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07. 형제
유진은 서울의 홍보 대행사로 전화를 걸어 그 남자에 대한 조금 더 세밀한 정보를 요청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 알아. 너 이제 돈 많은 거. 정말로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지?
“그래. 정보만 쓸만하다면 말이야.”
- 와! 우리 세종 홍보 노났네! 노났어! 호갱님 한 분이 기업 하나보다 낫네요.
“언제 들어가면 한잔하자. 그러고 보니 제대로 한턱은 쏴야 뒤에서 욕하지 않을 거 아냐?”
- 한턱은 모자라니 두턱을 쏘십시오. 형님!
그렇게 한동안 철우와 농지거리를 하며 수다를 떨던 유진이 추가 의뢰를 꺼냈다.
“그리고 한 명 더. 류근석과 그 모친에 대해서도.”
- 류근석이면 넷째 아들이지? 모친이 후처였었나?
“어. 그리고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 당연하지. 우리가 무슨 흥신소야? 그냥 홍보 대행업이지. 대기업 상대로 위험한 짓은 절대 안 해. 그냥 정보의 취합만 하는 거야.
“그런 줄 알고 있는데. 노파심에서 그러는 거야.”
- 너희 아버님 회사에 문제가 생긴 게 이 녀석 때문이야?
용건을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철우가 한마디 했다.
“확실하지는 않아.”
- 지금 대양솔루션 사업본부장으로 있는데, 채영 씨가 얼마 전에 옮겨간 곳이 거기지?
느닷없이 훅이 날아온다.
“그렇다고 알고 있어.”
- 설마 너 파혼한 것도······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
이래서 촉이 좋은 놈들이 싫다니까······.
뭐, 촉이 좋은 만큼 일도 잘하니 진짜로 싫지만은 않다.
“잘 모르겠다. 알아보는 중이야.”
- 그래. 쓸데없는 말 해서 미안하다.
“미안한 거 알면 보수 10% 깎는다.”
- 아니, 고갱님! 그런 게 어딨슈! 세상에 그럼 우린 뭘 먹고 살라구유······. 다시는 주제 넘는 짓 안할 겨유. 살려 주슈!
철우가 되지도 않는 억지 사투리로 농을 지껄였다.
“살려는 드릴게. 일이나 잘해.”
- 알겠습니다, 고객님. 따끈따끈한 정보 확실하게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홍보도.”
- 그건 걱정하지를 마. 그게 우리 전공이야.
큰소리를 땅땅 치는 철우와 다시 잠시 수다를 떨다가 전화를 끊는다.
녀석 말대로 홍보는 믿을 만하다. 그러니까 명성에 다닐 때도 세종 홍보에 일거리를 주었었지.
“유성이 지금 집에 있지요?”
이번엔 부친과 통화를 하던 끝에 유진이 물었다.
- 그래. 퇴근하고 같이 들어왔다. 녀석, 요즘은 친구들이랑 술도 안 마시고 조용하구나.
“그런데 유성이 많이 바쁘지 않으면 여기로 불러도 될까요? 당첨금을 받을 때까지 한참 남았는데, 계속 혼자 있으려니 조금 그러네요. 유성이라도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요.”
- 그럼 그래야지. 유성이라도 함께 가 있으면 낫겠구나. 딴 건 몰라도 네 동생이 덩치는 듬직하지 않더냐?
“그러게요. 그런데 유성이 여기 와도 괜찮으시겠어요?”
- 어차피 일이 확 줄어서 회사에 나와 봐야 크게 할 일도 없어. 그 녀석도 요즘 계속 심란해했으니 차라리 거기 가 있으면 오히려 나을 게다.
어차피 소송 과정에 유성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아직 젊은 혈기로 가득해서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동생과는 이것저것 함께 할 일들이 있다.
유진은 앞으로 아주 많은 은밀한 일들을 벌일 것이고, 세상에 그런 일들을 함께하기에는 가족만 한 사람이 없다.
며칠 뒤, 동생이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진은 도착 시각에 맞춰 공항으로 나가 직접 동생을 픽업했다.
