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 뉴욕의 궁전
“호텔까지는 택시 타고 가면 되나?”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유성이 물었다.
“아니. 차는 이미 불러 놓았어. 아! 저기 있다.”
유진이 흰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 들고 기다리고 있는 제복 차림의 건장한 백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미스터 캉? 반갑습니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 왔다.
“누구야?”
“어. 호텔에서 보낸 운전수. 뭐 해? 빨리 사진 찍어.”
“호텔에서 운전수를 보내 줘?”
유성은 갸웃거리며 제복 남자와 유성의 사진을 찍고, 두 사람 뒤를 따라 걸었다.
“뭐야? 이 차는?”
그리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차를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뭐긴. 리모지. 처음 타 보지? 이런 거.”
“리모? 아! 리무진······ 당연히 처음이지.”
이제는 익숙한지 유성은 형이 시키기도 전에 롤스로이스 팬텀을 길게 늘인 리무진의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차에 올라타서도 유성은 안락한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형의 모습을 찍었다.
“근데 좀 거만해 보인다.”
사진을 찍던 유성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 어울려?”
“세상에 거만한 자세가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냐. 있어, 그런 사람들.”
한국에서 거만하다는 것은 최악의 꼬리표이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대기업의 총수도, 수십만의 팬을 거느린 스타도 거만하다는 딱지를 받는 순간 모두의 지탄을 받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만큼이나 비난을 사는 것이 거만하다는 꼬리표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비난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젊은 시절 이후로 미국에 넘어와 산 탓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는 겸손한 행동보다 자신이 가진 재능, 능력, 부 따위의 가치를 최대한 내보이는 것이 오히려 유능하다는 평판을 받게 해 주었다.
형제를 태운 리모는 맨해튼 중심부의 호텔 앞에 도착했다.
“뉴욕 팰리스 호텔? 굉장히 고풍스러운 곳이네?”
ㄷ자로 건설된 오래된 건축물 앞에서 위를 올려보며 유성이 말했다.
“그렇지? 뉴욕에서 최고의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여기랑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둘 중 하나를 말할 거야.”
유진은 앞으로 몇 달 뒤면 월도프 아스토리아는 중국의 보험사에 팔리고, 내년에는 이 유서 깊은 호텔도 한국의 한 유통 전문 기업이 인수하게 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두 호텔이 아시아의 두 나라에 연거푸 넘어가는 것은 어떤 상징과도 같은 일이었다.
“좋아. 그럼 사진부터 찍자.”
유성은 형에게 서 있을 위치를 지정해 주고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제는 슬슬 형보다 더 SNS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는 동생이다.
고풍스러운 호텔 건물 앞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도착할 때까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서 오십시오. 팰리스 호텔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비에 들어서자 격식 있는 정장에, 보타이를 매고, 흰 장갑을 낀 중년의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 왔다.
“와! 무슨 지배인쯤 되는 사람인가?”
유성이 내게 슬쩍 물어 본다.
“샴페인 스위트를 맡고 있는 라이노넬입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프런트가 아닌 엘리베이터로 일행을 이끌었다.
“버틀러야.”
유진이 조용히 유성에게 설명해 주었다.
“버틀러? 집사? 호텔에 그런 것도 있어? 그런데 스위트? LA에서도 스위트룸에 있었잖아. 근데 거기는 집사는 없었는데?”
버틀러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유성이 말했다.
“조금 특별한 스위트니까.”
“그래?”
아직 유성은 뭐가 특별하다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은 잔뜩 치켜 올라갔다.
“뭐야? 무슨 호텔 방이 이렇게 커?”
유성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라 두 형제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호사스럽게 꾸며놓았다.
어지간한 방 크기의 욕실, 거실 한쪽 벽에는 알 수 없는 현대 미술이 그려져 있고, 벽도 바닥도 틀림없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보이는 멋진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호텔에 이렇게 커다란 방도 있어? 어라? 뭐야? 방안에 계단도 있네? 2층짜리야?”
“아니, 3층짜리. 한국 평수로는 100평이 넘어. 그리고 뉴욕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도 있지.”
“맙소사. 100평? 그 정도면 저택 수준이잖아? 무슨 호텔 방이 이렇게 큰 건데? 아니, 그보다 숙박비가 얼마야?”
