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5. 중난하이(中南海)
아직 다산자동차가 상하이 부부가오 자동차 회사와 협상 중이라는 사실은 대외비였다.
이번에 굳이 미국에서의 협상 자리를 만든 것도 협상 타결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려는 이유였고.
그러니 유진에게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의 말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음······ 꽤나 제대로 된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부사장이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여기저기 좋은 친구들이 있을 뿐입니다.”
유진이라고 자신의 의도가 통할 것이라 확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을 보니 대충 먹혀 가는 모양이었다.
“정말 좋은 친구분을 가지신 모양이군요. 내가 부러울 정도에요.”
부사장은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아니, 찾은 척 보이려 애썼다.
사실은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 했다.
그런데 심히 골치 아프다.
중국 정계의 심부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결정이 날 때까지는 철저하게 베일에 감춰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 국가도 아니고, 유일한 공산 강대국의 최고 권력층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걸 외부에서 알아내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유진 씨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란 말이겠지요. 대체 명성상사는 왜 유진 씨 같은 인재를 홀대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같은 분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송구스럽네요.”
“아니에요. 훌륭해요. 정말로······. 그런데 아무래도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유진 씨와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마음이 급하네. 흐.”
솔직 담백한 남자였다.
유진도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금세 알아차렸다.
당장 다산이 중국에 가지고 있는 정보망을 돌려 사실 파악에 나서야 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마디가 무슨 신뢰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정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부친인 다산자동차 회장이 이 장소에 나타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다산자동차와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의 협상 행방은 차치하고라도, 중국 국가 주석의 눈 밖에 난 사람의 측근과 다산자동차 회장이 빅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무척 곤란한 일이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유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니······ 어, 어어······.”
장 부장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장 부장은 유진 씨 도와서 필요하신 게 있다면 들어드려요. 난 지금 급히 가 봐야겠으니.”
부사장은 빠르게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바쁘신듯하니 배웅은 안 나가겠습니다.”
유진이 뒤에서 인사를 하니,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하고 빠르게 나가 버렸다.
“아, 그럼······ 우선 양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호텔은······.”
한동안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서 있던 장 부장은 유진에게 자신들이 바로 호텔을 준비하겠다고 말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뒤, 형제는 짐을 챙겨 놓고 장 부장을 따라 방을 나섰다.
어차피 양보해 주기로 한 것을 굳이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오셨습니까?”
현관을 나서자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이 다가와 장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몇 개나 준비됐나?”
장 부장이 물었다.
“이 층에 두 개 구했습니다. 다른 층에 다섯 개 구했구요. 스위트룸 중에 남은 것은 그게 다입니다.”
사내가 복도 저쪽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로 모자란데······ 하긴 회장님이 오실지 안 오실지 모르지만······. 여하튼 더 구할 수 있는지 알아 봐.”
장 부장도 이제는 회담의 열릴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네.”
“그리고 자네는 이분들 모셔 드리게. 전 여기서 일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일은 감사드립니다.”
장 부장이 다시 의연하게 인사를 했다.
“네. 바쁘신 듯하니 빨리 가 보세요.”
유진이 인사를 하자, 장 부장이 빠른 걸음으로 같은 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저쪽 방도 다산자동차가 쓰는 모양이네요?”
유성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저희가 이 층에 구해 놓은 스위트입니다.”
얼떨결에 유성 형제를 맡게 된 새로운 사내가 대답했다.
“이 호텔에 스위트룸이 많은 모양이네요?”
유성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프레지던트 급 스위트룸이 예닐곱 개, 그리고 일반 스위트룸이 100개가 조금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 우리가 머물던 방과 비슷한 크기만 그렇게 많다는 말이야?”
유성이 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샴페인 스위트, 임페리얼 스위트, 펜트하우스 스위트, 쥬얼 스위트, 스카이뷰 스위트, 얼티밋 스위트······ 여섯 개로군요.”
사내가 손으로 꼽아보며 하나하나 알려 준다.
“그걸 다 외우셨어요? 엘리트는 다르구나.”
유성이 감탄하며 말했다.
“맨해튼에서도 최고급 스위트의 수요가 높은 호텔이라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회장님께서 방문하시면 프레지던트 스위트가 있는 층을 통째로 전세 내서 쓰고는 합니다. 이 층의 경우도 전부 스위트룸이죠.”
