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23. 망치와 모루
“좋은 투자처요? 그런 게 있으면 당연히 좋지요.”
유진은 순진한 얼굴을 하며 반갑게 대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의 개발·인수 부문 부사장이고 동시에 이방카 트럼프 라이프스타일 콜렉션의 대표지요. 이방카 트럼프 라이프스타일 콜렉션은 고가의 주얼리 사업에서 대중적인 패션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수행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찾아온 것은 이 때문인 듯싶었다.
파생으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투자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게 하려는 모양이다.
이방카의 패션 사업은 부친의 다른 사업들이 그러하듯 전적으로 이방카 트럼프라는 이름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업 성적은 솔직히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다.
“흐음, 제가 생각했던 종류의 비즈니스는 아니군요. 패션과 주얼리라······.”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인 분야에요. 여기 트럼프 타워에도 매장이 있으니 한 번 들러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얼마 동안 이방카는 자신의 사업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유진이 알기로 트럼프 일가는 꽤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동업을 해 왔었다.
그리고 그런 동업에서 적지 않은 실패를 겪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꾸며 갔다.
그러니까 돈이 되는, 혹은 돈이 보이는 일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패션 쪽은 문외한이라······ 어쨌든 이방카가 하는 사업이라면 관심은 가는군요. 그렇다면 우선 투자 제안서라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바로 작성해서 보내 드리지요.”
이방카는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며 다시 한번 자신의 회사를 홍보했다.
“참! 이렇게 유명한 분과 함께 자리했는데, 작은 기념이라도 하나 남기고 싶네요. 함께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SNS에 기록으로 올리고 싶거든요. 친구들도 모두들 좋아할 거예요.”
한참 동안 이방카의 제안을 듣고 나서, 유진이 친분을 쌓기 위한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물론이죠.”
이방카가 그걸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창 패션 사업을 하느라 일 년에도 수십 개의 잡지와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사진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는 여자였다.
서점에 가면 보이는 수십 개의 여성 잡지 중에 두세 개에서는 꼭 그녀의 기사를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대단한 셀럽이라서라기보다, 비즈니스를 위해 스스로 열정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온 덕분이다.
이방카는 부친으로부터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법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형제들 중 가장 잘 활용하는 여자였다.
이방카와의 미팅은 상호 호의적이었다. 물론 두 사람 서로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키가 굉장히 크더라.”
이방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유성의 첫인상은 그녀의 신장이었다.
180의 키에 높은 하이힐까지 신고 있으니 사실 누구라도 그녀의 키에 눈이 갈 것이다.
“부친도 190이고, 모친도 굉장히 클 거야.”
“어쩐지. 근데 굉장히 의욕적인 여자인 거 같아. 어떻게든 자기네 기업에 투자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게 사업을 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 아니겠어? 현금 자산 8억 달러를 지닌 사람이 미국이라고 흔한 것은 아니잖아?”
“하아······ 듣고 보니 또 소름 끼친다. 8억 달러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억 달러였잖아. 그것도 어마어마한데······.”
“오늘 이방카랑 찍은 사진도 잘 나온 걸로 골라 한 장 올려.”
당사자의 허락도 받았으니 거칠 것이 없다.
“처음으로 유명인이랑 찍은 사진이네. 근데 유명한 사람 맞지?”
“미국에서는. 그녀 아버지가 미국에서 제일가는 어그로꾼이고, 벌써 10년도 넘게 진행 중인 인기 쇼 어프렌티스에 계속 출연하고 있으니까. 한국에서야······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이지.”
지금의 인지도야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1년 뒤에 이방카와 다정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그러면 이방카라는 여자랑 같이 일할 생각이야?”
“아마. 조건만 나쁘지 않다면 말이지.”
2년 뒤에 대통령의 딸이며, 백악관의 실세가 될 여자와 가까워질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단 대통령의 딸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뒤에는 베팅에 필요한 액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앞으로 2년 뒤 중국은 보험회사를 통해 이방카의 남편인 쿠슈너에게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이해 충돌이라는 이유로 그 투자는 무산되었지만, 그 뒤로도 각국에서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방카와 쿠슈너에게 거액의 투자라는 선물을 주고 미국 대통령의 호의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니 지금 하는 투자는 얼마가 되든 헐값이다.
물론 정말로 마구 퍼 줄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다.
