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1. 오래된 미래
“미국은 뭐든지 늦는 거 같아. 뭐 또 수표 확인에 며칠이나 필요하다는 거야?”
유성이 투덜거렸다.
돈이 안 들어와서가 아니라, 한없이 느린 미국식 일 처리가 답답했기 때문이다.
“2억 달러가 넘는 돈이야. 그 정도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야.”
은행에서 수표의 입금이 확인될 때까지는 다시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은행으로부터 수표가 확인된 후, 유진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뉴욕에 설립한 LLC 계좌에는 2억 달러, LA에 자신의 이름으로 설립한 LLC 계좌에는 766만 달러로 분산시켜 입금했다.
그리고 LA에 유성의 이름으로 설립한 LLC 계좌에도 500만 달러를 넣었다.
“그러니까 내가 벌써 500만 달러의 부채가 있단 말이지?”
로펌에서 형인 유진으로부터 500만 달러의 채무가 있다는 것에 대한 공증을 마친 유성이 말했다.
“명확하게 해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아주 골치 아파져.”
문제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적정 이자까지 명시해 놓았다.
“매년 이자를 지급하지 않으면 세무 당국에서 그걸 증여로 간주해서 엄청난 세금을 추징할 거야.”
“근데 이자가 연 20만 달러? 내가 무슨 수로 그 큰돈을 갚는단 말이야?”
대차 계약서를 손에 쥐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유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자를 갚으려면 죽기 살기로 일하라고.”
유진이 채권자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선 한국에 설립해 놓은 법인으로 200만 달러를 송금했다.
이제 한국의 법인은 그 자금을 다시 부친의 회사에 투자할 것이다.
“이제 소송은 걱정 없는 거지?”
돈을 한국으로 송금하고 나서 유성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소송은 전부터도 질 까닭이 없었어. 그쪽도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고. 다만 대기업과의 소송이 시작되면 중소기업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기에 시작했을 뿐.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회사는 망하고 인생도 말아먹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우린 이제 괜찮은 거지? 소송도 이기고 망하지도 않으면 대양 놈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는 거잖아?”
“겨우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걸로 성이 차겠어? 놈들은 우리 삶을 전부 망치려고 했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형이 2,000억이 넘는 돈이 있다 해도, 상대는 대양 그룹인데.”
사람들은 대기업과 싸우면 인생이 망한다는 진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유성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넌 여기서 이만 끝냈으면 좋겠어? 소송도 적당히 마무리 짓고?”
“아니. 그럴 수야 없지.”
유성이 다시 눈가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솔직히 억울하잖아? 우리는 대양에서 주문받은 제품을 열심히 만든 것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돌려줘야지. 그만큼. 남의 인생을 짓밟으려 했으면, 자기네 삶도 짓밟힐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떻게? 소송에서 이긴다고 그 사람들이 크게 타격이나 가?”
“소송만으로 끝내면 안 되지. 우리의 소중한 걸 빼앗으러 들었으니 녀석들의 소중한 걸 빼앗아 줘야지.”
“소중한 거? 설마 대양중공업?”
“그것도 그렇고.”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에이, 대양중공업이 얼마나 큰 회사인데. 겨우 2,000억 원으로 살 수 있나······.”
“지금 시가 총액이 아마 10조가 안 되지?”
“거봐! 그런 대기업을 어떻게 산단 말이야? 그런데 듣고 보니 어마어마하네······.”
“지금 당장은. 그리고 산다는 소리 안 했어. 빼앗는다고 했지. 녀석들이 어디 우리 성진 정공을 제값 주고 사려 했었나?”
“그야 그렇지만······ 여하튼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형 말대로 녀석들의 소중한 회사를 빼앗을 수 있다면 아주 속이 시원하겠네.”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따라와.”
“알았어. 형은 원래 똑똑한 사람이니까. 뭔가 계산이 있겠지.”
반신반의하고는 있지만, 유성은 형의 야망을 그냥 허풍이라고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한국의 업무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유진은 대양중공업과의 소송을 수임한 한마음 법무 법인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륙공업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우리 회사 대신 대양중공업에 부품을 납품하게 된 회사입니다.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외국계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인데, 아마도 대양중공업 대표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 뭐, 흔한 일 아니겠어요? 대기업 1차 벤더라는 게 대개 사주 주머니 채우는 역할이잖아요.
