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7. 블루 레어
“여기 고기 괜찮네.”
대양솔루션 사업본부장 류성규가 테이블 위에 놓인 1/3쯤 먹고도 아직 두셋은 배불리 먹을 만큼 큼직한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를 내려보며 말했다.
“그러네. 여기 사장이 르 파베르에서 수셰프로 있다 왔다더니, 고기 구울 줄 아네. 참! 너 르 파베르에 가봤어?”
성규의 형인 대양중공업 이사 류준규가 물었다.
“아니. 내가 있던 보스턴이나 뉴욕에는 없더라고.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거 먹으러 캘리포니아까지 가기도 귀찮고.”
“난 출장 갔다 몇 번 들러봤는데 썩 괜찮더라고. 근데 여기도 나쁘지 않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형제는 의좋은 형제의 표본처럼 도란도란 대화를 즐기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 녀석 기사가 또 올라왔더라.”
일과는 상관없는 잡담을 나누던 도중, 준규가 흘러가듯 한마디 던졌다.
“그 녀석? 아! 그 성진정밀······ 로또? 그랬어?”
성규는 피가 뚝뚝 흐를 정도로 살짝 익힌 스테이크를 썰며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 못 봤니? 기사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서 모를 거 같긴 하더라. 그럼 내가 한 번 읽어 줄까?”
채 절반도 먹지 않고 스테이크를 남긴 준규는 스마트폰을 들고 화면을 켜서는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찾아보지도 않고 바로 읽는 것을 보면 이미 준비해 놓았던 모양이다.
“세계 경제의 수도인 뉴욕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은 어디일까?”
성규는 묵묵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며 형이 읽어 주는 기사를 들었다.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겠지만, 대체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뉴욕 프라자 호텔, 그리고 뉴욕 팰리스 호텔 중 하나를 꼽을 것이다. 이런 대단한 호텔에는 일반적인 객실도 평범한 호텔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비싼 요금이 붙어 있지만, 특히 각 호텔이 자랑하는 특별한 스위트룸은 상상 이상의 요금이 매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하룻밤 묵는 비용이 한국 돈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을 호가한다.”
“······.”
“서민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은 대개 한 국가의 원수, 또는 글로벌 대기업의 총수들이다. 이런 비싼 스위트룸에 평범한 한 한국인이 숙박하며 올린 글이 SNS와 커뮤니티에서 이목을 모으고 있다.”
준규는 조곤조곤 신문 기사를 전부 읽었고, 성규는 무심함을 가장하고 스테이크를 질근질근 씹었다.
“대단하네. 우리가 이런 비싼 방에 들어가서 사진 하나라도 올렸으면 죽일 놈이 됐을 텐데 말이지.”
형이 읽어 준 기사를 다 듣고 나서 성규는 그다지 감흥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참 골 때리는 나라라니까. 돈 있는 사람이 돈을 쓰는 꼴을 못 본다고.”
“어쩔 수 없지. 이 나라에서 재벌은 서민들 눈치를 봐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이 기사?”
준규는 이제 본론에 들어갈 생각인 모양이다.
“분에 넘치는 돈이 손에 들어오니까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기사 후반부는 대양중공업과 성진정공의 소송 내용이 실려 있잖아?”
“뭐. 기삿거리를 찾다 보니 거기까지 알아낸 모양이지.”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니까. 이 녀석 제법 머리를 쓰는데 말이야.”
“흐음······ 하기는 뭔가 수를 내기는 해야 할 것 같네. 그런데 어쩌지? 아버지가 성진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부터는 형이 맡기로 했잖아.”
“듣고 보니 내가 미안하네. 동생 일을 빼앗아 온 셈이 됐잖아?”
“내 실수인 걸 뭐.”
“그 녀석이 로또에 당첨된 게 왜 네 실수겠냐. 그냥 운이 없던 거지.”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
성규는 마침내 1kg짜리 스테이크를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래도 성진정공 작업을 너무 빨리 들어간 건 조금 실수였어.”
“맞아. 내가 너무 조급했었어. 당분간은 자숙하고 있으려고.”
“그래. 아버지도 널 완전히 업무에서 제외하시려는 것은 아닐 거야.”
형은 동생을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근데 이 기사 어디 올라갔는지 알아?”
다시 준규가 물었다.
“어디야?”
“재민일보.”
그가 이번엔 조금 목소리를 굳히며 말했다.
“거기······ 다산 계열이었지?”
성규의 얼굴도 살짝 딱딱해졌다.
“다시 한번 싸워 보자는 걸까?”
