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4화 (14/363)

#13.

#13. 블랙록

다음 날 아침, 호화스러운 침대에서 눈을 뜬 형제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여기서 찍어. 여기 간판이랑 잘 나오게.”

호텔에서 한 블록 정도를 걸어가 한 오피스 빌딩 앞에 선 유진이 동생에게 주문했다.

“어. 알았어.”

이젠 익숙해졌는지, 유성은 묵묵히 사진부터 찍었다.

“블랙록? 여긴 뭐 하는 데야?”

“블랙록 자산운용.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굴리는 곳이지.”

폼을 잔뜩 잡고 사진을 찍고 난 유진이 대답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굴리길래?”

“보자······ 지금 기준으로는 대략 5조 달러가 조금 안 될 거야.”

“5조 달러? 대체 그게 얼마나 큰 돈이야? 우리나라 GDP가 얼마였더라?”

유성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1조 달러 정도. 그러니까 이 회사에서 굴리는 돈이 끔찍할 정도라는 거지.”

언젠가는 자신도 그 정도의 돈을 굴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유진은 당당하게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왜 온 거야?”

“당연히 우리 자산을 운용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지. 약속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 로비 한쪽의 리셉션에 다가가 소개하자, 곧 23층의 회의실로 올라가도록 안내해 준다.

“약속은 언제 잡은 거야? 같이 있으면서도 몰랐네.”

“LA에 있을 때. 영주권 신청하면서 변호사한테 여기 연결 좀 시켜달라고 했었지.”

“아. 그럼 당첨금을 여기 맡기는 거야?”

유성은 어쩐지 안심이 된 얼굴이다.

“어.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럴 예정이야. 어차피 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니까.”

안내해 준 회의실에 도착하자, 이미 몇몇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윌리엄 윤입니다.”

세 명의 사내들 중 대표로 인사를 한 사람은 동양계로 보이는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유진입니다.”

“저를 지명하셨다고요. 감사합니다.”

윌리엄 윤이 웃으며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해 왔다.

“예. 블랙록에 한국 출신 매니저가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투자는 처음이라 아무래도 서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분과 일을 해 보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블랙록에 한국인이 꽤 있는데, 저를 선택해 주셔서요. 투자 자문이 필요하신 거죠?”

그것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진이 블랙록을 선택한 것은, 가장 큰 자산 운용사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윌리엄 윤이 이 시기에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삶에서 유진이 미국에서 인연을 맺어 온 사람들 중에 이쪽으로는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윌리엄과는 처음엔 공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서로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실 때문인지, 둘은 인간적으로 친밀해질 수 있었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인연을 맺어온 탓에, 유진은 그가 무척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네. 전화상으로도 말을 했지만, 메가밀리언에 당첨되어서요.”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냈던 사람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은 꽤 어색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뭇 재미있기도 하다.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느낌도 든다.

“알고 있습니다. 4억 3천만 달러의 당첨금을 받으셨다고요. 잘 오셨습니다. 그런 거액은 잘 운용하셔야지, 잘못 쓰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로또에 당첨되고 몇 년 만에 파산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들어봐서요. 일반적인 투자 은행에 맡기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기왕이면 세계 제일의 자산운용사에 문의하는 것이 낫겠더군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저희 블랙록은 수많은 고액 자산가는 물론이고, 각국의 투자 기관까지 고객으로 유치해서 안정적인, 그리고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윌리엄은 블랙록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길을 찾아 독립할 것이다.

“방문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적절한 투자 방안을 몇 가지 마련해 보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다양한 브로셔가 가득했다.

“우선 2억 달러를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안전 자산에, 그리고 절반 정도는 약간의 모험을 감수하더라도 고수익이 가능한 투자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안전 자산에 대해 먼저 추천을 해 드리겠습니다.”

대개는 펀드 상품이었고, 윌리엄 윤은 각각의 상품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익 상품이라면 약간의 레버리지를 사용해 선물이나 파생 상품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펀드의 백화점이라 불리는 블랙록인 만큼, 파생 상품에 연관된 펀드도 적지 않았다.

