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소송과 소송
- 네 말이 맞았던 모양이더구나.
은거 생활이 두 달이 되어갈 무렵, 부친에게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 네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바로 물량 증산을 요구하더구나. 탐탁지는 않았지만 네 말처럼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지. 대량의 원자재를 가져다가 쌓아 놓은 것까지야 납득할 수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이번에 생산한 제품을 가져가서는 전부 불량이라지 뭐냐?
“그래서요?”
- 뭔가 이상하더구나. 틀림없이 우리가 납품한 제품이 맞기는 한데, 이번 생산품은 아니었어. 더군다나 개중에는 아무리 보아도 우리 물건이 아닌 것도 있더구나.
생각했던 대로 대양중공업은 갖은 수법을 써서 부친의 회사를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 겪었던 일이 반복되고 있다.
단지 지난번에는 앞으로 몇 년 뒤에나 있을 일인데, 훨씬 빨리 왔을 뿐이다.
뭐,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그녀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가 어떤 종류의 사내인지 확인하고 예측했던 그대로이다.
더군다나 파혼을 선언하던 순간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에서 더욱 확신했다.
한데 단순히 시기만 빨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 이번 우리가 납품한 물건에 불량이 너무 많아 수주받은 선박의 건조가 늦어져 손해가 막심하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무려 1,000억 원이나 되지 뭐냐?
지난번보다 훨씬 더 과격한 방법이다.
그쪽에서도 물론 말도 안 되는 소송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송가액 만으로 이쪽을 질려 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친과 동생이 나름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 우선 변호사를 알아보고 있다. 그런데 저축은행에서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는구나. 아무래도 소송 비용 마련도 쉽지 않을 듯하구나.
“제가 알고 있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꽤 유능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니, 적절한 비용으로 소송을 맡아 줄 겁니다.”
지난번 삶에서 마찬가지로 변호를 맡았던 사람이다.
대양중공업을 상대로 3심까지 전부 이긴 것이 전부 그 변호사 덕분은 아니겠지만, 믿어 볼 만했다.
- 그래? 알았다. 한 번 만나보도록 하마.
부친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천억이라는 가당치 않은 금액을 보면 기운이 빠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천억은 엄포용입니다. 어차피 그걸로 이길 생각도 없어요. 우릴 압박해서 꼬리를 내리게 하려는 속셈입니다.”
-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저축은행까지 그렇게 압력을 넣으니, 상황이 좋지 않구나.
당장 얼마가 되었든 소송 비용부터 마련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이 자재 원료를 대량으로 가져다 놓고 자재 비용을 받아가서 현금 흐름도 좋지 않았다.
이미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느라 공장 부지는 물론이고, 오랜 시간 살아온 자택까지 담보로 넣었다.
이제 정상적인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는 것은 어림도 없고, 지인을 통해 당장의 운영자금부터 마련해야 하는 모양이다.
“지난번 신혼집 전세 뺀 거 얼마 전에 들어왔습니다. 우선 그거 보내드릴게요.”
- 그걸 어떻게 쓰겠니.
“어차피 아버지한테 도움 받았잖아요.”
그 집을 마련하느라 이때까지 모은 돈 대부분을 넣고도 절반이 조금 안 되는 돈을 지원받았었다.
- 그걸 써 버리면 다시 마련한다는 보장이 없어. 그냥 잘 가지고 있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 복권에 대해 밝혀도 될 거 같았다.
“저 여기 와 있는 동안에 메가밀리언에 당첨되었습니다.”
- 메가밀리언이 뭐였지?
정말로 기억에 없는 것인지, 경황이 없어서인지, 부친은 바로 이해를 못 했다.
“미국 로또요.”
- 로또? 그래, 잘 됐구나. 그것도 잘 갖고 있어라. 쓸데없이 나 돕는다고 허투루 쓰지 말고. 그건 네 버팀목이라 생각하고 꼭 쥐고 있어야 해.
부친은 설마 1등이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버팀목이 맞겠네요. 소송 비용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많아요. 굉장히 많다구요.”
