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6. 사례(謝禮)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장 부장이 다시 사의(謝意)를 표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팰리스 호텔에 머물던 손님이 돌아갔으니, 다시 사용하셔도 됩니다. 계산은 저희 쪽에서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약이 있어서 다음 주 초까지만 된다는군요. 혹시 그 뒤로도 뉴욕에 계신다면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뭐. 그 정도로도 충분해요. 일주일이나 공짜로 그런 호텔을 쓰면 나야 고맙죠.”
“그리고 이번 일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부사장님께서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신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급한 일로 서울에 가셨으니 다시 나오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호텔 방을 양보해 달라고 할 때도 정중했는데, 오늘은 정도가 지나치다.
아무래도 부사장에게 뭔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감사는 되었고, 부사장님이 화통하신 분 같은데 저야 그런 분을 다시 뵈면 영광이지요.”
유진도 자신의 의도가 먹힌 것을 알았으니, 겸양을 잔뜩 떨며 상대를 높여 주었다.
“확실히 여기가 넓긴 넓다. 호화로운 것은 비슷한데, 여기 비하면 저번 스위트룸은 호텔 느낌이네. 아! 안 되겠다. 나 이러다가 이런 호사스러운 곳에 익숙해지는 거 아냐?”
다시 팰리스 호텔 샴페인 스위트로 돌아온 유성이 며칠간 떠나 있던 호화로운 응접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면 또 어떠니?”
“대충 보니까 형이 다산이 입을 피해를 줄여 준 거 같은데?”
갈수록 눈치가 늘어나는 유성이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보답이 이건가?”
유성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식견이 많지 않은 그가 보기에도 충분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한 번 두고 보자. 어떻게 나오나.”
유진이 기대감 섞인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유진은 과연 다산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 * *
북악산 기슭의 한 고즈넉한 저택에서 노년의 남자와 그 아들 넷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대 다산 그룹 회장의 자택이었던 이곳은 그 뒤로 다산 그룹 총수 일가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장소였다.
“이번엔 네가 수고가 많았다.”
다산 그룹 회장이 셋째 아들에게 칭찬을 했다.
“그 정보가 아니었다면 아주 큰 일 날 뻔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다산자동차 미주 사업본부 부사장 김철호가 겸양을 떨었다.
“맞다. 운이지.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그냥 흘려넘기지 않은 것은 운이 아니야.”
옆에서 커다란 갈비를 뜯던 장남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운이 찾아오지만, 누구나 운을 잡는 것은 아니야.”
김 회장이 흡족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도 고생 많았다.”
이번엔 넷째를 보고 칭찬을 했다.
“네. 고생 많았어요, 아버지. 저 말고 우리 다산 물산 베이징 사무소 직원들이 말이에요. 아주 여기저기 연줄을 대느라 정신이 없던 모양이에요. 발에 땀이 아니라 피가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네요.”
“너도 일 처리를 잘했다.”
이번엔 장남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도 윤 의원이 국정원에 연줄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장남은 연신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다음 선거 때 넉넉히 챙겨 줘야 할 겁니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장남을 바라보는 회장의 눈에는 확고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류샤오쥔은 가능성이 없는 거고?”
“이미 확정된 모양입니다. 공산당 당적을 박탈하고 구속처리 한답니다. 내일쯤 기사가 나올 겁니다. 벌써 정가에 얘기가 다 퍼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얼마의 손해를 볼 뻔했다고?”
“당장 그 류샤오쥔한테 주기로 했던 자금만 1,000만 달러입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자동차의 실무를 맡은 첫째가 대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상하이 부부가오 자동차랑 계약이라도 했다면 솔직히 손실 규모가 얼마나 되었을지 모릅니다. 뒤에 벌어질 사건에 대한 시나리오가 너무 많아 계산이 어렵지만, 최악의 경우 베이징 다산자동차가 흔들릴 뻔했습니다.”
“다행이로구나.”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친구 어떻더냐?”
그가 다시 셋째 김철호에게 묻는다.
“꽤 영리한 친구 같습니다. 나이에 비하면 밀고 당기는 거에 익숙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거야 그렇다 쳐도, 운이 따르는 친구인 듯합니다.”
“맞아. 그 큰 복권에 당첨되고, 이번엔 우리한테도 귀한 정보를 주었으니 말이야.”