“개별 선물 투자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오일 선물은 계약당 1,000배럴입니다. 현재 가격으로 하면 계약당 10만 2000달러 수준이군요.”

그렇게 상품의 설명을 듣고, 필요한 질문을 하고 이야기가 오가는 데에만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참!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블랙록에서 거래하게 된 기념으로 SNS에 올리려고 하는데요.”

유진이 윌리엄 윤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윌리엄 윤은 기분 좋게 유진의 옆에서 미소지으며 촬영에 응해 주었다.

유성이 지체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시죠. 내일은 좀 더 유익하신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윌리엄 윤은 훌륭한 세일즈 매니저였다. 오랜 시간의 설명에도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고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와. 금융 상품이 정말 끝도 없이 많구나.”

그날 오후 블랙록을 나오면서 유성은 혀를 내둘렀다.

“어때? 재미있었니?”

굳이 그런 설명을 전부 듣고 있던 것은 사실 동생을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유성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다양한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재미는 모르겠고, 굉장히 복잡하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

한국에서도 주식 투자 한 번 해 보지 않은 유성이라, 아직은 어리바리한 모양이다.

“그렇지? 차근차근 배워. 너한테도 뼈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

꼭 유성이 투자하는 방법을 배우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큰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정도면 된다.

앞으로는 녀석도 무지막지한 양의 자금을 휘두르게 될 텐데, 금융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런데 레버리지라는 게 제일 어려워.”

윌리엄 윤과 형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전부 이해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레버리지는 차입해서 투자하는 것을 말해. 뭐, 쉽게 말하자면 내가 가진 돈의 몇 배의 주식이나 다른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말해.”

“그러니까 빚을 내서 주식을 산단 말이지?”

주식 투자 경험은 없지만, 그 정도는 들어 본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내가 사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일정한 증거금을 내면 약정된 레버리지 비율의 해당 투자 상품을 브로커가 구매하는 거지. 이때의 레버리지는 작게는 두 배 정도에서 많으면 열 배나 스무 배, 심한 경우에는 백 배를 넘는 경우도 있어. 백만 원으로 일억 원어치 투자를 하는 거지.”

“그렇게까지 빚을 내서 주식을 산다고? 그거 불법 아니야?”

유성이 당황해서 물었다.

“당연히 합법적인 투자지. 한국에서는 차액결제거래(CFD)라고, 10배까지 레버리지를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을 판매 중이야. 1억 원으로 10억 원어치 주식을 살 수 있어. 한국처럼 규제가 많지 않은 월가에서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야.”

“와······.”

“차액결제거래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양한 고 레버리지 상품이 있어. 투자 은행이나 헤지 펀드에서는 평균 30배에서 40배 정도의 레버리지를 사용한다고 하더라.”

“평균 30배라니······ 어질어질하네······.”

“1억 원으로 주식을 사서 1%가 오르면 100만 원을 버는 거지만, 같은 1억 원이 있을 때 40배의 레버리지로 40억 원어치의 주식을 사면 수익이 4,000만 원이 되는 거지.”

“그럼 손해도 그렇게 크다는 말이잖아!”

유성은 핵심을 바로 이해했다.

“물론이지. 그러니까 투기 자본이라고 하는 거야. 여기 월 스트리트의 투자 전문가들은 사실상 도박꾼들이라고 보면 된다고. 펀드 매니저들이 일과가 끝나면 술과 유흥, 마약에 빠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야. 그렇게 칼끝을 걷는 위험한 도박을 매일 같이 이어 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형도 그렇게 위험한 길을 가는 거야?”

유성은 형이 블랙록 매니저와 대화를 하면서 어느 정도까지의 레버리지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묻던 모습을 기억했다.

“괜찮아. 공짜로 생긴 돈인데 한 방을 노려 봐야지.”

“어······.”

유성은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형 돈을 형이 쓰겠다는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한국에서도 그렇게 10배씩 한다고?”

그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주식에 관심이 없지만, 10배는 아닐 텐데······.