엘리트라는 말 하나에 사내가 씩 웃으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말이 많았군.’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언젠가 유진에게 이 날의 일을 신이 나서 말해 주던 그 친구였다.
“보통 사흘 전부터 통째로 전세를 냅니다. 회장님을 수행하는 인원이 적지 않아 한 층으로 모자랄 때도 있고요.”
형제를 데리고 호텔을 나와 다른 호텔까지 가는 동안 사내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여기가 지금 저희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호텔입니다. 그리고 팰리스 호텔에 결제하신 비용은 취소처리 될 겁니다.”
전날 머물던 팰리스 호텔과 동급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로얄 스위트룸이다. 팰리스 호텔의 샴페인 스위트보다는 작았지만, 이름만큼 화려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제가 어지간한 일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참! 뉴욕에 계신 지 오래되셨나 보던데요?”
사내의 명함을 받고 유진이 물었다.
“올해로 3년 차입니다.”
“그래요? 난 완전히 뉴요커인 줄 알았는데.”
“하하! 뭐. 제가 좀 적응을 잘하는 편이라서요.”
뉴요커라는 말에 씩 웃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럼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뉴욕 얘기 좀 해 줘요.”
“아! 그럴까요? 언제든지 불러 주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유진은 옛 친구를 만난 것이 다산자동차와의 일이 잘 풀린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혹시 이번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 거기 숙박비도 돌려받고, 여기도 공짜로 사용하는 거면 엄청 이득이네.”
유성은 그것만으로 희희낙락이다.
“그래. 얼마나 이득일지는 한 번 두고 보자.”
“그런데 여기도 굉장히 화려하네. 크기는 조금 작지만.”
“이 호텔이 뉴욕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처럼 쓰는 곳이야. 그만큼 품격있다는 의미이지. 화려한 걸 좋아하는 중국 지도부도 뉴욕에 오면 꼭 이곳에 묵고는 하고.”
그 때문인지 몇 달 뒤면 중국 보험사가 여길 인수하게 되고, 백악관은 도청 등을 걱정해 여기 대신 팰리스 호텔을 주로 사용하게 된다.
그 팰리스 호텔도 한국 기업이 인수한 뒤였지만, 우방국 소유의 호텔은 믿을 만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감히 엉뚱한 짓을 꿈도 못 꾸리라 생각한 것이든지.
“그런데 아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대충 이해하기로는 다산자동차가 상하이 서기장이랑 뭘 협상하고 있다는 이야기 같던데? 상하이 서기장이면 시장인가?”
“시장은 따로 있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기가 시장의 상관이나 다름없지. 시장은 행정의 책임자고, 서기는 공산당의 지도자니까.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잖아. 모든 제도에 있어 행정 관료가 있고, 그 위에 공산당 관료가 따로 있지.”
유진이 러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국가안전부는 중국의 행정부인 국무원 산하의 기관이야. 한국의 예전 안기부와 비슷한 역할이지. 그러니까 해외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국내 정적들의 비리를 모아 놓았다가 숙청할 때 빌미로 삼는 거 말이야. 예전 안기부처럼 정권에 밉보인 인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 어디엔가 가두어 놓고 몇 년 동안 내보내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아예 종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다거나 말이야.”
“꽤 으스스한 소리네······ 상하이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안기부에 끌려갔다는 거잖아?”
“어. 그런데 상하이 서기라는 자리는 그저 평범하게 한 지역을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야. 중국공산당 3대 파벌 중 하나인 상하이방의 유력 차기 주자가 앉는 자리지. 딱히 비유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으로치면 야당 대표? 아니면 유력 대선 후보인 서울 시장 정도? 대충 그런 느낌이지.”
“그러면 상당한 고위인사네.”
“그게 문제야.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지금 중국 주석이 꽤 야망 있는 사람이라, 언제고 자기 정적이 될 사람을 그냥 둘 수 없는 모양이더라.”
지금의 주석은 처음 중국의 주석 자리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온화하고 조용하기만 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한 번 자리에 앉고 나서는 무섭게 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권한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아직 그 누구도 그 온화하던 주석이 몇 년 뒤에는 심지어 헌법에서 주석직을 두 번 할 수 없다는 조항까지 삭제하며 종신 집권으로의 걸음을 내디딜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그 시발점이다.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적, 혹은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숙청해야 한다.