변호사는 놀라지 않는다.
“성진 정밀에서 납품하던 부품의 스펙을 조금 바꿔서 훨씬 비싼 가격으로 납품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부품 제작에 사용되는 매뉴얼은 성진 정밀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쓰고 있고요.”
- 그 매뉴얼이 어떻게 대륙공업으로 넘어갔습니까? 도난인가요?
“아닙니다. 성진에서 대양중공업에 제공한 겁니다. 그쪽에서 자기들이 부품을 사용할 때 필요하다며 가져갔습니다. 이쪽에서 원청 업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 그렇죠.
“그러니까 대륙공업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필요한 비용은 전부 청구하십시오.”
- 의뢰인이 부자시니 일하기가 편하네요, 진짜. 흐흐.
오 변호사는 검사나 판사 출신도 아니었고, 서울대학교를 나오지도 않았다. 당연히 고액의 수임료가 붙는 소송은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명석하고 성실하며,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유진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네. 부자니까 아주 마음껏 청구하세요. 흐흐.”
유진도 비슷한 톤의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양중공업에서 제품 생산을 위해 제공한 원재료가 갈수록 하품이었습니다. 지금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원재료는 더하고요.”
-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상의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대양에서 떠맡긴 원재료 양이 얼마나 되죠?
“20억 원어치는 될 겁니다. 돈은 다 받아갔고요.”
쓸 데도 없는 원재료 때문에라도 성진 공업이 입게 될 타격은 막대했다.
그 비용을 주느라 다시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었다.
- 그럼 반환 소송을 하죠. 그것도 꽤 큰 재료가 될 겁니다.
“그렇게 하죠. 그럼 변호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 네. 빠른 시간 안에 소장 작성해서 접수하겠습니다.
“아뇨. 급하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더 이상 저쪽 편이 아니니까요.”
메가밀리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하루하루 돈이 말라가니 소송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금이 풍부한 지금에 와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 그럼 일부러 지연시키라는 말씀입니까?
“지연까지는 아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연 작전은 저쪽에서 쓸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
- 굳이 그럴 이유라도?
“아무래도 내년 이후로 대양중공업에 꽤 힘든 시기가 올 것 같아서요.”
- 무슨 정보라도 있는 건가요?
변호사가 꽤 흥미로워했다.
“대양중공업이 최근 2년 사이 고가 선박 수주를 꽤 했습니다. LNG선이나 드릴선, 그리고 FPSO 같은 것들이죠.”
- 네? FPSO요? 그게 뭔데요?
“시추선의 일종입니다. 여하튼 요 근래 조선 사업에서 저가 선박 분야는 중국에 빼앗기고 있어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고가의 선박에 집중하고 있죠.”
- 거기 문제가 생긴다는 거군요.
“요즘 석유 가격이 들썩이는 거 같아요.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으니, 뽑아내는 거에 비해 덜 팔린다는 것 같더군요.”
- 아! 그럼 그 비싼 배들은 어찌 됩니까? 어차피 돈을 주고 주문한 거 아닙니까?
“그 배들이 워낙 비싸야 말이지요. 차라리 계약금을 포기하는 업체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겪은 일을 바탕으로 건네는 정보에 변호사가 걱정스레 되물었다.
- 어이구야! 그럼 문제네요! 대양중공업뿐 아니라 조선업계 전부가 힘들어지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반대로 유가가 올라가면 조선업계에 호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 시리아나 이라크가 엉망이잖아요. 유전도 불타오르고 그러면 유가가 하루아침에 천정부지로 오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죠.”
- 어? 그렇게 유가가 오르면 나라 경제가 힘들어지겠네요? 참 어렵네. 이래도 안 좋고, 저래도 안 좋고.
“그러니까 말이죠. 어차피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반반이라면 우리 쪽에서야 대양중공업이 힘들어지기를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지난번에는 지금부터 몇 년 뒤, 조선업이 다시 수렁에서 헤어나온 뒤에 소송전이 벌어졌다.
당연히 그쪽은 여유가 넘쳐났었고.
- 그러네요. 알았습니다. 급하게 하지 말고, 최대한 증거를 모으고, 논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변호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쪽이 하는 말을 금세 알아듣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한다.