어디까지나 대등한 수준의, 혹은 시혜를 주는 입장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며칠 뒤에는 윌리엄에게 물었다.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혹시 칼라일그룹에 연결 좀 시켜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그런데 혹시 칼라일 쪽에 펀드를 조성할 생각인가요?”
윌리엄이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아뇨. 그쪽에서 갖고 있는 프리스케일 지분에 관심이 있어요.”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라······ 거기가 요즘 말이 많죠? 올 초 말레이시아에 추락한 여객기 사건 이후로 아직도 뒤숭숭하다고 하던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적지 않은 주주들이 엑시트를 고려하고 있다더군요. 칼라일 측도 그런지 알고 싶어서요.”
“흐음,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죠.”
유진이 투자처를 옮길 생각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윌리엄이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프랑크푸르트에 퓌클러 짐머만 정밀 기계 개발이라는 회사가 하나 있어요. 거기를 인수하고 싶은데, 아시다시피 그럴 인력이 없네요.”
“퓌클러 짐머만 정밀 기계 개발이라······.”
윌리엄은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려 노력했다.
“잘 모르는 곳이군요. 여하튼 인수합병 쪽 전문가가 필요하시다는 말씀이시죠?”
“작은 회사라 윌리엄이 모르는 게 당연해요. 아마 직원 수가 100명도 안 될 거예요. 매출은 3,000만 달러가 넘지 않고요.”
“독일 기업의 인수면 꽤 까다롭겠군요. 특히 하이테크 기업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죠. 정부의 심사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난관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중국 기업이 인수하는 게 아니니 허들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나라이지만, 독일 정부는 자국의 경쟁력 높은 하이테크 기업이 외국 업체에 인수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중국계 기업의 독일 중소 기술 기업 합병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규제를 한다.
국가에서 기업과 기업 사이의 거래인 인수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독일 정부는 인수에 필요한 심사를 까다롭게 한다거나, 허가가 필요한 부분에 딴지를 거는 따위로 인수, 합병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장벽을 쌓아 놓았다.
정밀 기계 부문에서 타 국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한 경쟁력을 지닌 독일이지만,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받고 있는 만큼 경각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많은 기업이 사실상 중국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더더욱 심사와 허가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 장벽 수준을 세워 놓은 정도이다.
하지만 앞으로 3, 4년 뒤에는 아예 정부에서 중국계 기업에로의 인수, 합병을 직접적으로 막고 나서게 된다.
그리고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 국부펀드를 만들어 중국 기업들의 사냥감이 된 자국 기업에 지분 매입의 형식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유독 중국계에 대해서만 그렇게 나선 것을 보면, 솔직히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할 만하다.
“알겠습니다. 우선 독일 법인에 연락해서 그쪽 전문가를 안배해 놓겠습니다.”
“블랙록 같은 금융회사에서 기업 인수 전문가도 수배해 줘?”
윌리엄이 돌아간 뒤 조용히 듣고 있던 유성이 물어 왔다.
“기업 인수 전문가들은 대부분 사모펀드에 있으니까. 블랙록도 사모펀드 부서가 있고. 사실 블랙록은 사모펀드 쪽은 주력이 아니긴 한데, 블랙스톤이나 칼라일 같은 3대 사모펀드 회사에는 미치지 못해도, 우리가 원하는 수준은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거야.”
“그렇구나. 그리고 퓌클러 짐머만이라고 했지? 어디서 들어 본 회사 같은데?”
“독일 정밀 부품 회사야. 대양중공업에도 납품한 적이 있고.”
“어? 그래? 그래서 귀에 익었나?”
“여하튼 그 회사에 대해서는 앞으로 네가 신경 좀 써야 해.”
“내가?”
유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어. 성진정밀 자회사로 인수할 예정이니까. 네가 사장이니 당연히 네가 챙겨야지. 자료 받으면 인수하러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것도 네 일이야.”
“프랑크푸르트에? 내가? 어? 어어······.”
“어차피 나는 그쪽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네 전공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갑자기 인수는 왜? 기술이 좋은가 보지?”
“기술도 좋고, 특허도 있고.”
“특허?”
“대양중공업에서 그쪽 부품을 수입해서 사용하다가 작년부터 다른 회사에서 납품받는 부품이 있어. 그런데 특허를 해결 못 한 모양이야.”
“그래?”
유성이 눈을 빛냈다.