“근데 이분들은 누구?”
덩치라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유성이 난생처음으로 약간의 패배감을 느끼며 물어봤다.
“보디가드.”
“보디가드? 아! 그래. 하긴 필요하긴 하겠다. 미국이 워낙 위험한 곳이잖아?”
“생각처럼 위험한 나라는 아니야. 영화에서 그렇게 나와서 그렇지. LA에서도 몇몇 동네만 주의하면 돼.”
지난 삶에서 유진은 뉴욕주의 동쪽 롱아일랜드에 살았었고,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해도 딱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래? 여하튼 마음이 든든해지네. 헬로! 마이 네임 이즈 유성!”
유성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영어로 두 덩치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젠 셋이나 되어 버린 근육 덩어리들과 함께 서 있으니, 어쩐지 거대한 산에 파묻힌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나도 운동 좀 하는 게 좋을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보디가드를 힘끔거리던 유성이 작게 말했다.
“하긴. 너 덩치만 컸지, 전부 물살 아니냐? 운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물살은 아니다. 그래도 군에 있을 때는 나도 쇠질 좀 해 봤다고. 근데 몸에 각이 딱 잡혀 있으니 보기 좋네.”
“그지? 너도 베이스가 있으니 운동 조금 하면 저렇게 폼이 나지 않을까?”
“근데 조금 해서 될까나?”
“좀 도와달라고 해 봐. 그러면서 친분도 쌓고 좋지.”
“그러게. 헬로, 로저.”
유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텔까지 가는 동안 유성은 짧은 영어로 보디가드들에게 말을 붙여 친분을 쌓느라 여념이 없었다.
“근데 아직도 난 얼떨떨하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 아직도 안 믿어진다니까.”
호텔로 돌아와 둘만 있게 되자, 동생은 호들갑스레 유진에게 다가온 행운에 대해 소감을 말했다.
“나도 한참 동안 실감이 안가더라고. 아니,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정확히는 과거로 돌아온 것에 대한 실감이다.
“참.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여하튼 축하해, 형.”
유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축하는 무슨. 나한테만 좋은 일이겠냐? 네 몫도 있으니 이제 여유 좀 갖고 살자.”
“내 몫은 무슨. 나 형한테 그런 거 안 바래.”
그런 녀석이었다.
어지간히 욕심이 없는 형제의 모친을 닮았는지, 유성은 안분지족한 삶을 추구했다.
부친의 회사에 들어간 것도 물려받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일이 좋아서였을 뿐이다.
취미라고는 꽃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인 소박한 놈이었다.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에서, 부친의 회사가 위기를 겪으며 이 순진한 녀석이 눈에 독기가 가득해져 버렸던 상황들을 떠올리면 유진은 눌러 놓았던 분노가 다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여하튼, 이제부터 우리 가족 모두 꽃길만 걷자.”
“그래. 뭐, 형이 잘 되면 나도 좋은 거지. 근데 난 왜 오라고 한 거야?”
“시킬 게 있어서.”
“뭔데?”
“사진 좀 찍어라.”
“사진?”
“어. 나랑 같이 다니면서 사진 찍고, SNS에 올리고 그래.”
“SNS에는 왜?”
“사람들 보고 부러워하라고. 미국 로또에 당첨되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보여 줄 생각이야.”
“나, 참. 무슨 생각이야? 대체······ 설마? 그 누나한테 보여 주려고?”
유성은 대뜸 형의 전 약혼녀를 떠올린 모양이다.
“설마 그렇게 얄팍한 생각이겠니? 그 사람이 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보다도 대양중공업 녀석들이 보는 거야.”
“뭐? 그 자식들한테 보여 줘서 뭘 하려고?”
“그 녀석들, 우리 회사 일이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좋아할 거 같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분쟁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중소기업의 편을 들어 주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이쪽에서 할 말이 훨씬 더 많다.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거액의 로또에 당첨된 것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거야.”
