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34. look down
“그런데 리차드 한이라는 사람이 대양 그룹과 관련이 있어?”
대양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유성이 물어 온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어.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그저 심증에 불과하지만. 그러니까 뭔가 실마리라도 있을까 싶어서 의뢰하는 거고.”
“만약에 DL캐피탈과 대양 그룹이 연관이 있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거지?”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증거만 있다면 명백하게 배임행위지. 하지만 탐정 수사 정도로 그런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대그룹과 대형 사모펀드 사이에 얽힌 관계를 추적하는 것은 국가 기관이라도 나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유진에게 필요한 것은 대양 그룹의 사주 일가를 법정에 세울 만한 엄청난 증거 따위가 아니다.
약간의 근거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때 즈음, 아카데미에 요청해서 보디가드를 조금 더 늘렸다.
이제는 트럼프 타워와 블랙록만을 오가는 단순한 생활을 이어 가지 않을 것이니, 인원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이젠 거리를 나서면 모두 대여섯이나 되는 경호 팀이 유진 형제를 둘러싸고 있게 되었다.
“조금 어색한데······.”
자신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커다란 흑백의 덩치들 무리에 둘러싸여 걸어가는 것은 유성에게 너무 낯선 일인 듯했다.
“그러네.”
그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만큼 마음은 든든하다.
대양과의 전쟁이 더욱 격해질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튼튼하게 방비를 해야 했다.
새로 합류한 여덟 명은 모두 존과 로저와 친분이 있는 동료들이다.
열 명이나 되는 보디가드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두 형제의 안전을 지킬 것이다.
“다들 같은 전투에 한 번 이상은 함께했던 전우들이래.”
유진보다는 보디가드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유성은 새로 온 보디가드들과도 금세 가까워졌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두 명의 보디가드와 함께 짐에 다녀오던 유성이 물었다.
“탐정 사무소에서 온 자료.”
“어때? 원하던 증거는 찾았어?”
“대단한 내용은 없어. 아무래도 국제적인 금융 거래까지 파고들긴 어려운 모양이야.”
“아······ 그래.”
유성의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흘렀다.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야.”
하나 유진의 얼굴은 밝았다.
“뭔데?”
“그보다 우선 비행기 표 예매해야겠다.”
“어딜 가는데?”
“서울. 이번에는 같이 가자.”
그 주, 유진 형제는 한국으로 향했다.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었다.
이번에는 한동안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던 유성도 함께였다.
“그런데 롤스로이스는 너무 과한 거 아니니?”
유진의 부친이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서울에 들렀을 때 주문한 롤스로이스 팬텀이 출고되어 얼마 전부터 몰고 다니시는데, 아직 부담스럽고 어색하신 모양이다.
“이 정도는 타고 다니셔도 돼요. 형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데요. 그런데 주말에 저 한 번 몰아봐도 되죠?”
형인 유진과 달리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유성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표정으로 말했다.
“되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내 수준에는 지나쳐. 요즘 공장 운영해서 나오는 수익으로 롤스로이스 한 대 뽑으려면 몇 년은 걸릴 게다.”
“다산자동차에서 새로 수주 받으셨다면서요?”
그래도 유진을 썩 좋게 보았던지, 다산에서 굳이 사람을 보내 유진 부친의 공장에 제법 규모 있는 수주를 내어 준 모양이다.
“그래도 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되지.”
“슈팅스타 법인에서 자회사 대표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부담 가지실 거 없어요. 어차피 세금 처리도 해야 하니 쓸 때는 써야죠.”
사실은 안전을 위해서였다.
트럭과 부딪쳐도 안전한 승용차를 찾다 보니 결국 롤스로이스로 가게 되었다.
“맞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슈팅스타는 조금 촌스럽지 않냐?”
부친도 유성의 네이밍 센스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뭐가 어때서요? 임팩트 있잖아요.”
그걸 촌스럽다 느낄 정도였다면 애초에 그런 이름을 짓지도 않았을 테지.
“나도 요즘 그 큰 차 타고 다니니까 좋기는 한데 조금 민망하더라. 무슨 승용차가 마을버스만 하더라고.”
모친도 한마디 하신다.
국산 중형차를 몰고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남편과 똑같은 팬텀의 뒷자리에 앉게 되니 어색한 모양이다.
그것도 일반 롤스로이스가 아닌 EWB라서 길이가 정말 소형 버스만 하다.
이것 역시 안전을 위해서다.
