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31. 286
“내가 두 손 다 들었소. 어떻게 그렇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게요?”
마침내 협상이 타결되고, 리차드가 한마디 했다.
“이걸 팔지 못하면 빈털터리가 된다고 들었소만,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 거요?”
“어차피 이걸 제값에 팔지 못하면 진짜로 빈털터리가 되니까. 기왕이면 재기하기 충분한 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처음부터 협상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사실 거래가 정말 파토 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이미 원하던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유진에 비해 상대는 이 건으로 얻을 이익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러면 오늘 바로 인수 절차에 들어갑시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그렇게 하죠. 나도 돈이 빨리 들어와야 좋으니.”
그렇게 유진과 리차드, 그리고 제이슨이 각기 변호사를 부르고, 칼라일 그룹에서도 사람을 파견해 달라 요청해 3자가 모인 가운데 유진의 권리를 DL캐피탈로 넘기는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럼 오늘 1억 달러를 유진 씨의 계좌에 입금하고, 이달 말까지 나머지 3억 5천만 달러를 입금하겠습니다.”
유진의 5,000만 달러짜리 권리 증서에 4억 5천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쓴 걸 보면, 이걸로 확실하게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권리 행사를 위해서는 나머지 30억 5,000만 달러를 추가로 입금해야 한다.
그러니 17%의 지분을 위해 모두 35억 달러를 쓴 셈이다.
DL캐피탈은 프리스케일이 적어도 210억 달러 이상에 팔려 나갈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물론 처음부터 유진은 답을 알고 있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지.’
유진은 대기업 사주 중 상당수가 해외에 자금을 돌리기 위한 사모펀드 따위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진출에 나선 지도 벌써 수십 년이다.
해외에 물품을 수출하거나, 수입하면서 중간에 생기기 마련인 자금을 한국으로 들여오지 않고 각국에 다양한 경로로 보관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어떤 사모펀드에 어느 기업의 비자금이 담겨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DL캐피탈이었군.’
이걸로 유진은 대양 그룹의 손이 닿은 곳이 DL캐피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대양 그룹에서 뜯어낸 4억 달러보다도 더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DL캐피탈 외에도 다른 기업이나 사모펀드가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 번에 30억 달러를 조달할 수 있는 사모펀드 따위가 몇 개나 더 있지는 않을 것이다.
“5천만 달러짜리 계약을 4억 5천만 달러에 팔았으니, 4억 달러를 벌었다는 말이지? 나. 참. 무슨 돈을 그렇게 쉽게 벌어?”
일의 전말을 지켜본 유성이 물었다.
“그러게. 생각보다 짭짤하네.”
유진은 대양 그룹이 얼마나 줄지 확신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쪽의 계산을 알아보기 위해 가격을 계속 올려 보았다.
이를 통해 확실하게 최소 240억 이상은 지를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욕심 많은 인간들이 겨우 2, 3억 벌자고 4억 5천을 쓸 리 없다. 적어도 자신에게 지불한 것보다는 많이 챙길 작정이리라.
“그런데 요즘 뉴스에 보면 프리스케일이 240억 이상에 팔릴 수도 있다던데? 그러면 지금 판 게 손해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240억에 팔리면 거의 10억 달러가 들어오는데. 하지만 입찰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사실 유진은 이미 입찰의 향방이 결정되어 있음을 짐작했다.
유진에게서 그걸 사 가고 그냥 날려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프리스케일을 인수한다면 대양전자가 어떤 꼴을 당할지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게 4월 달이었지? 말레이시아에 사건이 벌어지는 게.’
원래였다면 대양의 프리스케일 인수는 5월에나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산전자의 참여로 경쟁이 붙으며 거래에 우위를 점한 블랙스톤은 입찰을 2월로 앞당겼다.
“하기는······ 그럼 잘 판 거네. 불확실한 10억보다 확실한 4억이 낫지. 어쩐지 형답지 않지만 말이야.”
유성은 그저 형이 안전하게 4억 달러를 챙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2015년 1월에 들어서며 유가 선물은 54달러까지 주저앉았다.