- 그래? 설마 1등이 됐다는 말은 아니지?
부친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 설마가 진짜네요.”
- 뭐? 진짜 로또 1등이라고? 잘 됐다! 그거 함부로 쓰지 말고, 잘 갖고 있어. 앞으로 내가 너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으니까.
여전히 부친은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냥 갖고 있기에도 꽤 큰돈이네요.”
- 그래, 잘됐다. 여하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우리도 함구하고 있을 테니.
부친은 끝까지 당첨금이 얼마냐 묻지 않으셨다.
“그러기 어려울 거 같아요. 여긴 당첨되면 신원을 공개하고 사진도 찍거든요.”
- 그러냐······ 날파리들이 꽤 달라붙겠구나.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당분간은 한국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 그래. 그럼 그렇게 알겠다.
“참. 당첨금은 4억 9천만 달러에요. 세금 빼고 일시불로 받으면 2,000억 원 정도 되고요.”
- 2······ 2천? 쿨럭!
그 진중하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니 조금 즐거웠다.
“네. 2천억 원이요.”
-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당첨 확인하러 가면 사진 찍고 인터뷰 가볍게 한다니까, 한국에서도 금방 알려질 거예요.”
- 허······ 허어······ 허허······.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양중공업과 소송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소송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그리고 아버지는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생각하시고요. 계속 회사를 운영하실지, 아니면 새롭게 다시 사업을 하실지, 당분간 쉬시면서 리프레시를 하시든지요.”
- 어? 어어······ 내가 지금 너무 놀라서 아직 진정이 되질 않는구나. 여하튼 그렇게 알고 있겠다.
그제야 부친은 소송 비용을 받아들일 생각이 든 모양이다.
“당장 당첨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적어도 두 달은 걸린다네요. 그러니까 우선 그 돈부터 쓰세요. 카드는 유성이한테 맡겨 놓고 왔어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서요. 비밀번호도 유성이한테 물어보시면 돼요. 어차피 이제 돈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아끼지 말고 필요한데 쓰세요.”
- 고맙다.
부친의 목소리가 잠겨 가고 있었다.
유성은 어쩐지 이번 일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위로를 드리고도 편치만은 않았다.
어쩌면 막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막지 않았다.
두 달 동안 당첨금을 확인하러 가지 않고, 놈들이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성진 공업사에 그런 큰 액수가 들어온 것을 알게 되면 녀석들이 방법을 바꿀 것이었고, 그렇게 나오면 유성으로서는 대응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먼 땅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앞으로 두 달 정도 더 기다려도 녀석들이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면 조용히 신원을 밝히지 않고 받을 생각이었다.
캘리포니아는 복권 당첨자의 신원을 밝혀야 하는 주이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약간의 비용이 들 뿐.
다음날, 부친과 다시 통화를 하니 유진이 말한 그 변호사와 수임 계약을 맺었단다.
대충 소송의 얼개를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고 했다.
그리고 반대 소송도 걸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겨도 그다지 이익은 없을 거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소송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고, 그동안 성진 공업사는 운영에 애를 먹을 것이다.
알고 있던 말이지만, 변호사가 먼저 그리 말해 주니 믿음이 더 간다고 했다.
- 참. 그런데 너한테 소장이 날아왔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누구한테서요?”
너무 뜬금없어 과거로 돌아오고는 처음으로 놀라고 말았다.
- 그 아이더구나.
“네? 아!”
-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기에 재산상의 손해와 정신적인 피해가 막심해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 쓰여 있구나. 참 묘하구나. 하필이면 이럴 때 짜 맞추듯이······.
하마터면 짜 맞춘 거 맞습니다······ 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부친에게 짐을 더 안겨 드릴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소장 유성이한테 주세요. 가까운 변호사한테 가져가서 대응하라고 하죠.”
- 아무 변호사나?
“네. 아무 변호사나요.”
이런 식은 죽 먹기에 비싼 변호사를 쓸 필요가······.
아니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가오 빠지게 말이야.
“아니. 생각 좀 해 보고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즐거운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아무래도 저쪽은 점점 더 깊은 구덩이를 파려는 모양이다.