유진에게는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아끼려고 덜 안전한 차를 타고 다니시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엄마도 익숙해져요. 아들이 이제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데.”
“그래도 그렇지. 그리 크지도 않은 집에 롤스로이스가 두 대나 서 있으니 조금 남사스러워.”
“그렇죠? 그러니까 빨리 이사 갈 집 좀 알아봐요.”
“이사 갈 집이라······ 차 때문이라도 이사를 가기는 가야겠다.”
“서울로 가실 생각은 여전히 없으신 거죠?”
잠자코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너희 엄마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렇지 싶다. 엄마 지인들이 다 여기 있잖니.”
“왜 내 핑계에요. 당신이 공장에서 너무 멀리 가고 싶지 않으신 거면서.”
“어. 음······ 그러니까.”
부친은 아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자신이 평생을 일궈 온 회사를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차라리 송도 쪽은 어떨까요?”
잠깐 고민하던 유진이 물었다.
“송도?”
“네. 공장이든 이 동네든 그렇게 멀지 않잖아요. 아니면 좀 널찍한 대지를 구해 신축할까요?”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지만, 이제 경호원이 상주하다 보니 복작거린다.
더군다나 두 대의 롤스로이스와 유진 형제를 위한 링컨 에스컬레이드까지 세울 주차장도 마땅치 않다.
주차장 때문이라도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아니다. 그건 좀······.”
“그래요. 차라리 송도로 가요, 우리. 거기라면 큰 차 몇 대 주차해도 눈치는 안 보이겠어요.”
결국 가족 회의는 송도에 대형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 가는 것으로 결정 났다.
내친김에 그것도 유진 형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처리해 버리기로 했다.
집에서 하루 푹 쉬고 나서 유진은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은 미국에서 오기 전에 연락해 놓았던 기자와 조용한 만남을 가졌다.
“미디어포커스 대표 기자 김상기입니다.”
미디어포커스는 지금까지 일련의 불법 해외 자금 유출에 대한 기사들로 명성을 얻은 탐사보도 전문 언론사이다.
2년 전에는 대기업 총수 일가와 전직 대통령 아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는 보도를 터트려, 국세청에서 관련자들을 조사하게 만든 이력도 있다.
지금의 유진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언론사이다.
미디어포커스의 성향과 보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꽤 갈리는 것 같지만, 유진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다.
“반갑습니다. 강유진입니다.”
“이야. 이렇게 대단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근데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네요.”
무척 열정적이고 정의감 넘친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어쩐지 조금 닳아 보이고, 능수능란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하지만 활짝 웃고 있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로 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이름있는 탐사보도 전문가다운 총기가 느껴진다.
“그래. 세계적인 부호께서 어떤 일로 저를 보시자고 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대양전자에서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를 인수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네. 너무 비싼 가격에 인수가 되어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 인수 건에 대해서 한 가지 제보 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요?”
김상기 기자가 흥미를 보인다.
“대양전자에게 인수되기 전, 프리스케일이 미국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블랙스톤 사모펀드라고 들었습니다.”
“블랙스톤을 포함해서 모두 여섯 곳의 사모펀드에서 자금을 부담했었지요. 블랙스톤은 대표로 운영을 맡아 왔구요.”
“그랬었나요?”
“네. 그리고 그런 사모펀드 중에는 칼라일 그룹도 포함되어 있었구요. 그런데 인수전이 한창이던 때에 DL캐피탈이란 곳에서 칼라일 그룹의 프리스케일 지분 17%를 인수했습니다. 무려 35억 달러라는 거금으로요. 프리스케일 가치를 대략 205억 달러로 인정한 금액이지요.”
“흐음······.”
김상기가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 본다.
“그리고 경쟁 입찰에서 대양전자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286억 달러라는 거액을 써 냈지요. 결과적으로 DL캐피탈은 한 달 사이에 13억 6,000만 달러의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거 굉장히 수상하네요. DL캐피탈이란 곳이 대양전자가 그렇게 큰 금액을 써 낼 줄 알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그렇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DL캐피탈에 비등기 이사로 재직 중인 리처드 한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사내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인데, 알아보니 실직적으로 DL캐피탈의 중심이라고 하더군요. 한국계 미국인인 리처드 한은 80년대에 대양 그룹에 근무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음······ 정말로 수상쩍군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명백하게 대양과의 관련성을 단정지을 수 없겠는데요.”
“물론이죠. 하지만 언론사가 검찰도 아니고, 명백한 증거가 필요한 적 있던가요?”
유진이 웃으며 물었다.
