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7. 노스탤지어
토요일 저녁, 언제나처럼 트럼프 빌딩의 유진 형제 자택에는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무리를 지어 찾아오고 있었다.
유진은 익숙한 태도로 얼굴을 알고 있는, 혹은 이날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멋진 저택에 멋진 파티로군요.”
방문하는 사람들은 먼저 집을 칭찬한다.
“요리도 훌륭하고, 풍경도 아름다워요.”
그리고 테라스에 마련해 놓은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며 원하는 요리를 들고, 센트럴파크를 내려다보며 파티를 즐겼다.
“이번엔 젊은 사람들이 많네요.”
“오늘은 제 대학 친구들을 조금 많이 불렀습니다.”
유진의 파티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윌리엄이나 블랙록 매니저의 지인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지인들이 끌고 온 전혀 낯선 사람들이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대개 이렇게 시작되는 법 아니겠는가?
유진도 파티를 즐겼다.
진심으로 즐길 수 있었다.
지난 삶에서 그의 주위를 맴돌던 그 끈적거리는 듯한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지긋지긋했던 결혼과 끔찍했던 이혼의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
“즐거운 파티로군요.”
새로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또다시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다.
“즐겁다니 다행이네요. 끌로에.”
“어머!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까 잠깐 인사드린 것이 전부인데요.”
“당연하지요. 끌로에처럼 반짝이시는 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오늘 이 황량한 집을 환하게 밝혀 주시고 계시는걸요.”
“참! 말을 꼭 프랑스 남자처럼 하시네요.”
그녀가 한참을 까르르 웃고는 말했다.
“벌써 고향이 그리우신 건가요?”
“음. 제가 프랑스에서 왔다는 것까지 말씀드렸었나요?”
“한눈에 봐도 프랑스 사람인걸요. 아마도 남부 프랑스? 니스? 툴롱? 아니······ 아를?”
“툴롱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요? 날 알고 있었나요?”
“오늘 처음 보는 게 틀림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날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죠?”
“어쩌면 지난 삶에서 우리가 연인이었는지도 모르죠.”
사실이다.
단지 지난 삶이란 것이 유진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풉! 진짜 프랑스 남자 같아요.”
끌로에가 웃는다. 유진은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냥 돈만 많은 분인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보는 끌로에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그러고 보니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끌로에도 꽤나 매력적이다.
“제가 가진 돈보다 보여 드릴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요.”
“진짜······ 어, 음······.”
끌로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좋다.
“이상하네요. 진짜 당신이랑 알던 사이 같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우리 언젠가는 연인이었던 것 같죠?”
“자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가슴이 두근거리잖아요.”
“내 가슴은 아까부터 두근거리고 있었어요.”
“피! 능글맞아. 그래도 싫지는 않네요.”
끌로에의 말에 유진이 미소지었다.
“다행이죠, 우리? 서로 맞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맞아요.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당신이 부자만 아니었으면, 제가 먼저 대시했을 거예요.”
“부자라서 싫으신가요?”
“네. 싫어요. 킥!”
끌로에가 웃었다.
“부자한테 달라붙는 여자로 보이는 것도 싫고, 부자랑 사귀는 것도 싫어요. 뭐랄까? 너무 스릴이 없잖아요? 전 굉장히 진취적인 사람이거든요. 앞으로 내게 다가올 역경을 하나씩 하나씩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부자 남자 친구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거 아니에요?”
“음, 독특한 인생관을 갖고 계시네요. 저도 끌로에가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그런 관계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죠. 그럼 우리 그냥 친구는 어떨까요?”
“친구요? 뭐, 그 정도라면. 대신 우리 로맨틱한 관계는 절대로 가지 않기로 해요.”
“자신은 없지만 약속은 드릴게요.”
유진도 사실 그녀와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끌로에와의 로맨스는 한 번으로 족했다.
지난 삶에서 유진은 끌로에와 한동안 동반자로서 살아가 본 적이 있다.
젊은 시절처럼 지독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성숙한 어른의 교감을 나누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진과 끌로에는 서로를 존중했고 애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함께하는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함께하고 두 해 만에 두 사람은 큰 다툼없이 아주 우아하게 헤어졌다.
