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35. 리크루트
빌딩 매입 후 일주일 동안 가장 위층의 사무실을 빠르게 꾸미도록 지시했다.
그동안은 빌딩 중간층의 비어 있는 사무실을 임시로 사용했다.
“어서 와. 환아.”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유진이 가장 먼저 부른 사람은 함께 명성상사에 다니던 후배였다.
마침 대학도 같은 학교 같은 과 3년 후배라 나름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물론 친분만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지난 생에서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녀석과는 계속 연락을 이어 왔던 유진은 환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었다.
워낙에 영특한 사람인지라 동기들보다 빠르게 관리직으로 올라가더니, 20년 뒤에는 기어이 명성상사의 사장 자리까지 오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월급 사장의 한계는 명확해서, 몇 년 자리를 지키다가 젊은 나이에 경영자 수업을 받고 있던 그룹 총수의 혈육에게 자리를 넘기고 고문으로 물러나야 했었다.
그 뒤로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해, 제법 훌륭하게 이어가는 모습까지가 유진이 알고 있던 후배 김환이다.
“그래. 생각은 해 봤어?”
미국을 떠나기 전, 먼저 전화로 의향을 물어보았었다.
“물론이죠. 결심이 섰으니까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사표도 냈어요. 그러니까 선배님께서······ 아니지, 회장님께서 책임지고 써 주셔야 합니다.”
후배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고 힘차게 대답했다.
“아, 난 회장 같은 거 아니야. 내 동생이 슈팅스타 대표이사를 맡고 있어. 여하튼 고마워.”
“고맙기는 제가 오히려 더 고맙죠. 한국 제일가는 현금 부자가 하는 사업인데. 거기다가 스타트업이면 나름 창업 공신 아니겠어요? 이런 기회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다구요.”
“그래. 지난번에도 말했지? 슈팅스타······ 컴퍼니는 지주회사로, 다양한 사업체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거시적인 안목이 중요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능력이나, 이미 충분히 성숙한 회사를 관리하는 능력이나 어느 부분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친구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물론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킬 줄도 아는 후배라, 유진이 어려울 때 마음으로나마 도움을 주려 했었던 인품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니 한국에서 사업을 펼칠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김환이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물론이죠. 그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 우리 가족이 대양이랑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하기에 여러모로 껄끄러운 점이 있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환이 씩 웃었다.
“좋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적해야 할 상대가 있다는 거 말이에요. 재계 서열 3위의 대양 그룹과 전쟁이라니. 멋진걸요? 승리의 보람이 있겠어요.”
“그렇지?”
유진이 환을 염두에 둔 것은 녀석이 사회생활만 잘해서가 아니다. 녀석은 야망이 있고, 또한 천성적인 싸움꾼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해 보자.”
“넵! 동생분을 잘 보조해서 슈팅스타가 대양 그룹을 집어삼키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똑똑한 놈이라 유진의 의도를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그럼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우선은 리쿠르트. 일단 지주회사인 슈팅스타에서 일할 사람들은 너한테 맡길게.”
“역시 옛사람들을 전부 데려오는 건가요?”
환이 다시 웃으며 물었다.
“가능하겠어?”
유진 입장에서도 아무래도 손발을 맞춰 본 사람들이 편하다.
“선배도 나름 인망(人望)이 있으니까요.”
“내가?”
유진이 픽 웃으며 물었다.
“네. 그리고 거대한 자본은 인망보다 더 큰 매력을 지니고 있죠.”
“그래. 역시 세상은 자본이 제일이지.”
“적어도 우리 팀에서 절반 정도는 관심 있어 할 겁니다. 명성에서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이어가거나, 우리 회장님을 따라 부와 명성을 얻을 기회를 잡거나. 결국은 성향에 따라 다르겠죠.”
“꼭 슈팅스타에 오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말로 들리네?”
“선배가 8조 원을 벌기까지 겨우 여섯 달밖에 안 걸렸잖아요. 그건 그만큼 위험한 투자를 이어 갔다는 거고요. 솔직히 안정성 면에서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아요.”