“하하. 맞아요. 우리가 경찰이나 검찰도 아니고 말이죠.”
김상기 기자는 조금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의 커뮤니티 칼리지를 나와 서울에서 대양 그룹에 근무하고 있어요.”
“뭔가······ 인질 같네요. 흐흐. 점점 더 재미있어지네요.”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대양 그룹과 DL캐피탈 사이에 있었던 수상쩍은 거래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좋아요.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한 기사가 나오겠어요.”
아무래도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모양이다.
유진은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기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미디어포커스 운영에 재정적인 문제는 없습니까?”
“재정적인 문제라면 아주 많지요. 힘 있는 사람들의 구린 것을 파해치니 적도 많구요.”
기자는 두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당당하던 태도를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치워 버렸다.
“약간의 후원을 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마치 청부 기사를 청탁하는 것 같겠지요?”
“아무래도 정당성에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기자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후원 문제는 차후에 논의하는 편이 낫겠군요.”
돈을 먼저 쥐여 주고 기사를 요구하기보다, 미디어포커스의 행태를 보고 나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사다.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의 후원이라니, 꽤 기대가 되는군요.”
상대도 납득한 모양이다. 더 열심히 대양 건을 파고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참. 여기 음식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네요. 이제 드시지요.”
“그럴까요? 평소 듣기만 했었지 직접 와 보기는 처음이군요. 과연 고급 호텔 음식은 때깔부터 다르네요. 흐흐흐.”
외국계 호텔의 레스토랑 별실에서 나오는 만찬은 훌륭했고, 협상은 더욱 만족스러웠다.
다음날은 유성과 함께 강남으로 향했다.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헤란로에 있는 한 빌딩 앞에 내려서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재빨리 다가오다가 존을 위시한 네 명의 보디가드 때문에 대여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반갑습니다. 지금 바로 볼 수 있나요?”
“물론이죠. 올라가실까요?”
어색하게 유진 주변의 보디가드들을 눈여겨보던 남자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빌딩 로비를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 이미 열려 있는 사무실로 들어선다.
두 명의 보디가드가 먼저 사무실에 들어가 내부를 확인하고, 다시 나와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나머지 사람들이 들어갔다.
“말씀드렸던 대로, 최상층을 깨끗이 비워 놓았습니다.”
벽과 인테리어는 그대로이지만, 가구를 전부 치워 휑하니 비어 있는 넓은 공간이 그들을 맞이했다.
유진은 대충 주위를 둘러본다. 어차피 여기를 자신이 사용할 것도 아니니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바닥 면적은 650평, 연면적 9,300평입니다.”
중년의 사내가 유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설명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사항이라 그냥 귓가로 흘려버리고, 창가로 다가섰다.
“저기 봐.”
유진이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게 대양 그룹 사옥이야.”
“저기 그 녀석들이 모여 있단 말이지.”
유성은 평소의 유순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타는 듯한 눈으로 형이 가리키는 빌딩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가 딱이야.”
유성이 이 건물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대양 그룹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다.
벌써 지어진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대양 그룹 본사 빌딩은 22층 건물이고, 유진 일행이 들어선 곳은 24층이다.
층고도 조금 더 높아 두 층의 차이지만, 대양 그룹 본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좋아. 멋진걸.”
“그래. 이제부터 여기가 슈팅스타 대표이사실이야.”
미국에서 이미 대리인을 시켜 계약까지 마쳤다.
건물의 소유주인 외국계 투자 회사에게 제안을 보내, 적정 시가보다 20%나 더 주고 구매하기로 했다.
1,800억 원이면 충분한 건물을 2,200억 원 가까이 주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테헤란로 대로변 대형 빌딩은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도 않는다는 점과 앞으로 이쪽 부동산의 가파른 상승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5, 6년만 보유해도 매입 가격의 두 배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국계 은행을 통해 80%의 대출을 받았으니, 유진이 당장 지불해야 할 대금은 440억 원뿐이다.
“진짜 쇼핑하는 것 같네.”
2,200억 원짜리 빌딩을 구경 한 번 하지 않고 사 버렸으니 유성이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아직 멀었어. 살 게 남았거든.”
“또 뭘 살 건데?”
“사람.”
“응? 사람? 사람을 산다고? 무슨 노예 무역이라도 한다는 거야?”
“설마 노예를 사겠냐. 인재(人材)를 산다는 말이지.”
유성의 발상에 유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그래. 인재······.”
유성이 어색하게 형의 말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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