10만 계약을 만든 75달러에서 무려 20달러 넘게 떨어지며 여기에서만 20억 달러라는 무지막지한 수익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선물에서만 총 23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건 유진이 한 투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헷징 계약을 맺은 은행들에서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윌리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가는 아직 선물 가격보다는 3달러 정도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보험의 권리 행사 가격인 50달러가 코앞이었다.
“각 은행마다 적어도 4억 5천만 달러를 토해 내야 하니 죽을 맛일 겁니다.”
“그렇게 큰 은행들이라면 4억 5천만 달러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분기에 4억 5천만 달러의 적자가 추가되는 거니까요. JP모건 체이스의 지난 분기 당기순이익이 40억 달러 수준일 겁니다. 4억 5천만 달러면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 분기 순익의 10%가 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은행들에게는 더 끔찍한 일이겠지요.”
그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이 2015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유진씨가 올 하반기에 오일 선물과 옵션으로만 벌어들인 돈이 그보다 많지요. 하하······.”
윌리엄의 입술은 웃고 있지만, 눈가는 떨리고 있었다.
“다섯 투자은행에서 총 22억 달러를 지급해야 합니다. 아마 지금쯤 담당자는 피가 마르는 심정일 겁니다.”
“그러겠네요. 유가 하락이 이제 좀 멈춰 줬으면 하는 심정이겠군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산유국들이 생산량을 줄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래도 어렵겠어요.”
“또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유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여하튼 50달러가 되는 순간 바로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은 몰라도 윌리엄에게는 유가 선물 가격이 50달러를 뚫는 순간까지 무척이나 긴장된 시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유진의 자택에서는 다시 사교 파티가 이어졌다.
보유하고 있던 프리스케일 지분을 대양에게 넘겼으니, 이제 패배자의 모습을 계속 가장할 필요는 없었다.
“얼굴이 환해졌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지?”
이날 파티에 초대받아 들른 재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잘 풀렸어. 지난번에 너한테 말한 프리스케일 지분 인수 권리를 제법 좋은 가격에 팔아서 한몫 챙겼거든. 그걸로 다시 유가 숏에 풀 레버리지로 땡겼지. 결국엔 내려갈 놈은 내려가는 모양이더라. 한 방에 지금까지 잃은 거 만회하고, 그때보다 두 배로 늘렸다.”
“두 배? 그럼 20억?”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면 넘을지도 모르지.”
“허어······.”
재혁은 감탄인지 질투인지 모를 묘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덕분에 구사일생했다야.”
유진이 재혁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덕분은 무슨. 내가 무슨 도움이 됐다고.”
제풀에 찔린 재혁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도움이 됐지. 내가 힘들어할 때, 내 하소연 다 들어줬잖아. 이국땅에서 힘들다고 말할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
“하하. 그래······.”
이마에서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재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받아. 너 주려고 사 놨어.”
유진이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어?”
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금색 시계를 보고 재혁이 다시 놀란다.
“롤렉스? 이런 걸?”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다마다. 당연하지.”
재혁이 활짝 웃으며 시계를 손목에 찼다.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가끔씩 내가 하는 말이나 들어 줘. 그거면 돼. 친구야.”
“그래, 고맙다. 친구야.”
두 친구는 서로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근데 계속 너랑 있지는 못하겠다. 손님들이 많아서. 알아서 적당히 즐겨라.”
용건이 끝난 유진은 다시 다른 손님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떴다.
“안녕하십니까. 팀 카렐입니다. 딜리셔스 캐피탈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유진의 사교 파티를 찾는 사람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펀드 매니저나 여타 금융계 인사들이다.
유진의 목적이 다양한 방면의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는 것에 있는 것처럼, 그들도 새로운 고객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맨해튼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사교 행사를 옮겨 다녔다.
“반갑습니다. 카렐 씨. 제가 견문이 부족해서 딜리셔스 캐피탈의 업무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저희 딜리셔스 캐피탈은 주로 보스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로 하이 리턴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이 리턴은 하이 리스크를 의미한다. 아마도 사모펀드보다는 헤지 펀드에 가까운 모양이다.
