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32. 래리 핑크
‘지금쯤 신이 났겠네.’
유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286억 달러면 너무 비싸게 준 거 아니야? 대양전자 시가보다도 높잖아?”
유성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비싸게 준 거 맞아. 뭐, 핑계를 대려면 억지로라도 댈 수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그날부터 언론에서는 다양한 분석 기사가 올라왔다.
“대양전자의 프리스케일 인수가 대양전자를 제일전자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하네. 제일까지 끌어오다니, 프리스케일이 수요가 많은 메모리 반도체도 아니고 말이야.”
신문 기사를 훑어 보던 유성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대양 그룹 정도에서 마음먹고 한 일에 딴지를 걸기는 어려우니까. 그리고 광고비도 많이 뿌렸을 테고.”
한국의 언론에 공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완성형인 미국의 경우 언론은 사설과 보도를 철저하게 구분하며, 적어도 보도에서만큼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철저하게 사주와 광고주의 입장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그래도 비판적인 기사도 가끔 있어. 다산과 대양의 과도한 경쟁으로 엄청난 국부 유출이 우려된다는 시선도 있다나······ 이걸 비판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너무 비싸게 준 건 맞잖아?”
“굳이 그런 걸로 대양 그룹과 맞서서 득이 될 건 없으니까. 우선 한국 기업이 미국의 반도체 기업을 인수한 것이 국위선양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데, 거기에 비판을 해 봐야 딴지 거는 걸로 여겨지기나 할걸.”
“다산전자는 200억 달러 미만으로 입찰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진짜야?”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비공개 입찰 경쟁의 경우에 탈락한 쪽에서 승리한 쪽을 비난하기 위해 일부러 자기는 엄청 낮은 가격을 써 냈는데, 저쪽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 갔으니 멍청한 짓을 했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흘리고는 하지.”
“하기는. 나 같아도 그러겠다.”
하지만 그날 유진은 다산전자 김수호 부사장과의 통화를 통해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번 인수 건은 참 웃기게 되었어. 286억 달러라니. 배포가 큰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김수호 부사장의 목소리는 그다지 통쾌해 보이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대양전자가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게 되었지만, 그보다 불편함이 큰 모양이다.
- 빼앗기고 나니 오히려 더 아쉽네. 우리도 이번에 풀로 땡겨서 질러 봤는데 말이지. 243억을 질렀는데 설마 대양이 그것보다 높게 쓸 줄이야.
“아쉬우시겠군요.”
- 그래. 빼앗기고 나니까 더 탐스러워 보이는 거 있지 않나. 허허.
“그래도 286억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맞아. 아무리 프리미엄을 후하게 줘도 그건 너무 심했어. 처음 286억 달러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 이 자식들이 미친 건가 싶었지.
“그걸로 수익을 남길 생각인 모양이더군요.”
유진은 자신이 보유하던 칼라일 그룹의 지분을 DL캐피탈에 넘긴 사실을 말했다.
- 흐음······ 하지만 DL캐피탈이 대양 그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칼라일 그룹의 지분 매입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부사장님, 그리고 다른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칼라일 그룹에서 누설했다는 가능성뿐인데, 그쪽이 그런 일은 또 철저하거든요. 소송으로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입조심해야 하는 게 몸에 배어 있으니까요.”
- 그 다른 한 명이 대양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13억 6,000만 달러 먹자고 100억 달러나 더 썼다는 말이야? 하! 역시 그 양반답군.
김수호는 대양 그룹의 총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건 그렇고, 4억 달러면 이번에 아주 크게 한몫 보았군. 하하.
“예. 덕분에 제법 쏠쏠하게 수익이 생겼습니다.”
다산이 끼어든 덕분에 프리스케일 인수가가 올랐으니, 다산의 덕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 그럼 부부가오 치처 건은 이걸로 퉁 치는 걸로 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만큼, 다산 측에서도 유진이 칼라일 그룹의 지분으로 4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프리스케일을 손에 넣은 대양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가 훨씬 더 걱정인 모양이다.
“너무 높은 가격에 인수를 했으니, 틀림없이 탈이 날 겁니다.”
- 우리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네. 하지만 대양 그룹의 저력이라면 시간이 걸려도 소화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우리 쪽에서 대책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어. 프리스케일을 대신해서 안정적으로 반도체를 납품받을 곳을 찾아야 하니 말이지.