“글쎄? 후속 기사가 더 나온다면 그렇다고 봐야겠지?”
준규의 목소리는 마치 종이를 긁는 것 같았다.
“참! 그 녀석에 대한 자료 필요하지? 보내 줄까?”
성규가 목소리 톤을 다시 올리며 가볍게 물었다.
“아니, 됐어. 내 쪽 라인으로 수집하는 거면 충분해.”
준규의 목소리도 금세 평범을 가장한다.
“그래?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네.”
“그보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숨겨 뒀니?”
준규는 질문을 던지며 그날 처음으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전한 곳에.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래서 외부의 쓸데없는 소리 들리지 않을 곳에서 요양하고 있어.”
“그래. 그러면 됐다. 아무래도 네······ 여하튼 조금 신경이 쓰이더구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형.”
식사 자리는 마지막까지 화기애애했다.
“오늘은 내가 살게. 그럼 먼저 나가 본다.”
새로 주문한 디저트를 음미하고 있는 동생을 두고 형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어. 잘 먹었어. 좋은 식당 소개시켜 줘서 고마워.”
“고맙기는. 그럼 또 보자.”
“집에 들어가면 보는데 뭐. 그럼 먼저 들어가.”
성큼성큼 활달한 걸음으로 별실을 벗어난 준규는 몇 발자국 가다 서서 몸을 돌려 별실을 바라보았다.
“천박한 새끼. 피는 못 속인다더니. 맨날 저질스러운 짓거리나 하고. 퉤!”
지금까지의 다정스러운 태도와 달리 준규는 경멸의 표정을 얼굴 가득 담은 채, 동생이 있을 별실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번엔 지가 판 구덩이에 지가 빠져서 다행이네. 달았어?”
준규가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측근에게 툭 말했다.
“네. 안 보이게 잘 달아 놨습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 가자. 퉷!”
준규는 다시 한번 동생이 있는 방을 향해 침을 뱉고 몸을 돌렸다.
같은 시간, 아직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성규는 들고 있던 포크로 디저트 케이크를 누르고 있었다.
케이크를 먹을 생각은 없던 것인지, 성규의 손은 힘을 잔뜩 주고 부들부들 떨며 포크로 바닥을 누른다.
챙!
포크의 힘에 못 이겨 케이크를 담은 접시가 깨져 나갔다.
그러고도 성규의 손은 여전히 힘을 풀지 않았고, 포크의 끝은 나무 테이블 표면을 파고들었다.
“푸훕! 야비한 새끼.”
그가 눈은 번뜩이면서도 입꼬리를 양쪽으로 찢어 올리고 웃는다.
“얼마 안 남았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다들.”
성규의 눈은 주변의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증오와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안전 자산은 인덱스 펀드와 혼합형 펀드에 각각 2,000만 달러씩. 그리고 추천해 주신 종목 중에 애플, EA, 엘러간, 사우스 웨스트 에어라인, 젯블루 에어웨이, 아바고 테크놀로지. 이렇게 여섯 종목에 각각 천만 달러씩 넣기로 할게요.”
며칠 동안 블랙록에서 시간을 보내며 투자할 종목을 고르던 유진이 마침내 투자할 종목을 선택했다.
“파생 중에서는······ 오일 선물과 옵션이 좋겠군요.”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 선물에 넣기로 한다.
사실 이렇게 절반씩 나누었어도, 안전 자산에 넣어 둔 나머지 절반이 만일의 경우 다소 위험한 투자의 레버리지를 지탱해 줄 보증이 될 것이니, 실제로는 구분이 없다고 봐야 했다.
“1억 달러 전부를 말이지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우선은 100계약으로 시작하고 나머지는 증거금으로 유치해 두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요청하신 상품들에 대한 투자에 들어가겠습니다.”
투자 방향이 정해지자, 윌리엄 윤은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기본 매니지먼트 수수료는 투자금의 2%, 그리고 유진의 허락하에 전권을 받아 투자에 나서서 수익을 얻으면 다시 일정한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계약이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매년 수백만 달러의 수익이 보장되는 건수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은 거기까지만 하고 블랙록을 나왔다.
판단은 내렸으니, 이제부터는 실무자의 몫이다.
“IS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중동에서 분탕질을 잔뜩 치느라고 기름값이 올라갈 거라고 하더라. 그것 때문에 오일 선물에 투자한다는 거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유성이 말했다.
“글쎄. 꼭 오른다는 보장은 없지.”
