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2. 블레이드 러너와 월스트리트의 늑대들
“블랙록 리포트를 보니까 이제 내릴 만큼 내려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며? 슬슬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성은 요사이 블랙록에서 보내 주는 리포트를 꼼꼼히 챙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풋옵션 가격이 내리고, 콜옵션 가격이 오름세야. 이거야말로 기회지.”
싼 가격에 풋옵션을 잔뜩 사 모을 기회 말이다.
“하아······.”
유성은 그런 형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대단하다. 형이 메가밀리언으로 받은 당첨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어. 겨우 두 달 사이에.”
이해는 하지 못해도, 형이 이뤄 놓은 결과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반대였다면 그만큼 손해 봤겠지?”
“그 말 들으니 섬찟하네. 와! 형이 번 만큼 누군가는 그만큼 잃었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선물은 명확하게 제로섬 게임이니까. 나보다 더 번 사람도 있을 거고, 어쩌면 하루 사이에 나보다 큰돈을 잃는 사람도 있겠지.”
“그렇게 큰돈을 잃으면 기분이 어떨까?”
“보통은 자기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좋지만은 않겠지. 맞다. 블랙록의 창업주인 래리 핑크도 뉴욕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 ‘퍼스트 보스턴(First Boston)’에서 일할 때 예측 실패로 1억 달러의 손실을 본 적이 있어.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지.”
“어? 진짜?”
그 엄청난 블랙록의 창업주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성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은 그 일 때문에 회사를 나와야 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벤처 회사를 꾸렸지.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엄청난 금융 제국을 일구게 된 게 그 실패 때문이었던 모양이야.”
“아아······ 그런 사람도 실패를 하는구나······.”
“그렇지. 미래를 알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실패를 피해 갈 수는 없어.”
유진의 말에 유성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럼 조금은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 큰돈을 벌려면 전부 잃을 각오가 필요하다는 말이야.”
“아아, 그런 의미였어?”
동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대다수의 리포트가 유가가 바닥이라 조정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계약을 줄이는 것도 염두에 두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유가가 80달러 아래로 내려가서도 숏 포지션의 계약을 계속 증가시키자 윌리엄조차도 우려의 의사를 보였다.
“생각은 해보지요. 우선은 특별한 신호가 있을 때까지는 계속 늘려 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유진은 자신의 의지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유진이 이 해의 유가 동향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느 한순간에도 5%나 반등한 적은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유성에게 말한 것처럼, 실패할 확률이 전혀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이런 기회는 흔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두려움에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는 일은 사양이다.
선물에 투자한 자본이 3억 달러가 될 무렵, 유진의 숏 포지션은 4만 계약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제 선물 레버리지는 10배를 살짝 상회한다.
“이사 온 지 꽤 됐는데, 집들이라도 한 번 할까?”
선물에 몰두하느라 타이트했던 생활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내 보았다.
“좋지. 그런데 우리 이렇게 큰 집에 이사 왔는데, 막상 집들이라고 부를 사람도 없네. 형은 부를 사람 있어?”
“우리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지난 삶에서는 뉴욕에 지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과거로 돌아온 지금에는 아직 서로를 모르는 타인들이다.
“하기는······.”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두 형제가 한 것이라고는 블랙록을 오가는 생활뿐이다.
“윌리엄,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주말에요? 딱히 약속은 없어요.”
“그럼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지 않겠어요?”
유진은 윌리엄과 그동안 낯을 익혀 놓은 몇몇 매니저를 초대했다.
“멋진 저택이군요. 저도 언제고 이런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이 마구 들 정도예요.”
윌리엄을 비롯한 매니저들 모두 유진의 새 저택을 칭찬했다.
“조금 낡은 게 조금 그렇지만, 뷰가 마음에 들어서 샀어요.”
“잘 사셨어요. 뉴욕 콘도 동향이 심상치 않아요. 지난 몇 년 동안의 침체기가 이제 끝나는 느낌이에요. 한 5, 6년 쯤 뒤에는 두 배 정도 오를 가능성도 있어요.”
