 지금 막 짤렸다고 연락 왔어. 뭐, 보고타로 전보 발령을 내서 퇴사한 거지만 말야.”
- 보고타? 거기 가서 뭐 하라고? 총이나 맞으라고?
“그러게?”
진짜 그런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그럼 일거리 이야기는 뭐야? 벌써 어디 스카웃이라도 된 거야?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맡기는 거야. 비용은 깎을 생각 없으니 넉넉히 청구하고.”
- 아유! 감사합니다, 호갱님!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럴 생각이야. 근데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 봐.”
- 위험? 너 설마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복수하려는 거야?
“복수라기에는 애매하지만, 관련이 없지는 않아. 어때, 무서워? 쫄리면 빠지고.”
- 아니. 돈만 제때 주시면 양잿물이라도 마시지요. 뭔지 말해 봐.
형과 함께 홍보대행 회사를 운영하는 철우는 믿을 만한 친구였다.
정의를 추구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의리 있고, 일 처리가 확실했다.
지난번 삶에서 유진이 힘들게 대양과 싸울 때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던 녀석이다.
“일이 둘이야. 하나는 대양 그룹에 관련된 거고, 하나는 나한테 관련된 거.”
- 대양 그룹? 명성 그룹이 아니고?
“어. 대양 그룹. 그쪽 총수 일가에 대한 정보 좀 모아 줘. 일가 전부. 뭐 뜬 소문이라든지, 사생활이라든지. 뭐든 좋으니까. 너희 쪽에서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말고.”
- 흠······ 알았어. 비용은 알아서 청구한다.
“약간은 바가지 씌워도 돼.”
- 웃기고 있네. 니가 그걸 두고 볼 놈이냐? 그리고 또 하나는 뭔데?
“그건 네 본업과 관련된 거.”
- 홍보? 좋지! 누구를?
“그건 조금 나중에. 우선 앞에 거부터.”
- 알았어. 정보가 모이는 대로 연락 주마.
이제 두 번째의 포석도 끝났다.
유진은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당분간 미국에 머물 생각이라 말했다.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유진은 다시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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