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1화 (11/363)

#10.

#10. 전쟁의 전조

복권 당첨금 수표가 날아왔다.

“이런 큰 액수의 수표를 우편으로 보내다니······ 뭔가 이상해.”

유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그 수표를 받아도 아무 소용 없으니까. 수표를 은행에 입금하고, 그게 정상적인 것인지 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걸려.”

“여하튼 이걸 다시 은행에 입금해야 한다는 거지? 역시 이런 시스템은 한국이 최고야. 여기 있어 보니까 은근 아날로그더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미국은 한국에 비해 디지털화가 훨씬 느렸다.

익숙한 탓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현지 사람들과 달리 뭐든 초고속인 생활을 하던 유성은 몇 년이나 답답함을 느껴야 했었다.

“어쨌든 우선 기념사진부터 찍자.”

“맞다. 이런 엄청난 거액이 쓰여진 수표를 언제 또 보겠어? 이건 확실히 기념할 만하지.”

유성은 새로 구입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수표를 찍었다.

“그럼 그거 잘 들고 있어.”

유진은 새로 맞춘 고가의 정장을 갖추어 입고, 수표를 손에 쥐었다.

“음······ 조금만 왼쪽으로 돌아서 봐. 아니 오른쪽. 손을 조금 올리고.”

그동안 열심히 촬영 연습을 해 온 유성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뽑아내기 위해 모델인 형을 이리저리 조종했다.

“뭐. 이 정도면 되겠다.”

유성이 납득할 만한 사진을 찍고 나서, 일행은 거액의 수표를 가지고 다시 은행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두 명의 덩치 좋은 보디가드와 그에 비해서도 그다지 꿀리지 않는 유성까지 함께 있으니, 크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진은 자기 혼자서 이 막대한 돈을 들고 은행을 가야 했다면 패닉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고 말았다.

2억 1,266만 달러라는 무시무시한 액수가 적힌 수표를 은행에 입금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호텔에 돌아온 형제는 그날 찍은 사진들을 SNS에 포스팅했다.

212,660,000이라는 숫자가 쓰여진 수표 사진이 올라갔고, 뒤를 이어 유진이 수표를 들고 서 있는 사진도 올렸다.

“한참 동안 포스팅 한 번 안 했는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줄까?”

“어. 가질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오키! 이제 다 올라갔어.”

“사진을 포스팅하고 주저리주저리 쓰는 대신 태그만 달아.”

“그럴까? 구차하게 이런저런 말을 쓰는 거보다 그게 낫겠다.”

#212,660,000달러!

#메가밀리언 #당첨금 #수표

- 와! 이 형 진짜 당첨금 받았네!

- 열라 부럽다.

- 나도 줄 섭니다.

- 2000천억 원짜리 수표네! 처음 본다.

- 2천억이겠지. 2000천억이면 200조임.

- 진짜 저 돈을 받는구나.

- 오빠! 멋있어요!

그날 올린 유진의 SNS에는 무수히 많은 댓글이 달렸다.

팔로워도 순식간에 만을 돌파했다.

“다른 커뮤니티에도 형에 관련된 글이 하나씩 올라오고 있어. 확실히 이런 엄청난 금액이면 화젯거리가 되는 모양이야.”

다음날, 점심식사를 하며 유성이 말했다.

“그렇지.”

“좋겠다. 이제 형 완전히 유명해졌어. 뭐, 이번에는 며칠이나 갈지 모르겠지만.”

“그냥 두면 이틀이면 끝나. 요즘 세상은 어떤 이슈라도 휘발성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걸로 형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거야?”

“겨우 SNS에 올린 사진 한 장 가지고 그럴 리 있어?”

“역시 그렇겠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유성이 시무룩해졌다.

“자. 이거 한 번 봐.”

그날 오후, 유진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동생에게 넘겼다.

“응? 기사네? 근데 뉴스퍼펙트? 처음 듣는 신문사잖아?”

“상관없어. 어느 신문사에서 올렸든 이렇게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는 게 중요하니까.”

“하기는. 누가 신문사 사이트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수긍한 유성이 다시 기사를 읽어 본다.

[요즘 SNS에서는 한 행운남의 사진이 많은 주목을 모으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초고액 로또인 메가밀리언에 당첨된 모 씨의 사진이다.]

“이거 형에 관한 기사네? 형 이야기를 SNS에서 끌어오고, 커뮤니티 반응도 실고······ 뒤에는 우리 회사랑 대양중공업 관련된 이야기까지 실었네?”

유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꽤 충실한 기사지?”