“어. 그러니까 퓌클러 짐머만의 인수는 대양그룹 공략을 위한 망치가 될 수 있어.”
원래라면 앞으로 몇 년쯤 뒤에 벌어질 사건이다.
중국의 한 업체가 퓌클러 짐머만 정밀 기계 개발을 인수했고, 마침 대양중공업이 그 회사 특허의 유사 특허를 출원한 사실을 알고 법정 분쟁을 벌인다.
특허 분쟁에 가장 민감한 산업은 전자제품이 아니라 바로 선박 분야이다.
만일 한 나라에서라도 특허 침해가 인정되면, 그 부품을 사용한 선박은 그 나라에 정박할 수 없다.
때문에 조선 업체에서는 경쟁업체의 특허에 대응하기 위해 한 해에도 수천 건에 달하는 특허를 출원한다.
대양으로서는 운이 좋지 않았다. 같은 조선회사끼리의 분쟁이라면 서로가 가진 특허를 무기로 적당한 협상이 가능하겠지만, 이번엔 중국과 독일의 정밀공업회사였다.
중국과 독일 양국의 법정에서 이어지는 소송에서 당연하게도 대양은 패배의 위기에 서게 되었다.
대양은 결국 밝혀지지 않은 적지 않은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해당 특허를 구매하고, 반대로 그 특허로 다른 조선업체를 압박하고 나선다.
물론 이번에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유진이 그 특허를 대양에 넘길 일은 없을 테니.
“그런 특허를 가지고 왜 지금까지 분쟁에 나서지 않은 거야?”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니야. 수십억에 달하는 소송비용을 감당할 만한 사이즈가 안 되거든. 그리고 창업주가 얼마 전에 사망했어. 지금은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는데, 작은 정밀 회사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는 모양이야.”
그런 이유로 창업주 아래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에 의해 적당히 굴러가다가, 2년 뒤에 돈다발을 들고 온 중국인에게 팔리게 된다.
“그럼 인수가 어렵지는 않겠네?”
“아마도.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우리한테 꼭 필요한 회사니까, 얼마가 들든 손에 넣어야 해.”
“알았어. 기업 인수는 내가 잘 모르지만, 꼭 필요한 회사라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해 볼게.”
“인수는 어차피 블랙록에 맡길 거야. 얼마가 들던 손에 넣을 거고. 넌 그걸 인수한 뒤에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면 돼. 그리고 특허 부분에 신경 쓰고.”
“알았어.”
유성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서렸다.
사실은 전부 유성에게 들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대양중공업과의 분쟁 동안 유성은 조금이라도 승기를 잡기 위해 대양에 관련된 사실은 작은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겨 형의 의견을 물어 왔다.
물론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대양이 다른 회사와 특허 분쟁에서 이기든 지든 성진과는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유성은 작은 승기라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그 노력이 다시 과거로 돌아온 유진을 통해 전해져 유성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며칠 뒤, 윌리엄에게서 보고서를 받은 유진은 다산 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인 김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로 돌아간 김철호는 다산자동차 미주 본부 부사장에서 다산 그룹 금융 부분의 대표적인 계열사인 다산파이낸스 부사장으로 영전했다.
그 뒤로는 다시 미국으로 오지 않았고, 몇 번인가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 번 보러 가야 하는데, 이쪽 일이 너무 바빠서 말이지. 잘 지내고 있는가?”
몇 번 연락을 하다 보니, 이제 말을 편하게 놓을 정도가 되었다.
“형님 바쁘신데 제가 찾아 뵈야죠.”
유진도 서슴없이 김 부사장을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래. 서울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세. 그렇지 않아도 자네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하하. 누굴까요? 절 보고싶어 하시는 분이?”
“우리 형님들 말이야. 큰형님이야 당연히 자네한테 고마워하시고, 둘째 형님도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야.”
“이런. 제가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니, 영 송구스럽습니다.”
“송구스럽기는 무슨. 여하튼 꼭일세.”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한 번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들어가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수호 부사장님을 한 번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유진이 전화를 건 목적은 다산전자 부사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몇 달 전의 유진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겠지만, 다산자동차의 일을 도와준 뒤로, 김철호가 계속 호의를 내비춰 왔기에, 한 번 꺼내 볼 만했다.
“그래? 그럼 내가 자리 한 번 마련하지.”
그렇게 다산 그룹의 수뇌부와의 약속을 잡은 유진은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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