당분간 무수히 많은 거물들이 쓰러질 것이다.
물론 유진은 이것도 그냥 신문을 보고 알게 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미래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굉장한 자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필 다산자동차가 그 사람이랑 뭘 하고 있다고? 음······ 서울 시장이랑 포드자동차랑 뭘 한다면······ 새 공장을 짓는 일인가?”
“단순히 공장 짓는 정도의 일이 아니야.”
“그럼?”
“다산자동차가 중국에 진출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어. 그리고 올해 진출한 이후로 가장 많은 차를 팔았지. 그래서 자동차 회사를 하나 더 만들 생각인 모양이야. 이번에는 상업의 중심지인 상해시에다가. 승용차가 아닌 상용차, 그러니까 버스나 트럭 같은 차를 생산하는 회사로.”
“아······.”
유성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의 이야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아까 대충 눈치를 보니 다산자동차가 상하이에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한 상대가 그 류샤오쥔의 측근인 모양이야. 사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정말로 류샤오쥔이 지금 주석의 후계자라면 20년을 바라본 아주 훌륭한 선택이야. 류샤오쥔이 다음 주석에 오르고 내려갈 때까지 아주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테니까. 아마 오늘의 협상이란 것이 단순히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만은 아니었을 거야. 우리가 생각하기 힘든 돈이 오가는 자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까 그 부사장의 반응을 보면 말이야.”
그건 유진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사업이라는 것이 고위정치인의 후원 없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어? 그럼 류샤오쥔이 숙청되면 합작법인은 어떻게 되는 거야?”
“완전히 물 건너간 거지.”
“그런데 류샤오쥔이 잡혀갔는데 무슨 협상이래?”
“그건 그쪽 일이고.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오늘 정확히 누구를 만나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숨기고 빨리 협상을 끝내고 한 몫 챙기려 할 거야.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든, 다산자동차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걸 받아 챙기고 잠적을 한다든지.”
“아! 그럼······ 그거 꽤 문제가 되지 않아?”
“정말이라면 문제가 되는 거지.”
“와! 그렇게 대단한 정보라면 다산 쪽에서 고마워할 만하겠다.”
“나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니까. 뭐, 진짜라면. 그리고 내가 한 정보로 뭔가 조치를 취해 손해를 줄일 수 있다면 그러겠지.”
“그런데 그런 대단한 정보를 너무 쉽게 넘겨준 거 아니야?”
유성이라고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아깝게 느껴졌다.
“쉽게라······ 그러려나?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무얼 대가로 요구하고 들려 줄 수 있겠어?”
“하기는 그렇다. 너무 뜬금없으려나? 뭐, 들어주지도 않았겠다.”
“그리고 다산 그룹 회장이 꽤나 호탕한 사람이라 말이지.”
유진이 미래에 알게 될 친구는 자기가 모시던 회장을 무척 존경했었다.
* * *
“부친이신 선대 회장님을 쏙 닮아서 말이지. 호탕한 대장부야. 맺고 끊는 게 확실하고, 상벌이 명확하고, 받은 게 있다면 두 배를 주시는 분이셨지. 그래야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 자기한테든 회사를 위해서든 득이 되려 노력을 한다면서 말이야.”
친구는 술이 들어가면 가끔씩 실은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한 회장에 대해 존경의 말을 내뱉고는 했었다.
“뭔가 처음부터 대가를 바라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시정잡배라 생각하시는 거 같았어. 하지만 자발적으로 날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그만한 대접을 해 주겠다. 뭐 그런 분이셨지. 좀 올드하지만······ 멋진 남자였어.”
* * *
딱히 그 친구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다산 그룹 회장의 성격은 재계에서는 꽤 알려진 얘기였다.
현 다산 그룹 회장의 부친인 선대의 창업주는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남자라면 남자답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
미적거리는 것이라면 딱 질색이다.
그런 옛날 사나이의 표본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가장 성격이 비슷했던 차남에게 다산 그룹을 승계했다.
유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정보 중 아주 사소한 것을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었다.
그러니 무언가 피드백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며칠이 흘렀다. 딱히 다산으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유진은 동생과 함께 블랙록을 다니면서 투자할 곳을 고민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뵈었던 다산자동차 미주 사업본부 장현수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장 부장이 찾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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