“하이 리턴이라, 마음에 드는군요.”
“그렇죠? 안전한 투자를 원하면 은행에 넣어 두는 게 제일이죠.”
“그럼 주로 어느 쪽인가요? 에너지?”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성 높은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주식, 채권·매크로, 퀀트, 크레딧, 원자재, 에너지, 필름······.”
“그렇군요.”
“그리고 저는 딜리셔스 캐피탈에서 필름 분야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오! 진짜 멋진 분야에서 일하시는군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언제 한 번 저희 상품에 대해 알려드릴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역시 자기 회사에서 하는 투자 상품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렇게 하죠.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유진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투자를 하든 하지 않든, 이런 인맥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어떤 일을 하려면 인맥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미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서보다 인맥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세계 금융의 수도인 맨해튼에서는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어디에선가 이런 사교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야 아직도 술집에서 여자를 부르고 폭탄주를 나누는 것과 골프장 회동이 가장 큰 사교 행사이지만, 미국의 경우는 다양한 사교 파티가 그 역할을 한다.
한국의 대기업 계열 종합 상사와 뉴욕의 글로벌 디벨로퍼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유진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유진도 자신의 멋진 저택에서 주기적으로 열고 있는 파티를 통해 차츰 인맥을 넓혀가고 있었다.
“다산전자와는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입찰 일자가 가까워지자 재혁이 점점 더 열심히 물어 왔다.
“어. 다산전자 차원이 아니라 김 회장의 의지가 굉장히 강한 모양이야. 절대 대양에 빼앗길 수 없다는 것 같아.”
“그럼 얼마 정도에 입찰할 거 같아?”
“적어도 240억을 넘기는 것은 확실해.”
“그렇게나 많이?”
예상보다 높은 금액에 재혁이 놀란 눈을 한다.
“대양에게 빼앗기면 꽤 곤란한 모양이야.”
“대양이 그렇게나 많이 쓸까? 대양전자 시가총액이 그 정도가 안 되는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니까. 대양이나 다산이나 단순한 자존심을 넘어 생존이 걸렸다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잖아.”
“하기는.”
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유진은 다산의 입찰 금액과는 별개로, 대양이 어느 정도 입찰 가격을 높게 정해 놓았으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사 간 칼라일 그룹의 지분에서 수익을 얻으려면 말이다.
2월 말,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의 경쟁 입찰이 있었다.
입찰 장소는 뉴욕의 블랙스톤 본사로 정해졌다.
거주 중이던 트럼프 빌딩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유진은 그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윌리엄에게 블랙스톤에서 정보를 입수하면 자신에게 알려달라 넌지시 요청해 놓았다.
- 프리스케일 경쟁 입찰의 낙찰자가 정해졌답니다. 대양전자입니다. 입찰가는 286억 달러입니다.
오후 3시가 넘어갈 무렵, 윌리엄에게 연락을 받았다.
“286억 달러?”
소식을 들은 유성이 깜짝 놀란다.
“엄청난 금액이네······.”
유진도 놀랄 정도의 고가였다.
‘어지간히 챙길 속셈이네. 13억 6,000만 달러인가?’
유진은 대양이 가진 프리스케일 지분이 17%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이네. 13억을 챙기자고, 회삿돈을 100억도 넘게 더 썼단 말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24%의 지분으로 무려 24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비자금을 챙길 수 있는 거래였다.
‘하긴 워낙에 그런 놈들이었다.’
사실 납득할 만한 액수이기는 하다.
IMF 때에는 무려 30조 원에 달하는 분식회계에, 100조에 가까운 부채로 대한민국을 침몰시킬 뻔했던 전력이 있는 재벌 그룹이다.
당시 정치권과의 어떤 협작을 통해서인지 국가의 막대한 보증으로 망하지 않고 살아나, 여전히 국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류 회장 일가의 탐욕을 유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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