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5. 춤추는 곰
“그 본부장은 어째서 한 번도 안 찾아오는 거니?”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있던 아이의 외할머니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거실의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 엄마를 보며 말했다.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
아이 엄마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걱정되니까 그렇지. 네가 이 꼴이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 꼴이 뭐 어때서.”
아이 엄마가 고개를 홱 돌리며 모친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딸의 독살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자신이 괜히 성질을 건드렸구나 싶어,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니? 소송 취하 안 해도? 걔가 너한테 유전자 검사 얘기까지 했다며? 그럼 알 거 다 안다는 거 아냐?”
딸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한번 말을 꺼내놓았다.
“누군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본부장님이 꼭 필요하다니까 그러지.”
여자는 말을 마치고 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러다가 정말로 유전자 검사라도 하자 그러면 어쩌려고? 진짜 망신 아니야?”
“나도 알아. 그리고 엄마가 걱정할 거 없어. 다 알아서 할 테니.”
“너 설마 무슨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아이를 안고 있던 외할머니의 팔이 떨린다.
“엉뚱한 생각은 무슨. 가서 애 분유나 먹이세요.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애 엄마는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갑게 이야기했다.
“그래······ 알았다. 너도 술은 조금 자제하는 게 낫지 않겠니? 애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걱정스레 말을 꺼내던 그녀는 딸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몸을 돌리고 아이를 안은 채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 것은.
“여보세요? 본부장님?”
여자는 재빨리 담배를 끄고 전화를 받았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많이 바쁘시죠? 알아요. 괜찮아요.”
모친을 대할 때와는 달리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얼굴은 모친을 대할 때와 그리 다르지 않게 차가웠다.
“그런데 우리 아이······ 얼굴 한번 보셔야 하지 않으시겠어요? 예, 그럼요. 저도 알지요. 누가 본부장님 차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놓기까지 한 거 말이죠. 네.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물론이죠. 아무하고도 통화한 적 없어요. 이 전화번호 아는 사람도 본부장님뿐이에요.”
그리고 잠시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가던 도중.
“뭐라고요? 그 인간이 서울에 있다고요?”
여자의 얼굴이 표독하게 변했다.
“그 인간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요? 여기저기 그 인간 이야기가 들려오는 게 너무 신경이 쓰여요. 하긴, 요즘 한국에서 그런 일 맡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여자는 듣기에도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러면 미국에서는 어떤가요? 그렇게 돈을 벌었으면 그 돈 노리는 사람도 많을 거 아니에요? 미국은 강도도 많고요. 뭐요? 아카데미요? 그게 뭐죠? 블랙 워터? 전쟁 용병이라고요? 그러니까 용병 출신을 경호원으로 쓰고 있단 말이에요? 미친 새끼 아니야!”
조용조용 교양 있는 말투를 사용하다가도 흥분했을 때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뭐라구요? 10억 달러? 그게 말이 돼요? 아무리 파생이라고 해도······ 하아, 나 참 어이가 없네······.”
성규에게 유진의 새로운 소식을 들은 여자의 눈에 서슬 퍼런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전 본부장님만 믿고 있을게요. 네, 그렇게 해요. 몸조심하시구요.”
전화를 끊고 나자, 여자의 얼굴은 다시 악귀처럼 변하고 말았다.
“짜증 나!”
여자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잡아 거세게 던져 버리고 말았다.
“이 미친 새끼! 왜 남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건데? 죽어 버려! 죽어! 죽어!”
그녀의 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주방에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던 외할머니는 혹시라도 아이가 엄마의 비명을 듣고 놀랄까 손으로 귀를 막아 주었다.
* * *
- 인수의향서 교부까지 끝냈어. 이제 본격적으로 매수 협상에 들어가면 돼.
독일에 가 있는 유성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유진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때? 그쪽 반응은?”
- 굉장히 우호적이야. 창업주의 아들이 제일 적극적이고, 실무진도 우리가 인수하고 경영을 맡기겠다고 하니 반기는 눈치야.
“다행이구나.”
- 어. 보니까 사장이 정말 경영에 관심이 없어. 적당히 돈을 받으면 그걸로 편하게 살 생각뿐인 모양이야. 뭐랄까? 욜로? 요즘 유행하는 말 있잖아. 그런 느낌이야.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부친이 암으로 투병하다 죽었대.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사에 출근하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자기는 그렇게 살기 싫다네.
생각보다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유진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사장이랑 그런 이야기까지 나눈 거야?”
- 어차피 실무는 다른 사람들이 하잖아. 나하고 그 사장하고 좀 멀뚱멀뚱하게 지켜보다가 어쩌다 보니 대화를 나누게 됐지.
“독일어로?”
- 아니. 영어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네.
“그래, 잘했다. 여하튼.”
붙임성이 있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유성의 장점이다.
어쩌면 유성의 또 다른 적성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협상 끝나면 바로 보고할게.
“그래. 너도 잘 보고 배워.”
앞으로 유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인수 합병을 계속해서 이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일은 적당한 수업이 될 것이다.
서울에 온 김에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다시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다산전자 김수호 부사장을 만났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먼저 찾아오라 연락이 왔다.
“자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가? 다산이 대양을 대신해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길 원하는 건가?”
