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0화 (10/363)

#09.

#09. 슈팅 스타

“오늘은 변호사를 만날 거야.”

그런 평범한 일상이 흐르던 어느 하루, 유진이 말했다.

“변호사? 혹시 복권 때문에 그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변호사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유성이었다.

이미 부친의 회사에, 형의 파혼 소송에······.

로또 당첨이 아니었다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만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데 미국 땅에서 변호사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영주권 신청하려고. 그러니까 이민 변호사를 만날 생각이야.”

“이민 오려고?”

유성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게 낫지 싶어. 복권 당첨금을 미국 투자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더라고. 그러면 복잡하게 자금 출처 증명 같은 것도 필요 없고. 복권 살 때 사용한 돈의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만 증명하면 끝이야. 그러니까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 더군다나 수억 달러나 되는 돈을 한국으로 가져가면 골치 아플 것도 같고.”

“뭐. 나쁘지 않네.”

“그래서 넌 어떻게 할래?”

“뭘?”

“같이 영주권 신청할까? 가족이니까 너도 투자 이민 신청을 하는데 훨씬 수월하다더라.”

“나더러 미국에 와서 살라고? 그건 좀······.”

유성은 미국에 눌러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실 지난 삶에서도 그랬다.

유진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부모님과 유성에게 오라고 해도, 가족들은 그저 관광 삼아 방문을 몇 번 했을 뿐, 이민을 오지는 않았다.

“꼭 와서 살 필요는 없지만 일을 하기에는 편할 거야.”

“음, 꼭 당장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물론이지. 천천히 생각해 봐. 아니면 나중에 취업 비자를 신청해도 되고.”

유진은 앞으로도 동생과 할 일이 많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은 경영자보다 개발자로서의 적성이 더 많았고, 그걸 즐기고 있었다.

“취업이라······ 여하튼 지금은 생각 좀 해 볼게.”

결국 이민 신청은 유진 혼자만 하게 되었다.

어차피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 LA와 뉴욕에 각각 회사를 설립하거든.”

생각보다 해야 할 일들이 꽤 있었다.

“하기는······ 이민 올 생각이면 회사가 필요하기는 하겠다.”

“그것도 있고, 아버지 회사에 자금을 보내려면 개인 자격으로 보내는 것보다, 이쪽에 회사를 만들어서 그쪽에 투자하는 형식을 취하는 쪽이 나아.”

“아! 그러겠다. 그냥 돈을 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지?”

“어. 그렇게 되면 증여세만 잔뜩 나와. 그러니까 여기서 회사를 만들어서 정상적인 투자 형태가 되어야 해.”

“그럼 이제 형이 대주주가 되는 거네?”

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대주주는 너야. 네 이름으로도 회사를 만들 거니까. 그리고 넌 나한테 돈을 빌려서 회사의 자본을 확충하는 거야.”

아직은 부친에게든 유성에게든 단순히 돈을 증여하고 거액의 증여세를 부담할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낭비할 돈이 없었다.

2억 달러가 많은 것 같아도, 어디에 어떻게 투자를 할 것인지 계획이 세워져 있어 빠듯할 정도이다.

“어? 뭔가 복잡하네?”

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하튼 시키는 대로 해. 그러니까 네가 설립할 회사 이름부터 정하자.”

“알았어, 채권자님. 어······ 슈팅 스타!”

유성은 그리 고민도 하지 않고 회사 명칭을 정했다.

“그거면 되겠니?”

“어. 그거면 돼. 나 뭐든지 그걸로 하잖아. 메일이든 계정이든.”

유성은 자신이 나중에 어떤 회사를 경영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이름을 지어 버렸다.

“흠······ 슈팅 스타라······. 그거 네 이름을 영어로 한 거지?”

“응. 맞아. 왜? 맘에 안 들어?”

“안 들 게 뭐 있나. 네 회산데. 아니다. 썩 좋구나.”

슈팅 스타 중공업? 슈팅 스타 그룹?

나중에 그런 촌스러운 이름의 회사에 자기가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뒤로 미룰 이유가 없어 곧바로 유진과 유성 형제의 회사 설립을 신청했다.

“슈팅 슈타 LLC······. 그런데 LLC가 뭐야?”

유성이 자기 회사 이름에 붙어 있는 생소한 명칭을 보고 설명을 요구했다.

“유한책임회사. 주식회사와는 달리 법인세를 낼 필요도 없고, 회사 재무 정보를 공개할 의무도 없어서 우리 같은 경우는 상당히 편해.”

“그렇구나.”

여전히 크게 관심 없는 유성이었다.

그리고 한국에도 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유성은 이번에도 슈팅 스타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유진은 조금도 말릴 생각이 없었다.

“혹시 보스가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입니까?”

어느 날 저녁, 존 웨스트윈드가 퇴근하기 전 물어 왔다.

“글쎄요. 메가밀리언 당첨 때문에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죠. 그거 말고는 전혀 유명할 이유가 없어요.”