“진짜. 우리 쪽 주장은 거의 다 실었잖아? 와! 그때 한 번 이후로 대양중공업 갑질 기사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형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는 해도, 대양중공업 이야기는 쏙 빼고 올리더라고. 근데 이건 잘 나왔다.”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야. 새벽까지 적어도 10개 신문사에서 이걸 올릴 거야. 그리고 포털 메인에 걸리면 다른 신문사들도 기웃거리다가 베껴 가기 시작할 거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대가를 지불했으니, 제대로 일은 해야지.”

“대가?”

유진이 은근한 웃음을 보이며 설명했다.

“인터넷 신문이라고 공짜로 기사를 올려 줄까?”

“돈을 내고 기사를 실어? 하긴 들어본 적 있기는 한데······ 진짜로 그럴 줄이야······.”

“어.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신문사 한 곳당 100씩. 싸게 먹혔지.”

“100? 100만 원? 그걸 받고 우리 기사를 올려 준다고?”

“당연하지. 인터넷 신문에 기사를 올린 다음, 포털에 걸리도록 하는 건 전부 단가가 정해져 있어. 그렇게 한 번 포털에 올라가면 다시 메인 작업을 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내면 다른 신문사에서 베껴 가기 시작하지. 마치 하나의 생태계처럼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와······.”

“그리고 SNS에 올라오는 댓글이나 다른 커뮤니티로 옮기는 것들이 전부 자발적인 거 같아?”

“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전부 돈이란 말이야. 팔로워 절반은 돈 주고 작업한 거고,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작업한 거고, 게시물에 호의적인 댓글도 전부 어디선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뭐야? 그럼 세상에 진짜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야?”

유성은 마치 이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엿본 것처럼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가 없지는 않지. 하지만 그 진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와, 진짜 무섭다.”

“우리나라에 홍보 대행사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아니.”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얼굴로 유성이 말했다.

“그럼 홍보대행사가 뭐 하는 회사인 줄은 알아?”

“음······ 광고?”

“뭐, 비슷하기는 해. 광고 대행도 하지. 하지만 주 업무는 신문사나 방송사 같은 언론 매체에 기사나 뉴스를 노출되게 하고, 그에 관련된 정보를 관리하는 거야.”

“뉴스나 기사도 관리할 수 있어?”

“사실 기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사람은 홍보 대행사 사람이나, 기업의 홍보 담당자야. 기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홍보 담당자는 자신의 고객에 관한 호의적인 기사가 나오게 해야 하니까.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런 만남 가운데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지. 예를 들어 기자의 편의를 조금 봐 준다든지, 저녁때 술값을 치러 준다든지.”

아직은 김영란법도 나오기 전이다.

기자가 넉넉한 선물을 받아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 어어······ 그건 기사가 아니잖아. 그냥 홍보물 아니야?”

유성은 동심이 깨어져 버린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이지. 언론사의 기사도 그런데, 그까짓 댓글 정도야 무슨 대수겠어.”

“그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댓글들이 전부······.”

유성은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다.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 제시 정도야. 대체로 첫플이 제일 중요하거든. 게시물이든 포스팅이든 올리고 나서 처음 올라오는 첫 번째 댓글이 어떤지에 따라 전체적인 댓글의 성향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어.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쓰면 아주 망신창이가 되기는 하지만.”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또 그걸 이용해서 일부러 엉망진창인 댓글을 올리기도 해. 누가 봐도 멍청해 보이는 글 말이야. 그러면 다른 댓글러들의 융단 폭격을 받게 되고, 그 뒤로는 비슷한 성향의 글을 올리기 어려워져.”

“그렇구나······.”

“여하튼, 그런 식의 작업은 사실 기업들에서 많이 사용해.”

“기업들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기업마다 홍보실이 뭐 하러 있겠어?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니겠니?”

“그럼 대양 그룹에서도?”

유성이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당연히 그쪽도 마찬가지이지.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와 대양중공업 사이에 관련된 기사나 게시물 따위에는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질 거야. 그리고 유리한 것은 그런 기사나 게시물을 먼저 올리는 쪽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첫 번째 댓글이 제일 중요하거든. 첫 댓글을 올리려면 기사든 포스팅이든 게시물이든 언제 올리는지 아는 쪽이 유리하겠지?”

* * *

테헤란로에 위치한 대양중공업 서울 사무소 대표이사실에서는 아침부터 두 부자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오늘 기사 난 것 봤느냐?”

대양중공업 대표이사이자 류성규의 부친이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오전에 보고 받고 확인해 보았습니다. 기사 출처는 뉴스퍼펙트라는 마이너 신문사였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성규가 대답했다.

“메이저든 마이너든 상관없지. 그게 쭉 퍼져 나가서 여기저기 올라갔고, 기어이 포탈 메인에 걸렸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올라오고 금세 내리도록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귀찮은 날파리가 한 마리 생겼더구나. 그냥 자기네가 올린 기사는 아닐 테고.”

