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30. 독배(毒杯)
“그래서 그 녀석이 프리스케일 지분 17%의 매수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냐?”
대양 그룹 총수가 물었다.
“네. 이건 우리한테도 꽤 큰 기회입니다. 만일 녀석의 매수권을 적당한 가격에 사들인다면 프리스케일 매수에서 꽤 큰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류성규는 열심히 자신이 설계한 내용을 말했다.
“제대로 확인은 한 거고?”
성규의 큰아버지가 물었다.
“네. 칼라일 그룹에 확인했습니다. 지난해 9월에 계약을 맺었다는군요. 칼라일 쪽에서도 꽤 난처해한다고 들었습니다. 다산이 뛰어들기 전까지 우리가 제시한 가격이 150억 달러 아니었습니까? 그 녀석이 180억을 인정하면서 냉큼 계약을 맺은 모양입니다.”
“보자······ 다산이 얼마를 지른다고 했다고?”
“제 정보원에 따르면 대략 240억 선인 모양입니다.”
“확실한 거냐?”
노인이 이번엔 자신의 첫째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김 회장의 의지가 강한 모양입니다. 다산전자뿐 아니라 다산자동차 산하 모든 계열사에서 각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240억은 몰라도 200억은 틀림없이 넘는다고 봐야 합니다.”
대양자동차 사장을 맡고 있는 회장의 첫째 아들이 대답했다.
“240억이라······ 그만한 가치가 있나?”
“우리 쪽도 프리스케일이 다산으로 넘어가면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240억은 몰라도 220억까지는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반도체 기업 하나 인수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양이든 다산이든 상대방에게 빼앗기면 자사 차량에 필요한 반도체를 공정하게 납품받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대양이 프리스케일 인수에 뛰어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본 자동차 업계의 경우 자동차 부품용 반도체에서 프리스케일과 함께 수위를 달리는 르네사스의 대주주가 도요타인 탓에 항상 도요타가 가장 먼저 물량을 배분받는다.
“다산에게 프리스케일을 빼앗기면 2, 3조 문제가 아닙니다.”
당사자인 대양전자 사장보다 대양자동차 사장의 얼굴이 훨씬 심각했다.
“그래서 성규 네 생각은 그 권리 증서를 사 와야 한다는 말이지?”
“네. 녀석이 지금 자금 부족으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걸 가져와서 우리가 250억을 써 내면, 칼라일그룹 지분만으로 12억 달러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룹의 자금이 아니라 비자금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확보한 지분이 얼마였지?”
노인이 둘째에게 물었다.
“프리스케일과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메디라이프에서 인수한 7%가 있습니다.”
대양전자 사장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이 대답했다.
“그때 좀 더 확보해 둘 걸 그랬어.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첫째가 책망하듯 말했다.
“그때 상황으로는 그렇게 큰 이익을 보기 어려웠으니까. 적정 가격이 150억에서 180억 사이니 투입할 자금에 비하면 겨우 은행 이자보다 나은 정도였잖수. 벌써 1년도 전의 일이오. 다산이 달라붙은 지금이랑은 사정이 다르지.”
둘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분을 좀 더 확보한 다음에 인수 가격을 부풀리자고 했잖아.”
“명분이 있어야죠. 명분이. 지금은 명분이 확실하잖소. 다산과 차세대 자동차,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 이거면 가격을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으니까. 그거 때문에 우리가 240억이니 하고 언론에 내놓은 것 아니요. 조용히 인수하고, 150억짜리를 250억에 샀다고 하면 얼마나 욕을 먹겠어요? 아니. 욕먹는 건 둘째치고 배임까지 걸고넘어질 수 있단 말이요. 장사 한두 번 해 봐요? 하필 정권이 바뀔 때라 눈치 보기 바빴잖소?”
첫째와 둘째가 기 싸움을 벌이며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전부 부친인 류 회장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기 위해서다.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들출 필요야 없지. 둘째야, 지금 우리 미국에서 돌리는 자금 중에 당장 30억 불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
류 회장이 두 아들의 싸움을 정리했다.
“운용 중인 펀드를 담보로 차입을 하면 가능합니다. 1월 말까지 권리 행사를 하려면 시간이 조급하니 빨리 결정을 지어야 합니다.”
둘째가 재빨리 대답했다. 더 이상 과거 일을 묻지 않으니 반가울 뿐이다.
“그 칼라일 그룹의 지분을 손에 넣으면 프리스케일 입찰에 여유가 있겠지?”
“네. 그걸 손에 넣으면 우리가 보유한 지분이 24%가 됩니다. 얼마에 사든 24%에 해당하는 커미션이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170억 달러를 인정하고 7%의 지분을 12억 달러에 매입했고, 그 녀석이 지닌 권리를 1억쯤 주고 가져와 칼라일에 나머지 30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면 총 32억 달러에 매입하는 셈입니다. 합해서 모두 44억 달러죠. 프리스케일을 240억에 인수한다고 치면 수익은 13억 달러입니다.”