첫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산자동차의 차기 주인으로 정해진 당사자인 만큼 이번 일로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은 바로 그였다.
“운이 따른다······.”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들어가면 다시 한번 만나볼 생각입니다. 고맙다는 말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신기하거든요.”
“그렇게 하거라. 세상에 운이 따르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으니까. 너희 조부께서도 전쟁 때 몇 번이나 운이 좋아 큰일을 모면하셨었지. 그리고 사업을 하시면서도 도박 같이 저지른 일이 운으로 맞아떨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셨고.”
“아버님 말씀이 맞아. 운이 좋은 친구라면 알아 둬서 나쁠 거야 없지.”
장남이 거들었다.
“그리고 중국 쪽 정보가 꽤 정통한 모양인데, 잘 다독여 봐. 또 무슨 도움이 될지 알아?”
넷째도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사례라도 하면서 만날 생각이다. 뭐가 좋으려나?”
“마땅히 생각나는 거 없으면 내가 좀 도와줄까?”
조용히 경청하며 연신 고기를 뜯던 둘째가 입을 열었다.
“뭐 좋은 생각 있어요?”
“있지. 아주 좋은 게.”
곰처럼 생긴 사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 * *
“네, 그렇다는 말이지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언제 방문하시겠습니까? 오늘 당장이요? 음, 그렇게 하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거실에 나온 유성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형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가 온다고?”
형이 전화 끊는 것을 확인한 유성이 물었다.
“재민일보 기자.”
“기자가 형을 취재한다고?”
“어. 얼마 전 호텔 사진 올린 포스팅이 화제가 되는 것을 봤다네. 그래서 괜찮으면 여기 사진도 찍고, 함께 올리고 싶대.”
“그래? 잘됐네.”
“그럼. 잘됐지. 나만 취재하는 게 아니라, 너랑도 인터뷰를 조금 할 거야.”
“응? 나는 왜?”
“성진정밀과 대양중공업 간의 소송에 대해서도 취재를 하고 싶다네.”
“진짜?”
유성의 얼굴이 확 피어났다.
“그런데 그런 기사 올리기는 하는 거야? 괜찮은 건가? 대기업에 대한 비판 기사를 올려도?”
“어, 괜찮아. 재민일보니까.”
“재민일보가 왜?”
“거기 다산이랑 밀접한 신문사거든.”
“아! 그럼 설마?”
“다산이 은혜를 갚을 생각인가 봐. 우리 쪽에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낸 모양이야.”
“우리 편을 들어줄 언론! 이 정도면 진짜 보답을 받은 셈이네!”
“그렇지 않아도 다산하고 대양이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 두 그룹이 꽤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으니까. 특히 자동차와 중공업에서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이참에 우리 편도 들어 주고, 그쪽 욕도 실컷 하자는 거지.”
“그쪽의 이해타산과 맞아 들어갔단 말이지?”
들뜬 듯한 유성의 목소리를 보니 조금은 흥분한 모양이다.
“어. 그러니까 아마 한 번 기사를 올리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나 인터뷰할 때 말할 거 준비 좀 할게.”
유성이 신이 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였다.
굳이 그 자신이 부탁하지 않아도, 이렇게 가려운 곳을 긁어 주니 일이 편해졌다.
물론 유진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일은 사전 포석 정도라 생각하고 있다. 우선은 다산 그룹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정도면 된다.
‘계산이 끝난 모양이지?’
대기업에 다녀 본 경험이 있기에, 지금쯤 다산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얼마나 득을 보았는지, 손해를 보았는지 계산에 정신없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처리가 되었을려나?’
유진이 알고 있던 미래에서 다산자동차는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와 계약을 마치고, 합작법인을 세운다.
류샤오쥔 서기의 구속이 알려지는 것은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다산은 그때 가서야 일이 꼬여 버린 것을 알아차리지만, 계약서에 사인한 뒤였다.
하나 그럼에도 앞으로 1년 뒤 합작 회사는 상하이에 새로운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아마도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에 대한 부담과 설마 상하이 당서기의 몰락을 외국계 기업에 연관시키랴 하는 안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합작 회사는 아주 멋지게 침몰하고 만다.
공장 신축에 필요한 인허가는 한없이 지연되었고, 건설 노무자들과의 트러블도 끊이지 않았으며, 툭하면 나와서 일정을 지연시키는 각종 공무원들까지.
