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29. 허슬(Hustle)
유진은 유가 선물이 65달러에 이르면서 윌리엄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다.
“이제부터는 제 수익에 대해 외부에 알리는 것을 당분간 멈춰 주세요.”
대양과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다. 그걸 위해서는 당분간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죠. 관련자들에게 전부 발설 금지를 지시하겠습니다.”
“당신의 제안, 받아들일게요.”
이방카 트럼프가 라이센스 계약에 합의했다.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솔직히 조건이 너무 후하지 않아요?”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야 이방카가 진심을 드러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부친인 도널드와 이방카 두 사람······ 아니, 트럼프 패밀리의 굉장한 팬이거든요. 그러니까 마케팅의 문제이지, 트럼프 가문의 브랜드가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경멸을 받기도 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열렬히 환호하게 될 것은 두말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기쁘군요.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언제 두 분 한번 만나 보지 않겠어요?”
“저야 환영이죠. 도널드와 이방카 트럼프의 사인을 받는 게 꿈이었다니까요. 오늘 여기 이방카의 사인을 받았으니 꿈의 절반은 이뤘네요.”
이방카의 사인이 적힌 계약서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알았어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죠. 초대에 꼭 응해 주실 거로 믿겠어요.”
이방카는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이후, 유성은 대표로 있는 슈팅 스타의 자회사로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이라는 이름의 신설 법인을 설립했다.
“이제 제법 그룹 느낌이 나는군.”
슈팅 스타는 이제 성진정공, 퓌클러 짐머만 정밀 기계 개발,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 세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어엿한 그룹사가 되었다.
솔직히 슈팅 스타라는 이름은 다시 봐도 너무 촌스럽다.
하지만 큰 상관 있을까?
어차피 이방카 트럼프도 그렇게 세련된 이름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정말로 저 여자 이름에 1년에 1,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어?”
유성이 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연하지. 너도 곧 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될 거다.”
“끄응······ 뭐. 형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유성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다.
유진은 그동안에도 주기적으로 재혁과 만나 우정을 쌓아 갔다.
“대양에 대한 자료 더 있으면 줘 봐. 내가 기획 기사 하나 꾸려 볼게. 제대로 쓰고 데스크에 던져서 안 올려 주면 내가 진짜 들이박아 버린다.”
재혁이 호언장담을 한다.
“그렇게 해 줄래? 진짜 고맙다.”
“고맙기는.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유진은 그동안 유성이 인터넷 등지에서 찾아놓은 자료를 넘겨 주었다.
재혁이, 아니 대양이 그걸 원하는 이유야 뻔하다.
성진정공과의 소송전에서 상대가 들고나올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법무 사무소에서 취합한 진짜 자료는 넘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터넷에서 모은 자료에만 해도 대양의 악행에 대한 증언은 차고 넘쳤다.
사실 대양뿐 아니다. 대기업들 대부분이 협력 회사와의 관계에서 다양한 종류의 갑질이나 핍박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생활비에 보태 써라.”
유진은 천 달러짜리 몇 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슬쩍 건네주었다. 재혁이 뉴욕에 온 뒤로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선물이다.
“아니, 뭐 매번 이런 걸 주니. 미안하게.”
“특파원 생활이 겉보기처럼 화려하지 않은 거 다 알아. 뉴욕 물가가 좀 비싸니? 돈 아낀다고 맨날 샌드위치나 사 먹지 말고, 몸보신 좀 해.”
“그렇게 말하면······ 고맙다.”
재혁은 언제나처럼 슬쩍 사양의 빛을 비추다가 손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12월 초, 다산전자와 대양전자가 동시에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를 인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가 미국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갔다.
유진이 알기로는 다산에서 벌인 일이다.
대양에서야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계약 체결 이후에나 터트려 주가 부양의 이득을 보려는 계획이었지만, 다산은 프리스케일을 둘러싼 경쟁을 격화시켜 대양이 손을 떼게 하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에 인수하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의 경제 신문에서 시작된 기사는 몇 시간 만에 한국 포탈에도 퍼졌고, 곧 온 나라가 다 알게 되었다.
그동안 다산 그룹의 인수 실무진은 프리스케일의 협조를 받아 실사를 통해 인수 가격을 산정하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가격 산정이 되면, 그때부터 인수의향서를 내고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그런데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는 상장 기업이 아닌 탓에 매수 가격 산정이 어려운 모양이다.