“24%나 손에 들어오면 굳이 매입 가격에 얽매일 필요 없습니다. 250억을 주고 인수하면 수익이 16억 달러로 늘어납니다.”
성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렇지. 260억이면 무려 18억 4,000만 달러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둘째도 계산이 빨랐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는 대양 그룹에서 지불해야 하는 돈보다, 그걸로 자신들 주머니를 채우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 네 생각에는 해 볼 만하다?”
노인이 성규를 보며 물었다.
“어차피 입찰 가격은 우리 쪽에서 정합니다. 손해 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그 권리를 팔까? 그 녀석이 칼라일에서 그 계약을 맺고 다산의 프리스케일 인수에 협력한 걸 보면 그걸로 한몫 보려고 한 모양인데 말이지.”
첫째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선물로 손해가 큰 모양입니다. 그거나마 팔지 않으면 빈털터리가 될 테니 어쩔 수 없겠지요.”
“그래. 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에 사면 곤란해. 아무리 이익이 눈에 보여도 그 녀석을 살려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성규의 부친인 류근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제들 중 유진에게 가장 유감이 많은 것은 진행 중인 소송의 당사자인 그였다.
“물론 그 점은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도박하듯 투기나 하는 놈이라면 손에 다시 돈이 들어가도 얼마 못 가 또 빈털터리가 될 겁니다.”
성규가 다시 설득에 나섰다.
이건 그에게 아주 큰 기회였다. 그렇지 않아도 성진정공과의 분쟁으로 떨어진 조부의 신뢰를 되찾아야 했다.
“하기는. 미친놈이지. 선물에 50배 레버리지를 걸어서 10억을 태워? 훗!”
“한 번 돈맛을 본 놈은 다시는 절제 못 하지. 그 돈도 위험한 투기에 밀어 넣고야 말 거다.”
다행히 큰아버지들은 유진의 행동을 비웃으며 동의해 주었다.
“정말로 그렇게 큰돈을 손해 본 것은 맞고?”
성규의 부친이 다시 물었다.
“블랙록에 다니는 지인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정확하게 그 녀석이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고객 중에 선물로 크게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쪽은 한국과 달라 내부 정보를 쉽게 유출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렇지. 한국에서야 전화 한 통이면 그 녀석 어제 입은 팬티 색깔도 알아낼 수 있는데 말이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사위 중 하나가 우스개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가 가져오면 파는 쪽도 우리, 사는 쪽도 우리이니 완전하게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성규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 한동안 서로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 대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진이 갖고 있다는 권리 증서의 인수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오른손에 든 걸 왼손에 판다. 이것만큼 확실한 장사도 없지.”
성규의 말대로 그걸로 얼마나 수익을 볼지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대양 그룹 총수 일가 중 누구도 그런 눈먼 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 다들 성규의 안건에는 찬성인 모양이구나.”
노인이 입을 열자 다시 좌중이 조용해졌다.
“네. 아버님. 어쨌든 손해는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다산이 우리보다 높은 가격을 써 넣어 프리스케일을 가져간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20억 달러의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큰아들이 가족을 대표해 동의를 표했다. 이것으로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프리스케일도 손에 넣고, 20억 달러도 챙기는 게 가장 좋지요.”
그들은 회삿돈 240억을 넣어 12억을 버는 것보다, 260억 달러 이상을 넣어 20억 달러의 비자금을 챙기는 쪽을 선호했다.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기 위해 필요한 회삿돈은 남의 돈이지만, 확보한 지분을 통해 얻는 비자금은 자기들의 돈이었으니.
2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은 대기업 회장에게 있어서도 결코 쉽게 볼 금액이 아니다. 그것도 겨우 한두 달의 수고로 얻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 알겠다. 그럼 둘째 네가 이것도 함께 진행을 해 보거라.”
“네. 아버님.”
“성규. 넌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해냈구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네게 상이라도 하나 줘야겠다.”
대양 그룹의 주인이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프리스케일 건으로 20억 달러가 생기는 거야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친인 류 회장의 손에 들어가는 자금이다.
그 일로 가장 큰 덕을 보게 된 것이 류성규가 되었으니 다들 질투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 * *
“강유진 씨.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재혁에게 말을 흘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입질이 왔다.
“DL캐피탈의 제이슨이라고 합니다.”
어디에선가 전화가 걸려 와 받아 보니 낯선 사내가 자신을 소개한다.
유진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제법 규모 있는 글로벌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로 주로 아시아 쪽에 투자를 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몇 번 정도 투자로 큰 수익을 얻어 언론에 거론되고는 하던 회사였다.