다산자동차가 주석의 라이벌 격으로 떠오르던 사람의 측근과 사업을 하려던 행위가 눈 밖에 났던 모양이다.
다산자동차의 상하이 공장 신축에 관련된 일련의 사태는 기사로도 몇 번이나 실렸고, 업계에서는 중국 진출의 위험 사례로 몇 번이고 회자될 정도였다.
이는 전부 아직 사람들이 현 주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일련의 사태는 상하이방의 유력 주자인 류샤오쥔을 낙마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고 자신의 대항마가 될 만한 인사들 대부분을 처분하고야 비로소 끝이 난다.
그러니까 이번 사태로 입게 될 다산의 피해는 일종의 보여주기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합작법인은 다산자동차에게 꽤나 아픈 상처가 되고 만다.
어찌어찌 공장을 건설하고 상용차 생산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냉기류가 생성되며 생산은 물론이고 판매에도 큰 차질을 빚는다.
그리고 결국엔 경영진이 주석의 사람들로 전부 바뀌어 버린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에 지분을 헐값에 넘기고 사태가 마무리 된다.
여기까지의 미래를 알고 있는 유진은 자신이 흘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을지 궁금했다.
정말 합작 회사를 포기한 걸까?
그리고 류샤오쥔과의 관계는 어찌 되었을까?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사실 파악을 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 판단이 된다면 협상을 지연시키거나, 무효화했을 테고.
물론 유진은 자신의 충고로 다산자동차의 중국 시장에서의 위치까지 지켜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다산자동차의 판매량 감소는 이번 사태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상하이에서의 신사업을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 오후, 재민일보 뉴욕 특파원이 방문했다.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고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이미 널리 알려진 유진의 메가밀리언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고, 성진정밀과 대양중공업 사이의 분쟁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이 많았다.
아무래도 목적이 뚜렷한 모양이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 가시는 길에 이거라도 기념으로 가져가세요.”
기자를 배웅하며 유진은 샴페인 두 병이 들어 있는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 이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고가의 샴페인이다.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기자가 멋쩍게 웃었다.
“여기 묵으니까 선물로 주더군요. 호텔 기념품 정도니 부담 없이 받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오늘은 그럼 기분 좋게 한잔하겠습니다.”
기자는 약간 사양하는 척하더니, 샴페인 상자를 받았다.
“와······ 오늘 인터뷰한 거 전부 올리는 거겠지?”
기자가 떠나고 나서 유성이 물었다.
“그거야 모르지. 편집부에서 적당히 수위 조절을 하겠지.”
“그래도 기대되는데?”
“어. 그래.”
유진의 기대와 유성의 기대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
유성은 자신들의 편을 들어 공정하게 쓰일 기사에 대한 기대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에 비해 유진은 다산 그룹이 내민 손길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산은 명백하게 성진정밀과 대양중공업의 분쟁에 한 발을 걸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어쩌면 다산 그룹과 대양 그룹 사이의 충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대양과 다산 사이의 분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꽤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걸로 고민거리가 해결된 기분이다.
다산이 먼저 선공을 하고 나오면, 대양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정도의 위상을 가졌으면,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기 마련이니까.
유진이 그리고 있는 대양과의 싸움에서 다산 그룹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으로 몇 년 뒤 대양 그룹의 총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 3남인 대양중공업 사장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놀랍게도 다산의 조력이 있다.
어쩐 일인지 다산은 은밀하게 대양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을 적지 않게 보유하고 있었다.
형제들끼리 대권을 노리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점에서 다산의 지분은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사태가 끝나고 다산은 대양으로부터 적지 않은 대가를 챙겼으니, 다산으로서도 흡족한 거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협력 관계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유진은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한 번 사이가 벌어져 버린 다산과 대양 사이에서 다시 그런 협력 관계가 구축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산이 수십 년 동안 은밀하게 모아오고 있을 대양 인터내셔널의 지분.
상장회사이기는 하지만 시중에 유통되는 물량이 극히 적은 주식이다.
유진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대양그룹을 공략하는 데에 키가 될 무기를 다산은 이미 손에 쥐고 있다.
마치 마왕의 목에 쑤셔 넣을 성검과도 같은 궁극의 무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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