김수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대양이 프리스케일 인수하는 것을 막고 싶은 것뿐입니다. 다산전자야 다산전자의 사정이 있을 테고요.”
“그래. 우리도 나름의 사정이 있지. 다산전자 반도체 사업부와 프리스케일의 방향이 너무 달라서 시너지가 그리 나지 않아.”
생각했던 것처럼 튕기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시기가 안 좋아. 180억 달러나 되는 돈을 충분한 시너지가 날지도 모르는 사업에 퍼부을 수는 없어.”
180억 달러는 10년 전 프리스케일이 사모펀드에 팔려나갈 때의 가격이다.
그때와 지금이 같은 가격일 수는 없다.
블랙스톤의 주도로 칼라일 그룹을 비롯한 몇 개의 사모펀드 운용사들이 컨소시엄을 통해 매입한 프리스케일은 바이아웃 펀드로서는 사실 성공적인 투자는 아니었다.
무려 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적당한 매수자를 찾지 못해 큰 자금이 묶여 있었으니까.
이번에 매수자로 나선 대양전자도 그 액수를 지불할 생각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데 대양에 비해 정보력이 떨어질 리 없는 다산에서 적정 가격이 180억보다는 훨씬 밑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유진은 상대가 역시 곰처럼 생긴 너구리라고 생각했다.
“맥시멈으로 150억 달러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흠······ 거기까지 계산이 나온 건가?”
김 사장은 유진을 그저 개인으로 보는 것은 실책이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하튼 다산으로서는 지금 그런 큰돈을 사용할 여유가 없어. 작년에 구입한 역삼동 땅 대금 지급도 아직 안 끝났단 말이지.”
다산 그룹은 지난해에 무려 8조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역삼동에 대규모의 대지를 확보했다.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그룹 계열사들을 한곳에 모을 대단위 복합 업무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세간에서는 대기업이 또 땅장사냐며 난리였지만, 몇 년 뒤에 엄청나게 뛰어 버린 땅값 때문에 신의 한 수였다는 평으로 바뀐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다산전자 반도체 공장에 쏟아부은 자금도 엄청나고 말이야.”
김 부사장은 한참을 그렇게 엄살을 떨었다.
“결국은 프리스케일 인수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말이지요?”
“아니. 지난번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와 관련해서는 자네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어. 그러니 이번에 자네가 가져온 건이 설혹 우리 그룹에 꽤 무리가 간다 해도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곰 아저씨가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도움을 요청했으니, 한 번은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마치 유진을 돕기 위해서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물론 대양 그룹에 프리스케일이 넘어가면 우리 쪽도 조금 곤란한 것도 사실이고 말일세.”
“도움을 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다산 그룹의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유진은 넙죽 감사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자금 조달에 힘이 부칠 것 같으니, 결과는 장담할 수 없네. 더군다나 대양과 우리 다산이 동시에 인수 의사를 밝히면 그쪽에서도 몸값을 올리려 들겠지.”
“꽤 치열한 경쟁이 되겠군요.”
“그럴 경우 자네가 말한 150억 달러쯤은 쉽게 넘어갈 걸세. 다산의 마지노도 그 정도일 테고.”
“만일 150억 달러에 인수할 수 있다면, 프리스케일을 인수하실 의향은 있으십니까?”
유진은 프리스케일 인수 가격이 150억 달러를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내막을 밝힐 수도, 그리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네.”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 두고 봐야 알겠지. 이번 주말까지 협상단을 꾸려 놓겠네. 자네와 프리스케일 경영진의 미팅 즈음해서 우리도 프리스케일 인수 협상을 통보하고, 실무진을 오스틴에 파견하도록 하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산전자도 프리스케일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양에서 상당히 곤란할 겁니다.”
대양을 물 먹이기 위해 동맹을 맺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다산은 매수가가 너무 높을 경우 프리스케일의 자동차 산업용 반도체 부분만 분할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안 된다면 하다못해 가격이라도 잔뜩 올려 인수의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계획이었다.
한편 유진은 다산의 생각처럼 단순히 매수 가격을 높여 대양을 골탕 먹이는 수준을 목표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을 끌어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대양과 다산 사이의 긴장을 조성하려는 것일 뿐, 프리스케일 인수는 그 자신이 할 생각이다.
이렇게 훌륭한 먹거리를 저렴한 가격에 손에 넣을 수 있는데, 남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 * *
“오재혁 씨? 듣자니 강유진이라는 자와 오랜 친구 사이라면서요?”
“유진이랑요? 네, 뭐. 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절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
“강유진 그 친구가 미국에서 메가밀리언에 당첨된 뒤로 연락은 되고 있나요?”
“처음에는 연락 두절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 단톡방에 다시 나타나더군요. 그 뒤로 가끔씩 톡을 주고받는 정도입니다.”
“그럼 재혁 씨가 뉴욕에 부임하게 되면 친구니까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겠군요.”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돈이 들어오면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잘 모르겠는 정도로는 안 되는데.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강유진 그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꿀꺽,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네. 아마······ 아니,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뉴욕으로 부임할 준비하세요. 뉴욕 지사에 자리를 마련해 놓으라고 전할 테니.”
“혹시 달리 시키실 일이라도?”
“우선은 그자가 어떤 이유로 다산전자를 드나드는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재혁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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