“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 일을 맡긴 출처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뉴스퍼펙트에서는 청부 기사라는 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하루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아볼 방법은 다 있으니까요.”

성규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려 애썼다.

“그럴 거 없다. 어차피 그럴 놈들이야 뻔하지. 뉴스퍼펙트인지 뭔지는 놔둬라. 괜히 빈대 잡다 초가삼간 날릴 거 없다. 별거 없는 놈들이라도 언론의 탈을 쓰고 있으니, 괜히 얼굴 붉힐 거 없어.”

“알겠습니다.”

“메인에서 내려갔고, 메이저 신문사에는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더구나. 그건 수고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 건 알고 있겠지?”

“네. 성진공업사에 자금 여력이 생겼으니 아마 계속 이런 행위를 할 모양입니다.”

“미국에서 복권이라니. 운이 좋은 놈이군.”

대양중공업 류근수 대표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습니다.”

“정말로 그 돈을 전부 소송비용으로 쓰지야 않겠지만,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압박이 잘 먹히지 않겠더군요. 더군다나 알아보니 그 집안 인간들이 고분고분한 인간들은 아닌 모양입니다.”

원래였다면 고분고분하든 말든 소송비용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대에게 눈먼 돈이 생겼으니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다.

“정확하게 노린 게지······ 타이밍을 아는 놈이야. 영악한 놈이었던 모양이더구나. 성진정공 첫째 아들 녀석.”

류근수 대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글쎄요. 저도 그것까지는······.”

“명성 상사에서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더라. 얼마 전 박 사장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사장까지 이름을 알고 있더구나. 그런데 네 녀석이 박 사장 아들내미한테 말해 잘랐다며?”

“일에 방해가 될 거 같아 그랬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평이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쓸데없이 박 사장한테 빚을 하나 지고 말았구나. 그날 박 사장이 그 녀석 이름을 세 번이나 거론했다. 얼마나 대단한 인재였는지야 알 바 아니지. 여하튼 네가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죄송합니다.”

“그 빚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려무나. 내 선까지 올라오면 곤란하지.”

“네. 아버지한테 폐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냥 그렇다 치고······. 성진 정공을 대체하려고 세운 대륙공업에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구나.”

어차피 이기려고 건 소송이 아니다.

소송을 통해 압박을 넣다가,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하고 공장을 자신들이 세운 대륙공업이라는 하청 회사에서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해외에 만들어진 사모 펀드에서 투자해 설립한 대륙공업은 대양중공업에 기존보다 훨씬 더 높은 단가로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당연히 대륙공업의 수익은 다시 해외로 돌아가고, 거기서 모인 돈으로 대양중공업 주식을 싸게 매수해서 지분을 늘린다.

그리고 언젠가 주가가 꼭대기에 올라가면 반대로 비싸게 팔아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한마디로 손 집고 헤엄치기였다.

계획대로 흘러가기만 했다면 말이다.

“불량률이 너무 높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단가 조절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년 계획이었지? 원래는?”

성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원래의 프로젝트대로라면 대륙공업이 2년 동안 충분한 경험을 쌓은 다음에 성진을 떨궈 내는 거였어. 하지만 이번에 보인 네 조급함 때문에 손실이 커지겠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걸 만회하려면······ 부실 규모를 키워야겠구나. 내년 주식 시장에 대응하려면 말이지.”

“대책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조만간······.”

“아니다. 대륙공업과 성진에 관한 일은 네 동생에게 맡기기로 했다.”

부친의 말에 성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넌 경영보다는 금융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더구나.”

오늘은 쓴소리를 듣게 될 모양이다.

평소와 달리 성규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뭐든 적재적소가 중요해. 그건 사람을 부릴 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지. 꼭 네가 경영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네. 이번 일을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아이······ 이번 장난감이라던 애 말이다. 혹여 더 문제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아버지.”

성규는 이날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알아서 처신하거라. 할아버지가 널 귀여워하신다 해도 대양에 풍파를 몰고 온다면 그날로 내치실 어른인 거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날 성규는 꽤 오랜 시간 부친의 사무실에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부친과의 불쾌하기만 했던 자리를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온 성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성규는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보디가드라고? 총까지 갖고 다닌다고? 어, 그래. 아카데미? 그건 또 뭐야? 블랙워터? 미친 거 아냐? 나 참. 웃기는 놈이군.”

전화를 하는 내내 성규의 얼굴에는 계속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계속 감시는 해 봐. 그래? 그럼 우선 손 떼지 뭐. 그래, 수고했어.”

전화를 끊고 나서야 성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순간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차갑고 잔혹한 기운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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