그 뒤로는 가끔 어울리며 상대를 배려하는 친구의 관계를 이어갔다.
만일 유진이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노년이 되어서까지 그런 관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잠시 더 끌로에와 대화를 나누다가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 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진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끌로에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정말 앞으로 그녀와 좋은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 다시는 끌로에를 편안하게 마주할 수 없는 걸까?
“진짜로 파혼한 약혼녀 생일이랑, 당신 생일이랑 조합해서 번호를 찍은 거예요?”
유진에게 새로 말을 걸어온 여자는 무척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보통은 물어보지 않을 질문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던졌다.
“맞아요. 그럴 때 있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
유진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파혼은 왜 한 거예요? 그 여자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요? 당첨되고 난 후에요.”
“예지야, 그만해. 난처하시잖아. 그런 질문드리면.”
그녀 옆에 있던 여자는 훨씬 더 상식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가? 기분 나쁘셨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헤헤!”
질문을 던진 여자는 예지라고 했다.
윌리엄이 자신의 학교 후배라며 아까 소개해 준 것이 기억났다.
“괜찮아요. 솔직한 게 뭐 나쁜 일도 아니고. 하지만 파혼의 이유 같은 것은 대답 드리지 못하겠네요. 두 사람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원래 딜러 같은 거 했었어요? 파생으로 굉장히 돈을 벌었다면서요?”
그녀의 호기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딜러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투자를 해 보기는 했었죠. 또 회사 다닐 때 하던 업무가 금융 쪽과 관련이 많아 관심을 두고 있기도 했었구요. 그래서 손에 돈이 들어온 김에 한 번 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투자를 한 거죠.”
“회사 다니셨구나. 어디 다니셨어요?”
유진에게 관심이 상당히 많은 여자였다.
하기는 여기 놀러 오는 사람 중에 유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명성상사에 다녔어요.”
“명성이요? 어? 유정아, 명성이래!”
그녀가 자기 친구를 바라보고는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셨네요.”
유정이라는 친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회사죠. 그런데 잘렸어요.”
“네? 왜요?”
“글쎄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네요. 미국에 와 있는데, 갑자기 보고타로 전출을 가라더군요.”
“보고타요? 콜롬비아? 거기는 왜요?”
예지라는 친구가 더 놀란다.
“거기 위험한 곳 아닌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자르고 싶은데, 해고가 어려우면 그렇게 남미나 아프리카의 위험한 지역으로 발령을 내는 경우가. 알아서 나가라는 거죠.”
“세상에······.”
“어쩜!”
두 여자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명성이 그런 회사였어?”
“진짜 너무해.”
“참. 두 분 다 뉴욕대에 다니고 계신가요?”
“아뇨. 저만 뉴욕대요. 얘는 하버드고요.”
예지가 자기 친구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그럼 보스턴에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네. 오랜만에 예지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내일 돌아가려면 오늘 하루 알차게 보내야겠어요.”
“그러니까요. 내일 오후 5시 버스 예약해 놓았으니까, 이제 20시간도 안 남았어요. 잠잘 시간도 없이 놀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왜 버스를 타고 다니냐고.”
“뭐. 어때? 그게 제일 싼데. 운이 좋아서 30불짜리 티켓 끊었단 말야.”
유정의 말에 예지가 고개를 내젓는다.
“진짜 못말려. 참! 근데 이 집 꽤 멋지네요. 인테리어를 굉장히 신경 써서 해 놓았어요.”
“그런가요?”
“네. 아르데코를 가미한 고풍스러운 세련미가 일품이에요. 음······ 20세기 초반 미국에 졸부들이 넘칠 때의 그 화려한 느낌이 잘 살아 있어요. 응? 그러고 보니 그쪽이랑 잘 어울리네요.”
“예지야!”
거침없는 말에 친구가 깜짝 놀라 이름을 불렀다.
“응? 왜? 아! 졸부? 졸부가 어때서? 자기가 벌어서 이룬 부인데. 누구처럼 물려받은 부보다 더 낫지.”
예지라는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그런 표현을 막 쓰면 어떻게 하니?”
