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36. 로드맵
“어프렌티스에 나오는 그 여자 맞지요?”
이현욱이 물었다.
“네. 맞습니다.”
“어, 음······ 그 골 때리는 노친네 딸이었죠?”
아직 뉴스에서 트럼프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올라오지 않을 때였다.
“맞아요.”
“하필 그 여자 이름으로 브랜드를 전개하려는 이유가 뭔가요?”
“그녀의 부친이 비호감인 것은 맞지만, 이방카 트럼프는 제법 미인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닌 셀럽이죠. 미국에서 이방카 트럼프 주얼리는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고요. 패션 부분에서는 하이패션 디자인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는 정책으로 건실하게 성장 중입니다. 중국에서라면 더욱 잘 먹힐 것 같더군요.”
“음······.”
이현욱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의 네임만 이방카 트럼프를 사용하고, 사업의 전개는 완전히 두 분께 맡긴다는 거죠.”
“그렇다면 중국에서도 하이패션 브랜드를 지향하나요?”
“컨템포러리와 패스트 패션의 하이브리드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이현욱과 유아라가 두 번의 실패 후 마침내 성공을 거두게 된 패션 브랜드의 지향점이었다.
의류 가공 기술의 발전으로 사실상 저가의 의류도 하이패션이나 컨템포러리에 비해 품질 면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아라는 컨템포러리 브랜드에 비견될 디자인과 품질로 훨씬 더 다양한 종류의 의상을 빠르게 생산해 공급하는 패스트 패션이 중국에서 먹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감각 있는 디자이너인 이현욱과 저돌적인 사업가인 유아라의 궁합이 잘 맞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완전히 저희에게 일임하신다는 거죠?”
이방카 트럼프라는 브랜드에 대해 탐탁지 않아 하는 현욱에 비해, 유아라는 자신의 사업을 원하는 대로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눈을 빛냈다.
“내년까지 적어도 1억 달러의 사업비를 책정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전권을 드리고, 두 분께 합당한 스톡옵션도 제공하겠습니다.”
“1억 달러······ 6억 위안이 넘어.”
유아라와 이현욱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잠깐 사이에 두 연인은 아주 많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현욱이 눈을 깜빡였고, 아라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지금 바로 답변을 드려야 하나요?”
한참 만에 현욱이 입을 열었다.
“물론 아니죠. 하지만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내일까지는 결정을 내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아라는 당장이라도 승낙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현욱을 생각해서 하루의 시간을 요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아라가 주도권을 잡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 친구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다.
아마도 그런 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유진이 살았던 시간 동안은 그 커플은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날, 현욱에게서 일을 맡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유진이 제시했던 스톡옵션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충분한 자본으로 두 사람이 그려 오던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한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역시 현욱이 트럼프라는 네이밍을 무척이나 촌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어때. 어차피 중국어로 하면 터랑뿌(特朗普)정도 되겠네. 그쪽 사람들 딱히 촌스럽다거나 세련된다거나 하는 생각 안 할 거야.”
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현욱에 비해 유아라는 훨씬 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올해 안으로 사업의 기틀을 만들도록 합시다. 우선은 조직을 만들고, 중국에 트럼프 상표를 등록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 주세요.”
중국에서 상표을 출원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유진이 정해 주는 것은 이런 로드맵까지다.
“올겨울부터 본격적으로 마케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늦어도 12월까지는 중국 전역의 대도시 번화가에 매장을 오픈하고 이방카 트럼프 브랜드를 전개합니다.”
그때 즈음이면 트럼프 일가가 슬슬 두각을 보이기 시작할 터였다.
1주일 만에 최상층 사무실이 제법 쓸만하게 단장되었다.
그때부터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재민일보 김철형 기자입니다.”
그 시작은 우선 재민일보였다.
“미국에서 유가 선물로 70억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을 벌어들이셨다는데,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수도 경제 신문에서 나왔습니다.”
로또 당첨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경제 신문사 기자도 찾아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각종 미디어에서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다.
신문사, 방송사 할 것 없이 미국에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커다란 부를 일궈 낸 자랑스러운 한국인과의 단독 인터뷰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왔다.
따로 증거도 필요 없다. 당장 그들이 인터뷰하는 건물이 유진의 소유였으니.
유진은 한국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힘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트럼프가 내년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조차도 명성 때문이다.
뉴욕에서와 달리 바쁜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의 절반은 미디어와의 인터뷰로, 절반은 스카웃하려는 유능한 사람들과의 면접으로 보내야 했다.
유진은 시흥에 있는 본가로 갈 시간조차 모자라, 본사로 삼은 빌딩 근처의 호텔에 머물렀다.
“형이 말한 거 알아봤어.”
유성에게도 주어진 미션이 있었다.
“비트 코리아 쪽에서 내일 시간 내기로 했어.”
2015년 현재, 한국에는 지금 모두 세 개의 코인 거래소가 존재했다.
비트 코리아, 빗원, 코인제로.
이 중 비트 코리아가 지난 2013년 거래를 시작했고, 2014년 1월 빗원이, 8월에는 코인제로가 문을 열었다.
물론 아직 코인의 거래가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아닌 탓에 세 곳 모두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빗원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겨우 수천만 원에 불과하니, 적자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코인 거래소의 선구자들은 언젠가 빛이 들어올 날을 기대하며 내일을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다.
“개발자 모집은 어때?”
“그쪽도 문제없어. 업계 최고의 연봉을 보장하는데, 안 올 이유가 없잖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코인 거래에 관해 계속 연구해 온 유성은 거래소를 열기로 했다.