뒤를 이어 약혼 파혼 소송을 맡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도 급하게 할 필요 없다고 전했다.
- 어차피 최소 6달은 걸릴 겁니다.
“그보다 더 늘어지면 좋겠어요.”
폭탄은 한꺼번에 터질 때 위력이 강화되는 법이다.
유진은 진행 중인 두 개의 소송이 비슷한 시기에 결과를 내길 원했다.
- 알겠습니다.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죠.
변호사는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이쪽 소송은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필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 난장판을 만들어 줄 쇼맨십 정도일 것이다.
“뉴욕에 가서도 아카데미에 경호를 맡길 생각인데, 두 사람은 어때요? 함께 가지 않겠어요?”
LA에서의 일을 마치기 전, 유진은 아카데미의 존 웨스트윈드와 로저 버튼 두 사람에게 제안을 해 보았다.
유성도 같이 쇠질을 하며 친해진 탓에 둘을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뉴욕에 가서도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은 아니고, 아마 절반 정도는 뉴욕에, 절반 정도는 이곳 LA에서 보낼 것 같아요. 거절한다고 해도, LA에 올 때는 두 사람이 경호를 맡아 주면 좋겠군요.”
“어차피 가족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스 곁에 있는 쪽이 편하네요. 나도 그러지요.”
두 사람 모두 계속 경호를 맡는 것을 선택했다.
그 주 주말, 유진은 세 명의 덩치를 대동하고 LA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등석은 처음인데 뭐 별거 없네. 미국으로 올 때 탔던 비즈니스보다 못한 거 같아.”
“미국 항공사들은 1등석을 없애는 추세라더라. 외국 항공사들은 1등석을 더욱 고급화하고, 가격도 세 배까지 비싼데, 미국에서는 그렇게나 차이가 나지도 않는 모양이야. 아마도 진짜 부자들은 자가용 비행기나 전세기 같은 걸 이용해서 그런지도 몰라.”
“그런가? 여하튼 살다가 1등석도 다 타보네. 근데 여기 스튜어디스들은 다들 연세가 되어 보이시네.”
“요즘은 스튜어디스라고 안 하고 캐빈 크루, 플라이트 어텐던트라고 해야 해. 미국에서는 남녀 구별하는 표현이 점점 금기가 되어 가고 있어. 뭐든 성중립적인 표현을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례하거나 성차별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어.”
“그래? 거 참······ 복잡하네.”
얼마 가지 않아 한국도 그렇게 변해 갈 것을 유성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그걸 알고 있던 유진도 그런 세상이 더욱 진보된 세상인지, 아니면 피곤하기만 한 세상인지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뉴욕행 비행기의 1등석에 앉은 유진은 감회에 잠겼다.
어쩐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사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몇 달 전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 유진은 뉴욕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로는 뉴욕 동쪽 롱아일랜드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던 참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의 본거지는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이었다.
부친의 회사에 닥친 위기와 더불어 자신의 결혼 생활이 비극으로 끝나면서 한국에서의 생활을 버티기 어려웠던 유진은 미국으로 건너왔다.
현지 회사에서 한국에서보다 더 큰 액수의 연봉을 제안하는 오퍼가 들어왔기에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자신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성 상사에서 10년 동안 프로젝트 오거나이징을 전문으로 해온 경력이 미국에서도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었다.
뉴욕에서 유진은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부자가 되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재산이야 그저 남을 부러워하지는 않아도 될 만큼 벌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삶이 여기 안착했다는 것이다.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뉴욕에서의 삶은 완벽한 실패로 끝나버린 서울에서의 삶과는 달랐다.
‘그 녀석들 잘 있겠지?’
유진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지인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대개는 지금도 뉴욕 어디에서인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유진이 기억하는 그런 관계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지인들이야 이미 맺어놓은 관계가 대부분이니 큰 문제는 없지만, 이 땅에서의 사람들은 본래 앞으로 몇 년 뒤에야 처음 만나게 될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시 만날 수 없는 지인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그 인연들을 전부 없던 것으로 할 생각은 없다.
그 사람들과 쌓아 올린 수많은 경험들은 여전히 유진의 머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시 시작해야겠네.’
아쉬움은 남았지만, 관계는 다시 만들어가면 된다.
오랜만에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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