“왜? 석유 기업들이 이라크에서 철수한다는데. 그러면 석유 생산이 줄어들고, 석유 가격이 오르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요즘 국제 경기가 너무 좋지 않아서 수요가 줄었다고도 하거든.”
“그렇구나. 역시 예측이라는 게 쉽지는 않네. 그럼 하락에 투자하는 건가?”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우선은 그쪽에 전권을 주고 당분간 지켜보려고.”
유진은 오일 가격이 이해 여름 110달러 언저리에서부터 하락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이때 즈음이었다.
그러니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순간에 오더를 내릴 생각이다.
호텔로 돌아간 형제는 그날도 SNS에 포스팅을 했다.
#1억달러분산투자 #애플 #EA #엘러간 #사우스웨스트에어라인 #젯블루에어웨이 #아바고테크놀로지 #인덱스펀드 #혼합형펀드
유진의 글은 포스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각 커뮤니티로 퍼져 나갔고, 다양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저게 블랙록에서 추천한 주식이라는 거지?
- 나도 따라갈까?
- 관둬.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거 아님.
- 와! 1억 달러를 하루 만에 써 버리네. 부럽다.
- 주식이 오르면 쩔겠다.
- 떨어져도 쩔겠지.
- 그니까. 주식은 너무 위험하지 않음? 나 같으면 차라리 안전한 걸로 한다.
- 그래서 있잖아. 인덱스 펀드.
- 펀드는 다 위험. 역시 은행 예금이 젤 안전.
- 요즘 예금 이자가 얼마나 된다고. 1%도 안 될걸?
- 1%가 작음? 2천억에 1%면 1년에 20억임!!!
- 20억이면 그 형 호텔 두 달밖에 못 있음.
- 그 호텔이 너무 무리한 거지. 나 같으면 적당한 집 하나 렌트해서 있는다.
- 너랑 저 형이랑 같음?
- 하필 애플임?
- 애플이 어때서?
- 애플이 잘나가면 우리 나라는 손해 아님?
- 애플이 잘나가면 너한테 뭔 손해임?
- 애플이 잘 팔리면 명성하고 제일이 안 팔린다는 말이잖아.
굳이 누가 떡밥을 던지지 않아도, 커뮤니티에 모인 인간들은 늘 싸움에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누군가가 바보가 되고, 누군가는 만인의 욕설을 잔뜩 먹고 씩씩거리며 사라지고는 한다.
- 오빠 멋있어요.
- 올해 주식 전망 안 좋음. 망할 거 같음.
- 쓰레기임. 약혼녀 버리고 혼자 신났네.
물론 전혀 뜬금없는 리플이나, 맥락 없이 비난부터 저주를 퍼붓는 글까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형. 그런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에 어떤 게 우리 편이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게시판 상황을 보던 유성이 물었다.
“나도 몰라. 내가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여하튼 형 이야기 듣고 난 뒤부터는 게시물이나 SNS에 달리는 댓글들을 믿을 수 없게 됐어. 전부 작전 세력 같이 느껴져.”
“누가 세력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뭐.”
“그런데 얜 뭘 안다고 쓰레기래?”
약혼녀를 들먹이며 욕을 하는 리플을 본 유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거 혹시 대양 쪽에서 하는 거 아닐까?”
유성은 약혼자니, 파혼이니 하는 것들을 거론하는 리플들이 영 거슬렸다.
“전부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농후하지. 날 공격하려면 그것부터 걸고 넘어가는 쪽이 나을 테니까. 우선은 그걸로 나에 대한 평판을 최대한 떨어트리고, 다음엔 성진정공을 공격하는 거지. 당분간 저쪽은 나에 대한 비호감도를 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재민일보의 기사로 전쟁의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
“견딜 수 있겠어?”
“물론이지. 오히려 반가울 정도인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뒤, 유진은 서울에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수고 많다. 그런데 부탁 하나 하려고. 경호업체 하나만 수배해 봐. 대양이랑 상관없는 곳으로.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큰 곳으로. 어. 우리 부모님 말이야. 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조금만 신경 쓸걸’하고······. 그래. 최대한 빨리 부탁해.”
유진이 한 번 겪은 미래에서 부친이나 동생에게 어떤 물리적인 위협이 가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철우에게 말한 것처럼, 후회가 남지 않도록 모든 방비를 해야 했다.
다음날 오후 점심 시간, 유진은 유성을 데리고 몇 블록 떨어진 한 건물로 갔다.
“여기는 어디야?”
“트럼프 타워. 트럼프 가문 소유의 빌딩이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