역시 언제나 자산의 관점에서 판단을 내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뉴욕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이 건물만은 주인의 명성 때문에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꼭 오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테라스에서 내려보는 센트럴파크의 전경만은 정말 일품이었으니.
대충 트럼프랑 약간의 진도가 나가면 팔아 버릴 생각이었는데,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가끔 불러 주세요. 이런 저택을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고, 호연지기가 불끈 솟는군요.”
“자주 놀러와요. 혼자 오지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함께 와도 좋구요. 뉴욕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여기 계신 사람들뿐이네요.”
“아!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켜 드릴까요?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는 친구부터 사귀는 게 맞죠.”
“맞는 말이군요. 그럼 그것도 부탁드리죠.”
문득 지난 삶에서 뉴욕에 살 때의 지인들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언제고 다시 만날 기회들이 있을 거다.
“그럼 함께 스케줄을 맞춰 보시지요. 우선은 가벼운 칵테일 파티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제 고객들이나 친구 중에 어울리기 적당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렇게 즉석에서 사교 파티에 대한 예정이 생겨 버렸다.
“그건 그렇고. 요 몇 달 사이 유진 씨의 공격적인 투자가 굉장히 빛을 발하는 것 같군요. 겨우 두 달여 사이에 3억 달러라니. 더군다나 소액을 굴려 그 정도의 수익을 보는 경우야 흔한 일이지만, 유진 씨처럼 큰돈으로 그렇게 배짱 있게 밀어붙여서 단시일 내에 몇 배로 불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요.”
“올해는 아주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 투기 시장에서 운은 바로 실력이지요. 자신에게 운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걸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한 번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말이죠.”
“흐흐. 맞는 말입니다. 파생 상품을 취급하는 것은 어떻게 보든 칼날 위를 걷는 거나 다름없지요. 하지만 그거야말로 인생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윌리엄의 말에 유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좋은 말만 하시네요. 회사에서는 항상 걱정투성이더니?”
“고객님에 관한 걱정을 하는 것이 매니저의 의무지요. 하지만 지금은 고객과 매니저의 입장이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유진 씨의 배짱이 부럽습니다. 나라면 저 돈으로 저렇게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을까, 몇 번을 고민해 봤습니다만······ 음, 역시 자신이 없더군요.”
“하하. 칭찬 같지 않군요.”
“칭찬 맞아요. 적어도 이 월스트리트의 늑대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볼 배짱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럼 고맙게 들을게요.”
유진이 멋쩍게 웃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진 씨의 투자가 화제랍니다. 아! 물론 비밀 유지는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같이 일하는 동안 내부에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비밀 유지 말입니다. 굳이 안 해도 됩니다.”
“흐음······ 혹시?”
윌리엄이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포지션 이야기가 아니지요? 성과를 말하시는 거죠?”
윌리엄은 유진의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
“물론이죠. 제가 이렇게 벌어들인 걸 자랑도 좀 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흐흐.”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대신 자랑 좀 해 드리죠. 하하.”
유진과 윌리엄은 들고 있던 잔을 부딪쳤다.
유진은 자신의 성과가 소문나길 원했다. 그것도 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에게 퍼트려야 했다.
자산을 늘리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꽁꽁 감출 만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감출 수도 없는 일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설혹 누군가는 그걸 그저 운이라 치부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은 운 또한 능력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가는 부지런히 떨어졌다. 선물 가격이 72달러까지 내려갔을 무렵, 유진은 8만 계약이라는 천문학적인 포지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유진의 자본은 모두 8억 달러에 달한다.
특히 옵션 수익이 아주 쏠쏠했다.
“설마 여기서 더 추가하는 건 아니지?”
유성이 포기하듯 물었다.
“음. 조금만 더 늘려 보지.”
그 조금만이 2만 계약이 된다.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아. 10만 계약······ 1억 배럴······ 75억 달러······ 8조 원.”
무섭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유성의 눈은 마구 흔들거렸다.
“8조 원이면 대기업 계열사 하나 정도 되는 거지?”
“그렇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형이 번 돈이 7억 달러고.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기업 1년 순익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기업도 아니고 한 개인이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는 거야?”