“요즘 밖에 나갈 때면, 보스를 눈여겨보는 눈길이 때때로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신경이 쓰일 만한 적이 몇 번 정도 있습니다.”

조금 딱딱한 표정으로 웨스트윈드가 말했다.

“그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한 번은 히스패닉 남자. 한 번은 백인 남자였습니다.”

“그러면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겠군요.”

“그걸 판단하는 것은 제 소관도 능력도 아니라서요.”

웨스트우드가 웃으며 말했다.

“눈초리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자리를 피해 버리더군요. 알아 두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죠?”

“보스한테 실질적인 위협이 있느냐에 따라 대응 방법이 나뉩니다. 만일 정말로 상대가 있는 것이 명백하다면 보안 단계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눈길이 엇갈린 걸 수도 있습니다. 보스에게 명확한 위협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희가 좀 더 주의를 하겠습니다.”

“우선은 두고 보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더 생기면 바로 알려 주세요. 고마워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웨스트우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늦게 유진은 세종 홍보의 철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 그때 말한 거 보냈다. 확인해 봐.

“그래. 고생 많았다.”

- 어. 진짜 고생 많았어. 네 말대로 안전이 우선이라, 우리 쪽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많이 힘들었어. 상대가 상대잖아. 대기업 회장님 손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모으려니 쉽지 않아.

“앞으로도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걸 최우선으로 처리해.”

- 이번에는 공식적인 루트 말고도 써야 했거든. 그러니까 만족할 만한 것도 있을 거야.

“비공식 루트라면?”

철우가 짐짓 힘들었다는 티를 내며 대답했다.

- 뭐, 경찰 기록이라든지 그런 거 말야. 그런 거 우리 전공 아닌 거 알지? 그쪽으로 잘하는 흥신소가 하나 있어. 전직 형사가 하는 곳인데, 그쪽에 맡기면서 우리 감추려고 마스크 쓰고 퀵으로 돈 보내고. 여하튼 정신없었다.

“그래. 비용 마음껏 청구해.”

- 그렇지 않아도 잔뜩 청구할 거다. 아주 놀라 자빠질 만큼. 크크. 아! 그리고 홍보 쪽은 어때? 뭐 미진한 거 있으면 말해. 최선을 다해 고객님의 요구에 부응할 테니.

“지금은 없어. 앞으로 서로 잘해 보자.”

- 어. 그래. 너도 이국땅에서 몸조심하고.

전화를 끊고 세종 홍보에서 보내 준 파일을 열어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대양중공업 대표이사 류근수의 차남.

* 13세에 류근수의 자로 입적.

* 초등학교 재학 기록 없음.

* 형제와 여동생 그리고 모친과 함께 나선 행사 없음.

* 고등학교 및 대학 졸업식에도 부친만 참석.

* 류성규를 제외한 다른 일가가 함께 다정하게 모여 있는 모습은 자주 노출되었음.

*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외부인의 소생일 가능성이 농후함.

* 여성 편력 다수.

* 특이점. 유부녀 혹은 연애 중인 상대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주변 증언 다수.

*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왜곡된 성적 지향이 있을 가능성 있음.

* 유쾌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나, 한편으로 폭력적인 기록도 남아 있음.

* 폭력 행위에 관련된 입건 기록 중학교 시절 4회, 고등학교 시절 2회, 성인이 된 이후 1회.

생각보다 훨씬 충실한 보고서였다.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공기록에 접근한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이에서나 알 수 있는 사실들도 나열되어 있다.

물론 그걸 전부 신뢰하지는 않는다.

누구인지도 모를 의뢰인의 요구라면 흥신소에서 얼마든지 멋대로의 자료를 내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참고 자료 정도로만 삼을 생각이었다.

서로 마주하기 전까지는 상대가 진실로 어떤 인간인지는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건 그렇고······.’

유성이 쇠질하러 짐에 간 사이, 유진은 노트북을 열고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가, 그리고 이번 삶에서는 약혼녀였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때로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기꺼이 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본부장님, 너무 짓궂은 거 같아요.”

너무도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 원래 장난치는 거 좋아해.”

“그래도 이건 장난치고도 너무 지나치잖아요. 신혼집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감시하시겠다니······.”

“그래야 자기가 딴짓하는지 안 하는지 안심할 수 있지.”

“나 이 결혼 꼭 안 해도 되는데.”

무언가 아쉬움이 담긴 여자의 목소리.

“난 자기가 이 결혼 꼭 했으면 좋겠어.”

남자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본부장님 너무 변태 같은 거 알죠?”

그녀가 아양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

영상이 플레이되는 내내 유진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분노라기 보다는 비릿한 불쾌감이 올라온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마치 영화 속 이야기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번에는 결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유진은 잠시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결혼 생활을 되새겨 보았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결혼이 끝나고, 유진이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 때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그 지독한 순간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

몇 년이나 자신의 전부라 생각하고 애정을 보낸 대상이 내 핏줄이 아니었다는 사실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욱신!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어떤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는 모양이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