환의 판단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우리들이 보기에 선배가 걷는 길이 그래요. 더군다나 상대는 천하의 대양 그룹.”
환이 또 한 번 씩 웃었다.
대양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렇게 번뜩이는 웃음을 내비친다.
“만일 실패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걸 각오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한테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볼 만하다 생각하는 친구들만 합류하겠지요.”
8조 원이라는 막대한 현금도 거대한 그룹과의 전쟁을 치르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유진이나 환이나 대기업에 몸을 담아 보았기에 그만큼 재벌 그룹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한 나라 경제의 정점에 오른 기업 집단이 지닌 힘은 단순히 그 기업의 주가로만 환산할 수는 없다.
적어도 수십여 년 동안 정치권, 법조계, 언론계에 뿌리를 내려온 장악력은 돈으로만은 계산할 수 없었으니까.
“좋군.”
그걸 알면서도 유진과 함께하겠다는 동료가 있다면, 적어도 지리멸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반이나 모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어.”
“절반은 충분해요. 선배.”
환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우선은 오 파트장님부터.”
“오 파트장님이요? 그건 조금 문제가 다른데요?”
그들의 상사였던 오 파트장은 임원급인 그룹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명성에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해야 할까?”
“솔직히 전선(戰線)을 늘리는 것은 그리 권장할 일은 아니죠.”
“그래서?”
“좋다는 거죠. 흐흐.”
유진은 환이 어떻게 대재벌 그룹인 명성의 주력 계열사인 상사의 수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지를 머리에 떠올렸다.
늘 저렇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녀석이지만, 그 천진한 웃음 뒤에는 치열한 투쟁을 갈망하는 야수가 숨어 있는 놈이다.
“그런데 어떤 사업부터 시작하나요?”
“많지. 아주 많아. 대양전자를 공략해야 하고, 전기자동차에도 손을 대고······ 그 외에도 자원이라든지, 엔터라든지, VC라든지, 끝도 없어.”
“그렇다면 우리가 기존에 하던 일과 그리 다를 것도 없네요.”
대기업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종합 상사는 대개 처음에는 무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패션, 건설, 자원 개발, 플랜트나 발전소 건설, 심지어는 무기 거래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취급하는 만물상 같은 기업이다.
심지어 고철을 수집하고 수출하는 일까지 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손대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우선은 패션 사업부터 시작해야 해”
당면한 과제는 이방카에게서 라이센스를 받은 패션 브랜드의 런칭이다.
“패션이라······ 상사 패션 파트 쪽으로도 좀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명성상사 또한 패션사업부가 있었고, 대기업에서 손을 대는 사업답게 사업 규모나, 브랜드 인지도가 수위를 달렸다.
“괜찮은 친구 있어?”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본래 인맥으로 살고 죽는다고 하는 상사맨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혁은 마당발로 유명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잘해 보자고. 김환 팀장.”
“아직 사표 수리 안 됐어요. 오 파트장님이 갖고 계셔요. 그러니까 슈팅스타 팀장 자리는 조금 미뤄 주세요. 겸직 금지에 걸리니까. 흐흐.”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음흉한 미소였다.
환이 명성상사 내부에서 슈팅스타로 이직할 동료들을 섭외하는 동안, 유진은 외부 인사 영입으로 바빴다.
“반갑습니다. 강유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아라에요.”
서른 중반의 여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현욱입니다.”
이제 갓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머나! 사진으로 본 거보다 훨씬 더 훤칠하시네요. 참 세상 너무 불공평하네요. 가질 거 다 가지신 분이 외모도 너무 우월하신 거 아니세요?”
사회 물을 제법 많이 먹었겠다 싶은 여자다.
“유아라 씨도 굉장한 미인이시네요. 옆에 계신 현욱 씨랑 아주 잘 어울리세요.”
“어머! 정말요? 현욱 씨. 우리 잘 어울린대.”