한국에도, 그리고 해외에도 각기 다른 거래소를 열 예정이다.
그와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기존 거래소에 대한 인수에도 나섰다.
코인 거래소는 코인 그 자체만큼이나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다.
경쟁 사이트보다 훨씬 더 안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구축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코인 거래로 얻을 수 있는 수익에 비한다면 깃털에 가까운 수준이다.
몇 년 뒤에는 잘 나가는 코인 거래소 한 곳의 순익이 하루 5억 달러에서 10억 달러까지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자체적인 코인 거래소를 운영할 계획이면서도 다른 초기의 코인 거래소를 인수하려는 것은, 2년 뒤 비트코인 가격이 급상승하며 수많은 코인 거래소가 오픈해 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쟁 속에서는 단순히 다른 거래소보다 빠른 속도와 안정성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승자의 반열에 오를 거래소들을 선점해 놓는다면, 어느 거래소가 수익을 올리더라도 그 수익의 전부, 혹은 일정 부분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은 이달이 지나기 전까지 유진이 말한 세 곳의 초기 코인 거래소를 전부 인수 또는 지분 투자할 생각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주 헐값에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시간을 내어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변호사님의 법률 사무소와 자문 계약을 맺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대표 변호사를 만난 자리에서 유진이 목적을 밝혔다.
“슈팅스타 컴퍼니가 어떤 일을 하는 기업인가요?”
머리가 허연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 부드럽게 물어 왔다.
“슈팅스타 컴퍼니는 현재 정밀기계, 패션, 벤쳐 캐피탈 등 4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주회사입니다. 자본금은 1,000억 원이고, 올 말까지는 1조 원까지 늘어날 예정입니다.”
“굉장히 규모가 큰 기업이네요.”
변호사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네. 강유진······ 강유진. 아! 그 미국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던 젊은 분이시구나. 아이고, 몰라 봐서 미안하네요.”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몰라보시는 게 당연하시죠.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요.”
“대단하지 않기는. 혼자서 대기업 1년 수익보다 더 벌어들인 사람인데. 그래 그 슈팅스타에서 우리 법률 사무소와 자문 계약을 맺자고요?”
하지만 딱히 내키는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크고 잘하는 사무소가 천지인데. 그 정도 규모라면 한성 법무법인으로 가 봐요.”
변호사는 국내 제1의 로펌을 들먹였다.
“자문료는 한성 법무법인과 자문 계약하는 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1년에 20억 원씩 10년 계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10년치를 일시불로 드리지요.”
유진의 말에 변호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 버렸다.
“200억 원짜리 자문이라고 했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어온다.
“네. 그리고 진행 중인 소송에 참여하시면 선임료를 최고의 조건으로 드리겠습니다.”
“으음······.”
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한 양반인 만큼 이 정도의 조건으로도 쉽게 넘어오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의 앞에 앉아 있는 이 노인은 얼마 전 법복을 벗은 대법관 출신의 전관변호사였다.
전관예우, 전관예우 하지만 대법관과 검찰총장 출신만 한 전관이 없다.
그리고 두 곳 다 1년에 겨우 한두 명만 새롭게 변호사로 개업을 한다.
그러니 유진의 파격적인 조건도 아직 상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조건을 상향해야 할 듯했다.
유진이 이 노인네를 찾아온 것은 단순히 그가 대법관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히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를 찾으려면 그가 말한 것처럼 대형 로펌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비용은 비슷하고, 훨씬 더 많은 전문적인 변호사들의 자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이 작은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가 원하는 사람이 다른 변호사가 아닌 바로 눈앞의 김동수 변호사이기 때문이다.
그가 딱히 굉장히 청렴하거나, 약자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유진이 알기로 김동수 변호사는 여느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그러하듯 아주 열심히 소송 따위를 맡으며 법관 시절에 못 했던 축재에 빠져 있었다.
김동수 변호사가 이런 작은 개인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도, 대형 로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규정 때문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전직 대법관은 3년 동안 일정 규모 이상의 로펌에 취업할 수 없기에 대개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고 사건 수임을 받는다.
김 변호사 또한 그랬다.
앞으로 3년이 지나면 김동수 변호사는 자신을 원하는 수많은 로펌 중 하나에 거액의 연봉을 보장받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로펌에 있는 4년 동안 무려 170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수임료를 챙기게 된다.
그게 조금 문제가 되었다.
후일 김동수 변호사가 감사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이때의 170억 원이 발목을 잡아 결국 청문회까지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사퇴하고 만다.
그 개인으로서는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나름 정치적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감사원장 자리에 올라, 대통령의 지시에만 따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계속 낸다면 차기 대권까지도 노려 볼 만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개인사야 어찌 되었던,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대법원은 물론이고 법원 조직 전체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진이 제안한 1년에 20억 원이라는 금액은 사실 아무리 대법관 출신이라 해도 단순한 자문료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거의 뇌물에 가까운 돈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합법적인 뇌물이었다.
이해 3월 국회에서 통과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로 인하여 1회 1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수수한 공직자 등은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을 따지지 않고 형사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 법률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암암리에 오가는 불법한 자금은 꽤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지만, 오직 한 직군의 사람들만은 합법적으로 뇌물성 자금을 받을 수 있다.
바로 변호사들이다.
변호사의 수임료, 자문료에는 상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적법한 자문, 고문 계약을 맺고 세금 처리만 하면 수억 원이 아니라 수십억 원을 주고받아도 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고문 변호사 비용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로군요.”
전직 대법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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