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7화 (27/363)

#26.

#26. 오프 더 레코드

“오랜만이다. 잘 지내고 있냐? 아니지. 네가 잘 못 지내고 있으면 세상에 잘 지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유진이 뉴욕으로 돌아오고 며칠 되지 않아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재혁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뉴욕 지사로 발령받았다고?”

“어. 올해 초에 신청했는데, 이번에 부임하라고 하더라.”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적적했는데 말이지.”

오랜만에 만난 동기를 맞이하며 유진은 한껏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원래는 이 녀석이 이맘때 뉴욕에 부임하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유진의 마음속은 경각심으로 가득했다.

지난 삶에서 재혁은 한 번도 뉴욕으로 발령받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뉴욕 지사로 부임했다?

유진은 틀림없이 자신과 관련된 일이 원인이라 생각했다.

뉴욕으로의 발령이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닐 테고, 틀림없이 위쪽에서 내려온 지시겠지?

더군다나······.

“그런데 신문사에서도 뉴욕 지사면 출세 코스인가?”

“출세 코스는 무슨. 나 같은 말단이. 그냥 뺑이 치란 얘기지. 민국일보가 10대지에 껴 있기는 한데······ 솔직히 뉴욕 지사 꾸리는 것도 꽤 버거워. 4대지나 공중파 정도는 되어야 뉴욕 특파원 할 만하지.”

유진은 대양중공업의 류성규가 민국일보 사주의 딸과 이해 말에 결혼하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하튼 잘 왔다. 자주 얼굴 보고 살자.”

유진은 오히려 이 녀석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딱히 가책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동기라고는 해도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사이였고, 지난 삶에서 그와 대양의 싸움을 알면서도 지나가는 말로라도 기사라도 써 보겠다는 말조차 한 적 없던 녀석이다.

더군다나 류성규의 청부로 온 것이라면······.

이용해 주는 게 당연하지.

“그래. 자주 보고 살자. 이제 부자 됐다고 홀대하는 거 아니지?”

“홀대는 무슨.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가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참! 그런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오늘 오후에 비행기 타러 가야 하거든.”

한동안 두서없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유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비행기? 어디 가는데?”

재혁의 눈빛이 빛난다.

“오스틴.”

“텍사스? 거기는 왜?”

“거기 반도체 회사에 투자 좀 할까 해서.”

“투자? 그래? 어느 반도체?”

쉽게 놓아 주지 않는다. 물론 평범하게 기자로서의 호기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류성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라고, 일반인들한테는 그렇게 유명한 곳은 아니야.”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 거기 사모펀드가 인수한 곳 아니야? 몇 년 전에 꽤 화제가 됐던 거 같은데. 사모펀드가 매수한 테크 기업 중에서 가장 큰 금액으로 인수했다고.”

“맞아. 워낙 큰 건이라 블랙스톤이 주도하고 칼라일 그룹하고 다른 몇 개의 사모펀드가 컨소시엄으로 사 버렸었지.”

“그 뒤로 그다지 재미 못 본 거 같은데? 거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시장가의 두 배도 넘게 주고 사서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 가니까 그쪽에서는 실패라고 보는 게 맞지. 그래서 컨소시엄에 돈을 넣었던 사모펀드들은 자금 회수를 원하는 모양이야.”

“그런데 네가 투자를 한다고? 그거 너무 위험하지 않아?”

“우선은 너만 알고 있어. 오프 더 레코드야. 지켜 줄 수 있지?”

유진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뭔데?”

“나 혼자 하려는 게 아니야. 다산전자가 프리스케일 인수를 도와주려 하고 있어.”

“다산?”

재혁의 얼굴은 좀 더 불편해진다.

“너도 알지? 나 명성 다닐 때 무슨 일 했는지?”

유진은 그런 재혁의 표정을 짐짓 모른 체하고 말을 이어 갔다.

“어. 프로젝트 오가나이징 부서에 있었잖아. 거기서 다산전자 쪽 사람들이랑 연관이 되었었나?”