“2만 5천 달러.”
“한 달에? 아니면 일주일에?”
설마 하면서도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하룻밤 숙박비라기에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으니까.
“당연히 하루지.”
“뭐야? 진짜 하루 2만 5천? 그럼 하루에 3천만 원이나 한단 말이야?”
“그렇지.”
“그럼······ 한 달에 10억 원? 말도 안 돼! 누가 이런 방에 머문다고?”
“보통은 세계 각국의 정상들. 이 근처에 국제기구들이 꽤 몰려 있고, 정상 회담 같은 게 자주 열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왕들이 평범한 방에 머무를 수는 없잖아? 그리고 세계적인 대기업 회장들도 뉴욕에 오면 여길 쓴다네.”
“아아······ 그렇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겨우 로또 당첨 따위로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야.”
“뭐, 며칠인데. 평생 한 번쯤은 머물 만하지 않겠냐? 그리고 한 달에 10억이면 1년에 120억, 10년에 1200억······ 얼추 이자 생각하면 20년은 여기 살 수 있어.”
“하아······ 뭐, 로또 당첨금을 전부 호텔 비용으로 쓰는 것도 이슈가 되기는 하겠다.”
“그렇지?”
“참, 그 누나 말이야······ 화려한 걸 되게 좋아했는데 말이지······.”
유진은 동생이 누굴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빨리 사진 찍어서 올려야겠다.”
갑자기 유성이 신이 나서 호텔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배 아파 죽으려 하겠네. 크크크!”
왠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게 진짜로 자신이 신이 난 것인지, 아니면 형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배 안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형이 아닌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알고 있는 유성은 그녀에 대해 적지 않은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속 쓰려 할 것을 생각하면 유진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날 저녁은 객실에 포함된 테라스에서 우아하게 칼질을 했다.
“그건 와인이야?”
유성이 소믈리에가 따라 주는 고색창연한 술병을 보고 물었다.
드넓은 테라스에는 소믈리에 말고도 서빙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테이블 옆에는 흰색 모자를 쓴 쉐프들이 즉석으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샴페인.”
“샴페인? 그건 처음 마셔 보네.”
“우리가 묶고 있는 스위트룸이 이 브랜드 샴페인하고 협업으로 만든 거래.”
“그래? 그러고 보니 뭔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랬냐?”
“그랬기는. 내가 뭘 알아. 그렇다니까 그냥 해 본 말이지. 크크.”
“하긴. 우리가 뭘 알겠냐. 음······ 사실 이것도 뭐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샴페인 한 모금을 마시고 유진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음, 진짜. 그냥 거품만 터지네. 그리고 뭔가 쿰쿰하기도 하고. 난 샴페인은 상큼한 건 줄 알았는데.”
유성의 표정도 비슷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서?”
두 형제의 표정을 보고 소믈리에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뇨. 괜찮아요. 처음 마셔 보는 거라 그래요.”
“그러시군요. 외노테크 1996년 빈티지는 근 20년 동안 가장 우수한 빈티지로 유명합니다. 천천히 음미하시면 아주 다양한 풍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평범한 샴페인이 아닌가 보지? 음······.”
유성은 다시 한번 샴페인을 입에 머금고 음미해 보려 노력했다.
“어. 비싼 거겠지. 20년도 넘은 건데.”
“이게 얼마짜리죠?”
유성이 소믈리에에게 물었다.
“4,500달러입니다.”
“풉!”
유성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형! 이거······ 돈 주고 산 거야? 아니지?”
“어. 일주일 동안 묶는다고 웰컴 기프트로 한 병 준 거야.”
“휴우, 다행이다.”
유성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음. 공짜라고 하니까 괜히 맛있게 느껴지네. 아주 좋아요.”
유성이 소믈리에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어? 근데 일주일이면······ 2억 원이나 되는 거 아냐?”
그리고 그새 계산이 끝났는지 유성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렇지? 텍스랑 봉사료랑 다하면 그 정도 될 거야.”
“쿨럭! 일주일에 2억 원이라니······ 나 얹힐 거 같아.”
“돈 생각은 하지 말자. 나도 속이 편하지는 않으니까. 쿡!”
그러면서도 유진은 웃고 있었다.
“한 잔 더 줘요!”