여자는 자기보다 대여섯은 어려 보이는 남자의 팔을 툭 치며 까르르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여자에 비하면 꽤 무뚝뚝한 남자였다.
“네.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패션 사업에 진출할 예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분들을 모시기 위해 여러모로 알아보다 보니 두 분의 이름이 거론되고는 하더군요.”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한국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적인 패션 기업을 일구어 낼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희가요? 어머나? 제가 아니고 현욱 씨 아닌가요?”
그녀가 다시 옆의 남자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현욱 씨야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 시절부터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신 사실을 아주 감명 깊게 들어 왔고, 아라 씨도 굉장히 좋은 평을 들었습니다.”
“정말이신가요?”
“네. 벌써 업계 경력이 15년이나 되신다죠? 학교 졸업하자마자 동대문 시장에서 일을 시작하셨고, 3년 만에 창업을 해서 디자이너스 클럽 등지에 무려 다섯 곳의 도매 유통 매장을 운영하시다가, 다시 중국 광저우로 넘어가셔서 천마 시장을 위시한 중국 전역 열두 개 도시에 매장을 운영하시고 계신 것도요.”
“진짜로 저한테도 관심이 많으셨네요.”
아라가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욱 씨의 감각도 굉장하다 생각하지만, 아라 씨의 경영 능력과 투지에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래서 저희한테 무얼 원하시는 거죠? 제가 중국에서 실패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죠?”
유아라의 중국 사업은 아쉽게도 큰 실패로 끝났다.
저작권 개념이 없는 중국 상인들의 무개념한 상도덕과,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텃세,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뜯어 가는 관료들까지는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믿었던 동업자의 배신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0년 동안 일군 사업체를 허무하게 잃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아라는 다시 기운을 내고, 유학길에 올랐다.
진지하게 패션을 공부해서 다시 재기할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지금 옆에 앉아 있는 현욱을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이자 사업의 동반자로 삼아 남은 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두 분께서 새롭게 사업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중국 관련 사업이시죠?”
“맞아요. 중국에서 한 번 실패했지만, 이번엔 좀 더 확실하게 준비하고 뛰어들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중국 시장은 매력적이니까요.”
5,000만 명의 시장과 14억 명의 시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자금 문제가 걸리시겠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바닥에서부터 시작할 생각이니까.”
아라는 투지 넘치는 경영자이고, 현욱은 재기 넘치는 디자이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중국 사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성공한다.
하지만 몇 년 뒤 한국과 중국 정부 사이의 트러블로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고, 아라는 두 번째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자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뭐. 그렇기는 하죠. 그래서 저희 사업에 투자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아뇨. 두 분을 스카웃하려는 겁니다.”
“스카웃이요? 의류 사업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등을 목표로 한 패션 사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으음······.”
아라가 입술을 꾹 물었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네 곳 모두 전혀 다른 시장이라는 건 아시죠? 각각의 시장에 서로 다르게 접근을 해야 해요. 특히 중국권은 더욱 그래요. 그쪽 사람들은 뭐랄까······ 미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요. 세련된 디자인은 먹히기 어렵고, 원색이나 아예 현란한 무늬를 선호하죠. 개방이 되고 자본주의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미에 대한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할까요?”
“알고 있습니다. 세련된 미에 대한 감각은 한두 세대로 익숙해지는 게 아니지요.”
“시장의 구조도 그래요. 아직은 브랜드 의류보다 보세 상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죠. 물론 저희도 단순히 보세 상품이 아니라 컨템포러리 개념으로 시작할 생각이기는 하지만요.”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 씨가 필요한 겁니다. 유럽에서 첨단의 패션을 익히셨고, 중국의 도매시장에서 충분한 실전을 겪어 보셨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누군가의 밑에서 직원으로 일할 생각은 없어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라고 두 분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두 분께 패션 사업을 총괄하도록 부탁드리려는 거지요.”
“총괄이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조금 관심을 보인다.
“네.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의 대표와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하려는 겁니다.”
“이방카 트럼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현욱이 조금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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