“하긴 형 인터뷰한 거 신문에 기사로 올라갔을 때, 한 며칠 동안은 대양중공업이랑 함께 온 커뮤니티가 불타올랐어.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형 이름이 연예인보다 더 유명했다니까. 그리고 대양중공업 욕하는 글도 얼마나 많았는데.”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원래 이슈라는 게 빨리 사그라들잖아. 며칠 지나고 나니 이제 시들해.”
“당연하지. 이슈를 이끌어 가려면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해. 그것도 매번 새로운 이슈여야 하지.”
지난 삶에서도 이쪽 이야기를 이슈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동안 이슈가 되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흠······. 맞는 말 같아.”
“그러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든 어그로를 끌면 우리 회사와 대양중공업 사이의 일도 자연히 사람들 입에 계속 오르내리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필요한 건 우리한테 전부 있으니까.”
“전부? 뭐가 필요한데?”
“돈.”
유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긴. 돈이면 다 되지. 두고 보자, 이 더러운 자식들. 이제 형도 돈이 있다 이거야.”
유성은 다시 한번 대양중공업을 향해 이를 갈았다.
대양중공업에 대한 적의는 유진보다 유성이 훨씬 더했다.
유진이야 이미 독립해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유성은 부친의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접 보고 들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유진의 목적을 알게 된 유성은 금세 형보다 더욱 의욕적이 되었다.
형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놈들의 행태를 하나라도 갚아 줄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너 사진 좀 찍지?”
주말이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산이나 공원에서 사진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는 것이 동생의 소박한 취미였다.
아마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보다 이름 모를 들풀을 찾아다닌 것을 더 좋아했었지.
저 거대한 덩치로 조그마한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카메라를 들이미는 모습이 영 어색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지. 근데 인물 사진은 잘 안 찍어 봐서······.”
“지금부터라도 연습해 봐.”
SNS 사진이라고 전부 스마트폰에 달린 카메라로 찍어 올리는 것은 아니다.
셀러브리티들은 전속 사진사가 고가의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스마트폰 카메라의 화각을 고려해 촬영하여 마치 셀카인 것처럼 올리고는 한다.
SNS를 성공적으로 이용하려면 생각보다 사진 퀄리티가 중요하다.
“뭐. 카메라 가져오기는 했으니까.”
유성이 자기 가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쨌든 카메라를 오래 다뤄 보았으니까, 영 어렵지는 않을 거 아냐?”
“연습 좀 해 보고. 꽃 사진하고 인물 사진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그래도 해야 되면 해야지.”
“그래. 연습해 봐.”
“그럼 당장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우선은 급할 거 없어. 어차피 당첨금을 받을 때까지는 어그로를 끌 거리도 없으니까.”
“그럼 아직 SNS 개설도 안 한 거야?”
“만들었어. 당첨되고 바로. 그리고 대충 산타모니카 해안 사진 몇 번 올리다가, 복권국에 가서 찍은 사진도 올렸지.”
유성이 작게 감탄했다.
“오! 그럼 그건 꽤 본 사람 많겠네?”
“어. 그날 이후로 포스팅은 한 번도 안 했는데, 벌써 팔로워가 5,000이다.”
“쩐다. 역시 큰돈은 사람을 끌어모으나 보네. 알았어.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할게.”
“그렇게 해. 당첨금 받을 때까지는 그냥 간간히 올리는 정도로 하자. 사람들 관심이 아예 없어지지만 않을 정도로.”
“일주일에 한 번이면 되겠지? 형 비주얼이 나쁜 편은 아니니까 내가 인물사진 적응만 하면 괜찮게 나올 거야.”
“웬일로 네가 이 형 외모를 칭찬하냐?”
“그거야 이제는 그냥 형이 아니라 부자 형님이시잖아. 크크크!”
유성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부자 맞지. 앞으로 부자 형만 잘 따라오면 부자 동생으로 만들어 주마. 참! 그런 의미에서 네가 할 일이 더 있어.”
단순히 사진만 찍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면 굳이 동생을 미국까지 부를 필요는 없었다.
“뭐든 시켜만 줘.”
“뭘 사는 일이야. 너 암호화폐라고 들어 봤니?”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같이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 다음에야 믿고 맡길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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