“조금은. 그래서 그쪽에 의견을 타진해 보니 관심을 가지더라고. 프리스케일이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에 강한 거 알지? 일반적인 투자라면 그렇게까지 매력이 있지는 않겠지만, 다산의 경우는 자동차가 주 사업이니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굉장하구나······.”

재혁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하튼 자세한 이야기는 어려운데, 이번엔 그냥 의사 타진만 하려는 거야.”

“다산이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에 투자를 한단 말이지?”

그게 재혁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인 모양이다.

“아직 하나도 결정된 건 없어. 그러니까 절대 비밀이다.”

“좋아. 당연하지. 대신 결정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기다. 친구 덕분에 특종 한 번 따 보자.”

“특종 정도겠어? 잘만하면 한 몫 볼 수 있을걸? 이틀 전에만 알면 말이야.”

“아! 그러네. 다산전자가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에 투자한다는 정도면 꽤나 호재겠지?”

“그러니까 너도 고민 좀 해 봐.”

“고맙다. 역시 친구밖에 없어. 흐흐흐.”

평소에 동기들과 만나도 친구 소리는 하지 않던 녀석이 친구를 운운하며 웃는다.

“그럼 난 가 볼게. 다음에 보자.”

“그래. 나도 이제 막 와서 바빠.”

유진은 열심히 눈을 굴리고 있는 재혁을 두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 * *

유진이 자리를 뜨자마자, 재혁은 전화기를 꺼내 의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 확실한 건가?

전화를 받은 상대는 지난번과 달리 존칭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딱딱한 명령의 어조였다.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텍사스 오스틴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재혁은 유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세세하게 보고했다.

- 미친놈이군. 그런 짓거리를 한단 말이야?

재혁의 보고를 들은 상대가 욕설을 내뱉었고, 재혁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자신이 꾸중을 듣는 기분이었다.

- 더 좀 자세하게 알아 봐. 앞으로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최대한 알아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알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 * *

어차피 대양 그룹에 흘릴 이야기였다.

유진은 대양과 다산이 프리스케일을 놓고 경쟁하기를 원했다.

마침 대양에서 정보원을 보내 주었으니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유진은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의 주도 오스틴으로 날아갔다.

오스틴 시내 중심부의 호텔에서 다산 그룹이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이틀 정도 머리를 맞대고 프리스케일 인수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프리스케일 본사에서의 미팅은 내내 호의적이었다.

벌써 반년 가까이 대양과의 지지부진한 협상에 지쳐 있던 프리스케일 측에서는 새로운 협상자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다산전자가 매수자로 뛰어듦으로써 프리스케일은 대양에도 조금 더 비싼 가격을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다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오스틴에서의 협상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니, 마침 유성도 독일에서 돌아와 있었다.

“고생 많았다.”

“고생은 무슨. 나야 그냥 들러리만 서다 온 기분이야.”

“그래도 배우는 게 많았지?”

“어. 생각보다 즐겁더라. 난 기름이나 손에 묻히고 사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경영이란 것도 꽤 흥미롭네.”

“그래서 이제 실무 절차만 남은 거지?”

“어. 블랙록 독일 법인에서 회계 실사만 끝나면 거의 되는 거 같아. 그다음에는 규제 승인이 남아 있고. 생각보다 복잡하더라고.”

그래도 제일 난관인 가격 협상 부분이 쉽게 끝났다.

저쪽에서도 팔고 싶어 하고, 이쪽에서는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사들이려 했으니.

“그쪽에서 끝났다고 연락 오면 다시 날아가서 사인하면 돼.”

이번 한 건으로 왠지 동생이 의젓해졌다 느껴진다.

“이번 주말에도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이야.”

뉴욕에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파티를 열기로 한다.

“알았어. 이번에도 윌리엄과 친구들이겠네?”

“그렇지.”

윌리엄이 자기 지인들을 소개해 주겠다 해서 한 번 파티를 열었더니, 어느샌가 매주 주말이면 정기적으로 열고 있었다.

“다들 잘 놀더라.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신경도 그다지 쓰지 않고 파티를 즐기고.”

“여기 사람들은 파티가 무척 중요한 문화니까. 그렇게 노는 것에 익숙한 거지.”