“음, 제가 좀 실례였나요?”
“실례이기는 하죠. 그래도 일반적으로 졸부라는 표현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으니까요.”
유진이 살짝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미안해요.”
뭐라고 하니 나름 사과를 하기는 한다.
“후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유정은 친구에 비하면 훨씬 일반적인 사람이었다.
“참! 저기 갖다 놓은 거는 뱅크시 건가 봐요?”
그녀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벽에 걸어 놓은 그림을 가리켰다.
“네. 뱅크시의 그림들이 지닌 사회적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서 모으고 있어요.”
“뱅크시? 너무 젠체하지 않아? 꼭 자기만 세상을 아는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것 같던데.”
예지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비아냥이라.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 그래도 그가 던지는 화두가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잖아?”
“의미가 있기는. 그냥 자기 이름값 올리려고 퍼포먼스나 하는 거지. 자본주의 비판은 무슨.”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상당히 권세 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나, 천둥벌거숭이같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모양이다.
잠시 그녀들과 대화를 더 나누다가, 다른 손님과의 대화를 기회 삼아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유정이라는 여자가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
“죄송해요. 제 친구 때문에 마음 상하셨죠?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런 걸로 마음 상할 나이도 아니고, 친구의 잘못을 대신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참. 저도 뱅크시 좋아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꽤 멋진 작가죠?”
두 사람은 잠시 뱅크시의 그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전에 대화하던 그 멋진 여자분과는 어떤 사이에요?”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아! 두 분처럼 오늘 처음 방문하신 분이에요.”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분이시던데. 당신, 그녀한테 반했죠?”
“네? 하하, 글쎄요.”
“둘이 눈에서 막 불이 튀는 거 같았거든요. 어때요? 맞죠?”
“그랬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사귈 것 같았어요.”
“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 같아요.”
“왜요? 두 사람 굉장히 잘 어울리던데.”
“어울린다고 꼭 사귀라는 법이야 있나요. 그리고 정말로 잘 어울리는지 알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죠.”
끌로에와 그걸 알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런가요? 난 첫눈에 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이제 겨우 스물을 지난 나이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유진처럼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 첫눈에 반한다든지, 불꽃처럼 사랑에 빠진다든지 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첫눈에 반하는 것은 정말로 로맨틱한 일이지요. 그런 사랑도 굉장히 멋있구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잘 안 돼요.”
“흐음······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아저씨 같네요.”
유정이 묘한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이방카 트럼프가 찾아왔다.
“한국에 다녀오셨다면서요. 가족과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트러블 메이커와 관종으로 자신들을 이미지메이킹하고 있는 트럼프 일가는 사실은 굉장히 건전한 생활을 하며,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아마도 가장인 도널드 트럼프의 영향 때문이리라.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은 절대로 손도 대지 않으며, 자식들을 아꼈다.
그러니까 정치 경험 따위는 전혀 없는 아들과 딸을 백악관의 실권자로 만들 정도로 말이다.
“네. 부모님을 뵙고 좋은 시간을 보냈죠.”
잠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방카는 그동안 준비한 자신의 사업에 투자 유치를 위한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해에 7,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어요. 영업 이익은 500만 달러 규모이고요. 런칭한 지 겨우 3년째에 그 정도면 굉장히 성공적이지요.”
“그렇군요. 그런데 매출의 대부분은 주얼리에서 나오는군요. 그다음이 핸드백과 신발. 의류는 가장 매출이 적네요.”
“네. 브랜드의 밸류가 아무래도 고급스러운 이미지이다 보니, 니만 마커스나 노드스트롬 같은 최고급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주얼리의 매상이 높아요.”
이방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값을 자랑했다.
“제가 보기에는 의류 사업도 꽤 유망해 보이는데요. 핸드백이나 신발도 그렇구요.”
“역시 안목이 있으시네요. 아직은 성장 단계이지만, 이방카 트럼프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앞세우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가격대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저도 그럴 것 같군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5천만 달러에 15%의 지분은 무리에요.”
역시 부친처럼 협상의 룰을 아는 여자였다. 최대한 크게 부르고 차츰 낮춰 주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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