유진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라 하기에 자택으로 찾아오라 했더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금발 머리 백인 남자가 방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초췌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한 유진이 물었다.
“칼라일 그룹에서 보유한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의 지분 매수 권리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요?”
유진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칼라일 그룹으로부터요.”
“흐음······ 그거 비밀로 되어 있을 텐데?”
“우리 업계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다 서로 떠도는 거지.”
“그래요. 있다면 어쩌려고요?”
“DL캐피탈에서 그 권리의 매입에 관심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제이슨이라는 남자가 물었다.
“음······.”
유진은 상대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에 살 생각입니까?”
“계약금으로 5천만 달러를 내셨다고 했죠? 9천만 드리지요.”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다 믿고 있는 얼굴로 제이슨이 당당하게 말했다.
“풋!”
유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가보세요. 문은 열려 있으니까.”
그리고 턱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어차피 이달이 지나면 한 푼의 가치도 없어지는 물건 아닌가요? 9,000만이면 원금 5,000만에 다시 4,000만 달러나 챙길 수 있는데?”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나가세요. 존, 손님 나가시니 배웅해 드려요.”
건장한 덩치의 존이 다가왔다.
“1억! 1억 달러까지 내겠소.”
제이슨이 다시 제안했다.
“그 돈 안 먹고 만다. 내가.”
유진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1억 2천! 여기까지가 우리 최종 제안이요.”
존이 다급하게 새로운 제안을 하는 제이슨의 몸을 잡고 현관으로 끌고 갔다.
다음날도 제이슨에게 연락이 왔다.
“얼마 낼 겁니까?”
전날보다 더 갈라진 목소리로 유진이 물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지요.”
전날보다는 훨씬 더 정중한 목소리였다.
“1억 5천을 드리지요. 어차피 우리 아니면 팔 곳도 없지 않습니까?”
“왜 없습니까? 그거 원하는 사람이 한둘일 거 같아요?”
유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시장에서는 프리스케일의 적정 가격이 180억 달러 정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말 180억 달러라면 당신이 날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설사 200억 달러라고 해도 칼라일 그룹의 지분은 34억 달러입니다. 31억 달러를 지불해도 차익은 3억 달러밖에는 되지 않으니, 그 정도면 결코 적은 돈은 아닐 겁니다.”
이번에는 차분하게 유진을 설득하려 한다.
“누가 200억 달러라고 그럽니까? 대양전자나 다산전자나 240억 달러까지 생각하고 있다는데.”
“그거야 소문에 불과할 뿐이죠. 실제 입찰가가 얼마가 될지는 그때 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궁금하면 입찰 날까지 기다려 보시죠.”
유진은 요지부동이다.
“2억 달러. 그 이상은 우리도 낼 수 없습니다.”
후하게 쳐 준다는 듯 제이슨이 말했다.
“관심 없다니까.”
“당신도 30억 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면 어차피 휴지로 변할 권리 아닌가요?”
“왜 내가 마련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정 안되면 다산에 갖다 팔아도 되지. 240억을 주고 살 거라면, 나한테 5억을 주더라도 그쪽 역시 5억의 이익인데.”
“당신이 다산의 프리스케일 인수를 돕고 있는 이유는 그 권리로 수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다산에서 그 사실을 알면 무척 불쾌하게 생각할 텐데요?”
제이슨이 마치 협박이라도 하듯 말했다.
“불쾌하려면 하라죠. 어차피 이익이 전부인데. 그쪽도 이득 나도 이득을 보면 그만 아닌가?”
자신이 가지고 온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자, 제이슨은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원하는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위에다 올려 허가를 받아 보겠습니다.”
“제이슨 씨가 결정권자가 아닌 모양이네요? 그러면 가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라고 해요. 존.”
제이슨은 이번에는 존이 끌어내기 전에 제 발로 나갔다.
다음날도 DL캐피탈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번에는 제이슨과 함께 머리가 희끗한 동양인이 찾아왔다.
“그쪽이 결정권자요?”
“그렇소. 리차드라고 하오.”
아무리 보아도 한국계로 보인다. 하지만 2세인지, 아니면 미국에 오래 있었는지, 완벽하게 뉴욕 악센트의 영어를 구사했다.
“그래, 얼마면 그 권리를 팔겠소?”
“얼마까지 낼 수 있습니까?”
“3억 5천. 이게 정말 마지막이오.”
초로의 남자가 결연하게 말했다.
물론 유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흥정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옆에 있던 제이슨이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텍스트를 보내고 읽었다.
유진의 고집 때문에 가격이 올라갈 때마다, 제이슨은 초로의 남자에게 슬쩍슬쩍 눈짓을 보냈다. 아마도 달리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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