“가끔 그런 경우가 나오기는 한다더라. 지난번 모기지 사태 때에 한 딜러는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신용부도스와프로 거액을 벌어들인 마이클 베리에 대한 영화 ‘빅쇼트’는 아직 시나리오만 있는 상태일 때이다.
“아! 진짜 어이없는 일이네. 1조원이라니······.”
평범한 소시민에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금융 투자와 수익의 규모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에 대한 투자 문제로 책임 있는 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될 수 있다면 트럼프의 이름을 가진 분과요.”
이제 제법 얼굴을 익힌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의 직원에게 새로운 요청을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주머니가 두둑해졌으니, 조금 더 일을 진행시켜 보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유진은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의 직원에게서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매물을 몇 번이나 소개받았고, 계속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것에 투자할 여윳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직 유진은 그저 메가밀리언 당첨금으로 2억 달러를 받은 벼락부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유진의 명성은 윌리엄과 다른 블랙록 매니저들을 통해 월가에 조금씩 흘러나가고 있다.
몇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파생으로 몇 억 달러를 벌어들인 기인이 월스트리트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흔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요청한 바로 그 날 오후, 그의 자택으로 투자 관련한 이가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울렸다.
유진이 직접 나가 문을 열어보니 늘씬한 백인 여성이 웃으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방카 트럼프에요.”
이방카는 굉장히 키가 큰 여자였다.
하이힐까지 신고 있으니 어지간한 남자는 눈 아래로 보일 정도다.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의 개발·인수 부문 부사장이자, 이방카 트럼프 라이프스타일 콜렉션의 대표입니다.”
그녀가 꽤나 긴 자신의 직위를 말했다.
“반갑습니다. 유진 강입니다.”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유진이 반갑게 맞이했다.
“저희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에 투자 의향이 있으시다고 해서 왔어요.”
“제가 사무실로 찾아가도 되는데요.”
“어차피 사무실도 아래에 있고, 마침 이 위에 아빠를 보러 가던 길이어서요.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이죠. 들어오시죠.”
“그럴게요.”
이방카는 거절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코리아에서 오셨다면서요? 서울?”
이방카는 남한과 북한도 구별 못 할 만큼 무식하지는 않았다.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은 우리 트럼프 오가니제이션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죠.”
“한국에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트럼프 타워가 몇 개나 있습니다. 전부 부자들만 사는 최고급 콘도들이죠.”
“그렇죠. 트럼프의 이름이 붙은 이상 아무나 들어올 곳은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트럼프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요.”
유진은 트럼프 가족의 트럼프라는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어프렌티스의 팬이라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보고 있어요, 이방카가 나온 편은 특히 재미 있었구요.”
유진은 트럼프 일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피력했다.
“그랬었나요? 진짜 열심히 보셨던 모양이네요.”
이방카는 유진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잠시 그렇게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은 투자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선다.
“그런데 메가밀리언 당첨금으로 파생 상품에 투자해서 엄청나게 불렸다고 들었어요.”
이방카가 웃으며 말했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돈 모양이다.
“부동산 투자에도 관심이 많으시다면서요.”
결국 그녀가 찾아온 목적은 그거였다.
“사실 운이 좋아 파생에서 한몫 벌었지만 슬슬 안전한 자산에도 투자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요.”
“좋은 생각이에요. 부동산처럼 안전하고, 또 확실한 자산은 없죠. 예전부터 말하잖아요? 부동산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금융 자산이야 자칫하면 한 번에 날아가 버리지만, 부동산은 어디 도망가는 일이 없죠.”
“마침 우리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은 전 세계에 걸쳐 아주 매력적인 부동산을 비롯해 다양한 자산을 잔뜩 운영하고 있답니다.”
물론 태반은 이름만 빌려준 것이고, 그나마 직접 관리하는 것도 대부분은 부실 투성이이지만······.
“꼭 부동산뿐 아니라 적당한 투자처가 있다면 고려해 볼 생각입니다.”
하필 오늘 만난 사람이 이방카였기 때문에, 유진은 조금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제가 좋은 투자처를 소개시켜 드릴까요?”
이방카가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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