유성이 샴페인을 벌컥벌컥 마시고 유리잔을 내밀었다.
“2억 원에 5백만 원짜리 선물이면 별거 아니잖아? 아까우니까 바득바득 비워야겠어!”
유성은 샴페인은 물론이고 테이블 위에 오른 메뉴를 정말로 핥아먹듯 깨끗하게 비워 버렸다.
“아아, 너무 배불러. 죽을 거 같아.”
“어쩐지 미련하게 잔뜩 먹더라.”
“아까우니까 그렇지! 2억 원이라니······.”
“아까워할 거 없어. 앞으로는 너도 그런 술 그냥 물 마시듯 가볍게 비우게 될 거니까.”
앞으로 3년만 지나면 유성이 지금까지 사 놓은 코인 가격만으로도 이런 호텔비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더욱 그러하고.
그런 자신감이 있기에 유진은 돈을 쓰는 것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 뉴욕입성 # 뉴욕팰리스 # 샴페인스위트
# 돔페리뇽외노테크 #웰컴기프트
그날 저녁 유성은 열심히 사진을 포스팅했다.
아마 가장 많은 사진이 올라간 날일 것이다.
- 무슨 호텔 방이 저렇게 화려하냐?
- 쩐다! 부럽다.
- 사랑해요! 오빠!
- 뉴욕 팰리스 샴페인 스위트 찾아 보니 하루에 25,000달러더라. 방 크기가 140평이래! 미쳤다.
- 25,000달러? 그럼 삼천만 원? 헉!
- 한 달이면 10억 원이네? 1년에 120억 원? 아무리 로또 당첨자라도 저건 과소비인 듯.
- 그러게. 로또 당첨자들이 돈을 물 쓰듯이 쓰다가 거지 된다더니······.
- 그래도 2,000억 원이면 하루 정도는 쓸 만하지 않음?
- 하루야 괜찮겠지. 나 같아도 하루 정도는 과소비해 본다.
- 돔 페리뇽이면 졸라 비싼 거 아님?
- 돔 페리뇽 생각보다 그렇게 비싼 술 아님. 30만 원이면 뒤집어씀.
- 저건 달라. 96년 빈티지면 면세점에서 150만 원이야.
- 150이면 저 형 수준에선 비싼 건 아님.
- 면세점에서 그 가격이지, 술집에선 500만 원은 넘을걸?
- 웰컴 기프트라잖아. 그러고 보니 괜찮네.
- 글게. 지난번 팰리스 호텔에서 웰컴 기프트로 와인이랑 치즈 플레이트 받았는데 괜찮더라.
- 형도 뉴욕 팰리스?
- 아니. 용인 팰리스.
- 네. 용인 궁전 호텔은 저리 가시구요.
오늘 따라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었다.
물론 악플도 적지 않다.
- 이놈도 오래 못 갈듯.
- 그니까. 그렇게 큰돈이 생겼으면 안전하게 은행에 넣어 놓고 평생 설계를 해야지, 얜 돈 쓸 생각부터 하네.
- 몇 년 만에 망하나 보자.
- 진짜! 하는 짓 봐서는 폭망 각이네. 이 새끼 거지되면 졸라 꿀잼일 듯.
“이 자식들이!”
SNS를 살펴보던 유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형! 이 자식들 어쩔까? 지워 버릴까? 아님 답플이라도 달까?”
“그러게 댓글 읽지 말라고 했잖아.”
“궁금하니까 그렇지. 아! 맞다. 형이 댓글도 전부 세력 다툼이라고 했었지······.”
“전부는 아냐. 일부가 그렇다는 거지.”
“그럼 여기 달린 악플도 녀석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이러다가 형 안티들이 늘어나면 어쩌지?”
“상관없어. 지금은.”
“상관이 없다고?”
유성이 어리둥절해하자 유진이 설명을 덧붙인다.
“어느 정도의 악플은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돼. 홍보 쪽에서 알아서 잘 컨트롤 할 거야. 그리고 지나친 경우에는 고소를 진행하고, 그것도 또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다 계획이 있는 거구나.”
“물론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
“생각처럼 안 되면?”
“계획한 대로 일이 돌아가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지. 그것도 아주 큰돈이 있다면 말이야.”
유성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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