“설마 다른 회사 인수를 고려하고 계시는 겁니까?”
- 그것도 한 방안이지. 여하튼 서울에 오거든 한 번 들러 주게나.
김수호는 속이 쓰린 모양인지 통화를 계속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유진도 그 정도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위로를 해 준다고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양의 프리스케일 인수가 재앙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일이 터지는 4월까지는 그냥 속이나 썩으라고 해 두자.
그리고 며칠 뒤에는 윌리엄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50달러를 뚫었습니다. 지금 각 투자은행과 권리 행사 협상 중입니다.”
“권리 행사에 문제는 없겠지요?”
몇 달 전에 들어놓은 헷징 보험이 이제 빛을 발할 차례였다.
“물론이죠. 액수가 크니 결제에 며칠이 걸리는지에 대한 조율이 필요한 정도입니다.”
윌리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아무리 블랙록에서 다양한 투자 상품을 다루어 온 윌리엄이라 해도, 한 방에 23억 5,000만 달러짜리 거래에는 침착하기 힘든 모양이다.
블랙록이라는 거물을 중간에 끼워놓은 덕에 아무런 문제 없이 헷징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사실 보험이라고는 하지만, 유가 가격을 놓고 투자은행과 유진이 벌인 한판의 도박이었고, 결국은 유진이 승리했다.
“이제 슬슬 청산하죠. 더는 자신이 없네요.”
유진은 앞으로도 유가가 몇 달러 정도 더 내려갈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닥이 가까워진 것은 틀림없다.
그 몇 달러를 더 먹겠다고,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럼 조금씩 청산에 들어가겠습니다. 옵션도 그렇게 할까요?”
“그러죠. 전부 청산합시다.”
“알겠습니다.”
딜러들은 시장의 흐름을 흐트러 놓지 않으며 차분하게 유진의 포지션을 정리해 나갔다.
그 주 주말, 유진은 다섯 달 동안 숨차게 달려온 레이스의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선물에서만 34억 5,472만 달러야······.”
유성은 보고서의 결과를 보고도 담담했다. 정확한 액수를 모를 뿐 대략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으니.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아니, 이해는 가는데 납득이 안 돼. 유가는 절반 떨어졌는데, 어떻게 1억 달러가 34억 달러로 변할 수 있지? 진짜 레버리지라는 게 무섭다.”
“그만큼 위험한 거니까. 한쪽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계약 수량을 늘려 가면, 약간의 반등으로도 그때까지 번 돈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도 있어.”
정상적인 투자가라면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유진은 얼마든지 그런 위험한 투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옵션에서는 13억 7,152만 달러. 여기에 헷징 보험금이 23억 5,000만 달러. 모두 합해서 70억 7,624만 달러라고······? 미친 거 같아. 근데 주식과 펀드에 넣은 1억 달러는 4.3%의 수익이란 말이지?”
“주식을 제법 잘 고른 모양이더라. 반년 만에 4.3%의 수익이면 아주 굉장한 거야. 윌리엄 윤이 안목이 있는 모양이야.”
안전 자산에 넣은 1억 달러는 1억 430만 달러가 되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형이 저지른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잖아.”
거기에 DL캐피탈에게서 받은 4억 5,000만 달러도 있다.
그것까지 해서 총 76억 3,000만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손에 들어왔다.
“한국 돈으로 8조 원이 넘어······ 진짜 대양중공업을 사고도 남겠다.”
“그 돈 주고 대양을 살 생각은 없어.”
“당연하지.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 주 주말에는 평소보다 거창하게 파티를 열었다.
팰리스 호텔의 외식부에 주문을 해서 가능한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고, 그동안 유진이 쌓아 놓은 인맥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유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찾아왔다.
“유진 씨, 오늘 제가 멋진 손님을 한 분 모셔왔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윌리엄은 살짝 머리가 벗겨진 중후한 장년의 사내를 대동하고 있었다.
“이런. 진짜 VIP를 모시고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제 누추한 집에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핑크 씨.”
유진이 활짝 웃으며 새로운 손님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늘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데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었군요.”
블랙록의 회장인 로렌스 더글러스 핑크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로렌스 핑크 씨를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래리라고 불러 주세요. 나도 유진이라 부르면 될까요?”