원래는 모토로라에서 분사된 주식회사였지만, 지난 2006년 사모펀드 컨소시엄이 주식을 전부 인수해 버린 뒤로 시중에 나도는 주식이 없는 상태다.
그러니 주가라는 가치 판단의 근거가 없다.
이런 경우 매출과 순익, 그리고 시장 점유율과 성장 가치, 조직 문화, 브랜드 가치 등 평가해야 할 사항이 무척이나 많았다.
“우리 쪽에서는 180억이 마지노선이라는군. 그것도 솔직하게 말해 경영권 프리미엄을 30억이나 주는 거야.”
12월 말, 다산전자 김수호 부사장이 예비 입찰 가격을 알려 주었다.
이걸 기준으로 두 회사 간의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프리미엄이 그리 후하지는 않군요.”
보통 유망한 기업이라면 적게는 20%, 많게는 100% 이상의 프리미엄을 지불하기도 한다.
2006년 프리스케일이 사모펀드에 팔려 나갈 때만 해도 13달러짜리 주식을 무려 30달러에 매수했으니 프리미엄이 130%나 되었다.
물론 그렇게 큰 프리미엄을 주고 8년 동안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계륵 같은 물건이었다.
180억 달러를 투자해 8년이 지났으니 적어도 360억 달러에는 팔아야 간신히 적절한 수익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도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겨우 150억 달러에서 180억 달러 사이에 불과했다.
“단순히 평가 절하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 자금 사정도 생각해야지.”
그래도 다산은 나름 진지하게 인수를 고민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그리 알고 있게.”
“알겠습니다.”
보통의 인수 제안에 비해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양이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산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산과 대양, 두 거대한 그룹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프리스케일을 인수했던 블랙스톤은 이 기회에 악성 재고를 털어 버리려 다산과 대양에 경쟁 입찰을 통고했다.
2월 중으로 두 기업에게 입찰 금액을 제시받고 우선협상자를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미국과 한국의 언론에는 대양과 다산의 치열한 입찰 경쟁에 대한 보도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새로운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 대양과 다산의 경쟁은 점입가경
- 대양그룹, 프리스케일 인수가를 200억 달러로 생각해
- 대양과 다산의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익명의 다산전자 관계자에 따르면 프리스케일의 가치는 적어도 220억 달러에 달한다고 말해.
- 한국 반도체 3위 대양전자, 프리스케일 인수로 새로운 활력을 얻나?
- 2위와 3위의 치열한 경쟁. 제일전자는 과연 어떤 대안을?
아마도 처음에는 다산 그룹과 대양 그룹이 약간의 소스를 퍼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언론은 언제나처럼 근거도 없는 소문을 만들어 퍼트리기 시작했다.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뜬금없이 제일전자를 끌어들이기도 하고, 인텔이나 TSMC 등 반도체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전혀 상관없는 이름까지 거론했다.
그 와중에 언론이 거론하는 프리스케일 인수 가격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어때? 다산전자가 프리스케일을 인수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리고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재혁의 방문이 잦아졌다.
물론 다산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내려는 목적이다.
“어. 대양전자 때문에 더 난리야. 단순히 반도체 문제가 아니라 자동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라서. 대양이 프리스케일을 가져가면 굉장히 곤란한 모양이야.”
“하기는······ 대양이나 다산이나 서로 빼앗기면 굉장히 곤란하겠어. 그런데 다산은 요즘 자금이 달리지 않아?”
“그런 것 같더라. 하지만 제일 위쪽에서 의지가 너무 강해. 신주를 발행해서라도 반드시 인수할 생각인 모양이야.”
“프리스케일 몸값이 꽤 올랐어. 정말 다산이 230억을 쓴대?”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그만큼 절박하니까.”
“이야······ 역시 경쟁이 붙으니 수십억 달러가 금세 뛰네.”
“그렇지 뭐. 그게 자본주의 아니겠어?”
“참! 대양중공업에 대한 기사는 열심히 쓰고 있어. 그런데 아무래도 미국에 나와 있으니 자료라든지 취재에 난점이 많아. 제대로 쓰려면 시간이 걸릴 거 같다.”
“괜찮아. 부담 갖지 말고.”
대화가 끝나고, 유성은 언제나처럼 용돈을 찔러 주었다.
재혁이 해 줄 일에 비하면 이런 용돈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무슨 일로 그렇게 얼굴이 어둡냐?”
어느 날, 평소처럼 유진의 저택에 들른 재혁은 거실 한쪽의 바에서 축 처진 어깨로 술을 마시고 있는 유진에게 물었다.