“우리는 거의 술집에서 놀았잖아? 파티할 공간이 어디 있어. 다들 하숙집 아니면 기숙산데.”

“그러게 말이야. 기숙사에서도 조금만 시끄러우면 난리가 났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 집은 파티하기 참 좋아. 넓고 2층짜리라 위에서 놀면 아래층에 발소리 들릴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둘이 눈이 맞아 아무 방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인간들만 없으면 좋은데 말이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유진은 미국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아······ 진짜 싫어. 남의 집에 왔으면 그래도 예의는 좀 지켜 주지 말이야.”

“파티 공간으로 제공했으니 감수해야 하는 모양이야.”

트럼프 타워의 저택에는 방이 많았다. 그리고 유진은 자신의 방과 유성의 방, 그리고 작업실에 도어락을 장치해 놓았고, 다른 빈방에 있던 침대들을 전부 치워 버렸다.

그런데도 용건이 있는 사람들은 용케 해결하고는 하는 모양이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이면 관리실에서 제공하는 하우스키핑 서비스를 이용해 온 집안을 완전히 다시 치워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그 점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다.

동생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지만, 유진은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낯선 남의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나눌 지인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언제까지고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난번의 삶에서도 유진은 이 땅에 잘 적응했었다.

비극으로 끝났던 결혼 생활로, 그리고 가족의 불행으로 버거워하다가 쫓기듯 고국을 떠나와 안착한 이 땅에서 유진은 많은 인연을 만들었고, 조금은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기회를 찾은 지금, 유진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 대한 복수로 이를 갈며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부록에 불과하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 * *

토요일 오후, 유진이 살고 있는 트럼프 타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웨스트사이드의 한 카페테리아에는 한눈에 한국 사람임을 알아볼 만한 세련된 차림의 젊은 여성 둘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누군가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며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싫다구요. 몇 번째에요. 내 나이가 몇인데 선이에요. 그냥 만나 보는 것도 싫어요. 끊어요. 지금 바빠요.”

그녀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엄마?”

그녀가 통화하는 동안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이모. 자꾸 왜 그러는지 몰라. 아빠는 가만히 있는데, 이모가 더 난리야.”

“그래도 너희는 참 좋다. 우리 집에서는 ‘선 봐라’ 그러면 ‘네’하고 바로 대답해야지, 안 그러면 아주 난리나.”

“그러게.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이 너희보다는 좀 자유로운 거 같아. 근데 이모는 왜 그렇게 난리인지 모르겠어.”

“뭐. 다 네 걱정 해서 그러신다 생각해.”

친구의 말에 그녀가 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아! 몰라. 근데 오늘 뭐 할 거야? 니가 불러서 보스턴에서 여기까지 왔잖아. 오늘 재미없으면 너 책임이야.”

“보스턴이 뭐 먼가?”

“멀지. 오늘도 다섯 시간이나 걸렸어.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 거리라고. 얼마나 엉덩이가 아픈지 알아?”

“여기서야 그냥 이웃 도시지 뭐. 그리고 너 또 버스 타고 왔지?”

“어. 버스가 기차보다 100달러나 싸니까.”

“100달러······ 기가 막혀서. 너 언제까지 그렇게 서민 코스프레 할래?”

친구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코스프레라······ 솔직히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은 그렇게 살고 싶어. 그래서 왜 불렀어?”

“파티가자고.”

“파티? 흐응······ 나 파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래도 가끔은 머리 식히러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늘은 요즘 뉴욕에서 제일 핫한 사람 집에 갈 거야.”

“뉴욕에서 제일 핫해? 어느 집안 자제가 왔는데?”

“어느 집안 자제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서민······이었다가 이제는 벼락부자. 졸부쯤 되려나? 여하튼 그런 사람 있어.”

“벼락부자?”

보스턴에서 온 여자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재미있잖아. 졸부가 어떻게 사는지 보는 것도.”

“하아, 너 진짜 취향도 이상해.”

“여하튼 우리 동네에 놀러 왔으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뉴욕이 전부 너네 동네야?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친구의 계획을 거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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