래리 회장이 친근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래리.”
“그동안 나도 유진을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요. 블랙록의 대표로서 유진 같은 우량 고객과는 인사를 나눠야죠.”
그러고 보면 래리 핑크가 들른 것도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다.
개인으로서 7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유치하고 있는 사람은 미국에서도 그리 많다 할 수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이번 거래가 끝난 뒤에도 그걸 계속 블랙록에 맡긴다는 보장 따위는 없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유진이 월스트리트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긴다는 사실이야 훤히 알고 있을 테니, 아무리 블랙록의 회장이라 해도 잠깐 얼굴을 비춰 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못 할 이유야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내는 수수료가 만만치 않죠?”
“맞아요. 유진 씨는 우리 블랙록의 VIP죠. 사실은 여기 윌리엄을 올해부터 VP(Vice President)에서 디렉터로 승진시키기로 했어요. 전부 유진 덕분이니, 유진에게 직접 알리고 싶어 왔지요.”
래리가 윌리엄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며 말했다.
“축하해요, 윌리엄. 이제 임원이군요.”
바이스 프레지던트는 약간의 실무진을 거느리는 중간 관리직. 디렉터면 하나의 부서, 혹은 한 국가의 지사를 맡는 임원급에 해당한다.
“감사합니다. 래리 회장님 말씀처럼 유진 씨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이 굴리는 자금이면 일본이나 홍콩 같이 지역 거점 국가가 아닌, 한국이나 대만 지사 정도에서 굴리는 자금에 버금갔다.
그러니 윌리엄의 승진이 유진 덕분이라는 말은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다.
“나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유진도 래리와 함께 윌리엄의 어깨를 감쌌다.
“참! 듣기로 유진이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면서요? 우리 함께 기념사진이나 찍을까요?”
거액을 맡긴 손님에 대한 서비스가 좋다. 아마 윌리엄에게 들었으리라.
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던 유성이 재빠르게 카메라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셋을 촬영했다.
“이번 투자는 대단했어요. 1억 달러로 시작해서 다섯 달 만에 70억 7천만 달러라니. 월스트리트의 전설 중 하나로 남을 겁니다.”
“무모하게 돌진한 게 운이 좋아 한방을 터트린 거죠.”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무모하게 돌진하는 사람이 금융계에 어디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유진 같은 놀라운 결과를 낸 사람은 200년 월스트리트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그렇게나 과한 칭찬을 해 주시니······ 이거 너무 좋네요.”
입에 발린 칭찬이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짜 월스트리트의 전설인 래리 핑크이니 유진으로서도 기분이 나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친밀감을 드러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성은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고, 그때마다 래리 핑크는 팔로 유진의 어깨를 감싸거나 렌즈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면서 적극적으로 모델 노릇을 해 주었다.
“앞으로도 우리 블랙록에서 유진의 투자에 좋은 파트너가 되고 싶군요.”
“물론이죠. 큰돈을 안심하고 맡기기에 블랙록만 한 곳이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다행히 래리와 유진의 이해가 일치했다.
“저도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그때, 세련된 외모의 여자가 유진에게 말을 걸어 왔다.
“가브리엘? 언제 왔어요?”
유진의 사교 파티에 가끔 나타나고는 하던 여자였다.
월스트리트 포커스라는 나름 영향력 있는 경제지의 기자라고 해서, 가능하면 편의를 봐 주고 있는 사이였다.
“나야 괜찮은데, 래리가 허락할지 모르겠군요.”
“물론 괜찮아요.”
유진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래리 핑크가 허락해 주었다.
가브리엘은 바로 핸드백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유진과 래리 핑크의 친밀한 모습을 몇 장 사진에 담았다.
“오늘 굉장한 소식을 들었어요. 유진이 엄청난 잭팟을 터트렸다면서요?”
사진을 찍고 나자, 가브리엘이 은근슬쩍 래리와 유진의 건너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예. 한 건 한 거 같아요.”
유진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50억 달러가 넘는다면서요? 이번 오일 하락장으로 본 이익이.”
“정확히는 70억 달러를 조금 상회합니다.”
유진은 자신이 벌어들인 액수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이쪽에서는 그게 정상적이다.
자신의 성과를 최대한 부풀려서 자랑하고, 명성을 얻는다.
명성은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성공을 보장하는 구조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