“어. 좀 그래.”
유진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뭔데? 한번 말해 봐. 내가 도움이 될지 알아?”
“하아······ 망했다.”
“망해?”
“어. 선물 말이야. 유가가 이제 떨어질 만큼 떨어졌구나 싶어서, 포지션을 바꿨는데······ 그게 참나······.”
“어? 유가 계속 떨어졌잖아?”
“그러니까······.”
“얼마나 넣었는데?”
“레버리지를 풀로 당겼어. 5달러만 반등하면 서너 배 정도 먹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유진은 판돈을 모두 날려 버린 도박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다 날린 거야?”
“다는 아닌데, 거의 다나 다름없어. 이러다가는 내년에 여기 빼야 할지도 몰라. 제길······.”
유진은 거칠게 위스키 잔을 비웠다.
“어쩌냐? 그렇게 큰돈을······.”
“음······.”
유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위스키 병을 들어 잔에 따르고 거칠게 한 잔을 비워 버렸다.
재혁은 옆에서 멀뚱멀뚱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날 길이 없는 것은 아냐.”
유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 뭔데?”
“지난번에 칼라일 그룹과 계약한 프리스케일 지분 인수권이 있어.”
“프리스케일 지분?”
“어. 칼라일 그룹이 프리스케일 지분 17%를 가지고 있거든. 그걸 내가 인수하기로 했어. 계약금으로 5,000만 달러를 냈지. 생각해 보니 신의 한수였어.”
“17%면 굉장히 많은 거잖아? 그걸 얼마에 인수하기로 한 거야?”
“프리스케일 가치를 180억 달러로 인정하고 30억 6,000만 달러에다가 프리미엄 4,000만 달러를 추가해 31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지.”
당시는 대양그룹에서 150억 달러를 제시하고 협상에 나선 상황이었다. 31억 달러면 칼라일그룹으로서는 무척이나 매력 있는 가격이었다.
“31억 달러? 그거 너무 큰 금액 아니야?”
“물론 크지.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걸로 봐서는 다산이 적어도 240억은 지를 거 같아. 대양과 다산의 경쟁이 치열해진 때문이야.”
“그러면 다산전자랑 같이 일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
재혁은 그동안 보인 유진의 행동을 이해했다.
자기가 가진 프리스케일 지분 17%를 비싸게 넘기기 위해 그런 것이다.
“당연하지. 이제 다 된 건데 말이야.”
“하지만 31억 달러라니······ 그 큰돈을 어디서 구해.”
“그러니까 문제지. 원래라면 거의 된 거였는데······ 제길, 거기서 더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유진이 들고 있던 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내리쳤다.
질 좋은 크리스탈 위스키 잔은 그래도 깨지지 않는다.
“그런데 잘하면 될 거 같아. 어디서 물주 하나 물면 되지. 지금으로서는 거의 41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계약이야. 31억 달러를 내고 41억 달러를 벌 기회를 누가 거절하겠어?”
“그렇구나······.”
재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문제는 잔액을 지불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야. 끄응.”
“얼마나 남았는데?”
“1월 말까지.”
“1월 말까지 31억 달러를 구해야 한다고?”
“어. 어떻게 하든지.”
“그래도 다행이네. 물주만 잡으면 그래도 꽤 벌 수 있다는 말이잖아?”
“물론이지. 그거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유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위스키를 마셨다.
“이번에 선물로 굉장히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재혁이 신이 난 목소리로 보고했다.
- 얼마나?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을 전부 날렸다더군요.”
그렇게 말을 하는 재혁의 입은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 확실한 건가?
“네.”
재혁은 이어 유진에게 들은 프리스케일 지분에 대해 설명했다.
- 칼라일 그룹이랑 그런 계약을 했다고?
흠칫 놀라는 목소리였다.
“네. 31억 달러를 이달 말까지 지불해야 한답니다.”
- 그러면 아무 의미도 없군. 아니, 잠깐만. 그거 반드시 그 녀석이 써야 하는 건가?
“듣기로는 물주를 찾고 있답니다. 다산이 240억만 써도 41억 달러의 가치가 있으니, 10억 달러를 벌어들일 기회라고요.”
- 그래서 물주를 찾았다고 하나?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다산이 확실히 240억을 쓴다는 보장도 없고, 또 단시일 내로 31억 달러를 마련할 물주를 찾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 흐음, 그러면······ 알았네. 내일 다시 전화하지.
재혁의 통화는 그렇게 급하게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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