그들은 유진 가족에게 최대한 많은 고통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원하는 대로 됐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묻히는 것이 누가 될지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유진은 다음날 무척 비싼 법무법인을 찾아냈다.
무려 4대 로펌 중 하나이다.
어차피 저쪽에서도 굉장한 법무법인의 변호사를 쓰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쪽도 거기 걸맞은 사람이 필요했다.
직접 전화를 해서, 능력 있는 파트너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 약혼 파혼 손해배상이란 말씀이시죠? 뭐 그런 거까지······.
처음엔 심드렁한 태도였다.
하지만.
“소송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 변호인단을 꾸려 주세요.”
- 네? 파혼 소송에 변호인단이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였다.
- 파혼 소송의 경우 최악의 경우라도 위자료는 4천만 원을 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변태적인 성행위라든지, 불법 행위가 있을 경우에나 그런 위자료가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 혹시 그런 행위를 저질렀습니까?
“천만에요. 저는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입증할 자료도 있고요.”
- 그런데 왜 변호인단이 필요하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나이가 꽤 지긋한 변호사 같은데, 그런데도 굉장히 정중했다.
“재미있으려고요.”
- 음. 뭔가 사정이 있으시다는 말이시죠? 예를 들어 화끈하게 이슈를 만든다거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눈치도 빠른 모양이다.
“뭐. 그런 것도 있고요.”
- 솔직히 말리고 싶군요.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변호사들은 전부 돈만 밝힌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상식적인 변호사였다.
- 하지만 굳이 원하신다면, 어디 시원하게 판을 벌여 보도록 하지요. 예산을 말씀해 주시면 맞춤형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었다.
처음 한 말은 그냥 말뿐이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왠지 즐거워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말리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그건 인간 장홍섭으로서 말한 거고, 변호사 장홍섭은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지옥 불에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멋진 분이시군요. 그런데 맞춤형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뭐. 한국이 떠들썩하게 만들어드릴 수도 있지요. 물론 상당히 비쌉니다. 허허!
“좋네요. 그럼 협의해 보도록 하지요.”
마음에 드는 변호사다.
유진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부친 회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 말씀 들었습니다. 큰아드님 되신다면서요.
“예. 몇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리고 수임료 문제도요.”
- 수임료는 최대한 편의를 봐 드렸습니다.
“아뇨. 저희 요구는 반대입니다. 혼자서 대기업과의 소송을 맡으시는 것은 꽤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필요하시면 인력은 얼마든지 사용하시라고요. 다른 변호사를 고용하셔도 되고, 아니면 협력받을 만한 변호사를 찾으셔도 되고요.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맞게 수임료도 지불해 드리지요.”
- 하하. 원래 변호사의 수임료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라······.
“한 번 제대로 계산해 보지요. 우리.”
그저 기분으로 수임료를 늘리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충분히 자신의 사건에 시간을 투자해 달라는 의미이다.
파혼 위자료 소송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대소동을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며칠 동안 변호사들과 상담을 진행하고 부친과 조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당첨금을 찾으러 가야 할 때가 왔다.
월요일 오전, 유진은 미리 물색해놓은 LA 시내의 대형 로펌을 찾아가 동행을 요청했다.
“만약 신원 노출을 꺼리신다면, LLC(유한책임회사)를 만들어 회사 이름으로 청구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신 세금이 조금 더 나올 수 있습니다.”
변호사가 신원을 감추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 약간이 약 수십억 원 수준이 될 거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신원을 감추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주로 가서 복권을 샀겠지.
유진은 곧바로 변호사를 대동해 캘리포니아 복권국으로 가서 당첨 사실을 알렸다.
신분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한 뒤에, 당첨 금액이 적힌 커다란 종이 패널을 들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은 어쩐지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
호텔 방에 들어와서는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제 진짜로 시작이구나······.
그날은 룸서비스를 시켜 조용히 방 안에서 식사를 했다.
과거로 돌아와 이혼하던 날 이후로 가장 흥분되는 날이었다.
유진은 지금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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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