“아무나 할 수는 없어. 전문투자자로 등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결국 투자 자금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지. 한마디로 돈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야.”

“여하튼 한국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그나마 한국은 양반이야. 일반인들이 너무 위험한 투자를 할 수 없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주가를 부양해야 하는 나라들 같은 경우는 오히려 그런 것을 조장하기도 해.”

“나라에서?”

“중국 같은 경우 정권의 성과를 보여 주려고 증시를 띄우기 위해 그런 식의 차입 거래를 권장하는 면도 있다더라. 그렇게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면 주가에 꽤 영향을 미치거든. 수많은 개인들이 1억 원으로 10억 원어치 주식을 사고팔면 유동량이 늘어나잖아.”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중국 사람들은 도박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정부에서 판까지 깔아 주었으니, 지금 너도 나도 투자하느라 난리가 난 모양이야. 그 결과로 중국 증시에 꽤나 버블이 낀 모양이더라.”

“아아, 그렇구나. 어렵네······ 여하튼 세상에는 배울 게 많다. 유체역학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그날 저녁, 블랙록에서 찍은 사진 중 괜찮은 것 몇 개를 골라 SNS에 올렸다.

#블랙록자산운용 #5조달러

#한국계 #매니저 #윌리엄 윤

- 오빠 멋있어요!

- 5조 달러라니 꿈이 멋있다.

대체적으로 SNS에 올라오는 글들은 호의적이다.

하지만 해당 포스트를 퍼가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물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 5조 달러가 뭐임?

- 5억 달러를 잘못 쓴 거 아냐? 근데 이 형 재산 2억 달러 아님?

- 5조 원이겠지.

- 뭐든 좀 이상하다.

- 블랙록 자산 운용은 세계에서 제일 큰 자산 관리 회사임. 그 회사에서 운용하는 자금이 5조 달러라는 거야.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한다.

- 5조 달러가 말이 됨?

- 5조 원이겠지. ㅋㅋㅋ

- 진짜임. 블랙록은 전 세계 사모 펀드와 헤지 펀드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거대 회사임.

- 헉! 말도 안 돼!!

- 말 됨! 진짜임!

정보가 알려지자 역시 블랙록이라는 회사로 불타오른다.

- 그런데 저 회사는 왜 간 거야? 형.

- 당연히 돈을 맡길 생각인 거지. 와! 나 같아도 저런 데다 돈 맡기겠다. 저런 데라면 사기당할 일도 없을 거 아냐?

- 근데 저런 회사에도 한국계 매니저가 있구나.

- 당연하지. 요즘 월가에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 저 형이 더 멋있는 듯.

- 그니까. 이 형은 그냥 로또에 당첨된 거지만, 저 형은 자기 능력으로 저런 자리에 있는 거잖아.

- 오빠! 멋있어요! 연락처 좀!

“다들 바쁘네.”

오늘도 기어이 포스팅에 달린 댓글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게시글에 달린 댓글까지 찾아 읽은 유성이 말했다.

“어때? 댓글이 좀 달려?”

“어. 호텔 사진 올린 뒤부터 댓글이 아주 무시무시하게 달리고 있어.”

“그래? 돈 쓴 값어치가 있네.”

“아니······ 2억 원이나 쓸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댓글 반응이나 끌어내려고 한 건 아니지.”

SNS에 포스팅을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것은 그가 의도한 계획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아직 외출하지 않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뉴욕까지 따라와 준 아카데미의 두 보디가드가 재빠르게 현관으로 다가갔고, 존이 문을 여는 동안 로저는 조금 떨어져서 홀스터에 손을 얹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기 숙박하고 계신 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문을 열자 정장을 차려입은 동양인이 서 있다가, 조금 어색한 영어로 말한다.

“누구시죠?”

“제안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누어 봐도 괜찮을까요?”

“먼저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존이 딱딱하게 말했다.

“어, 음. 저는 한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건 당신의 신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 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신원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우선 제 제안을 들어보시면 그 뒤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보스?”

로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들여보내요.”

유진이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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