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8화 (38/363)

#37.

#37. 돈의 맛

“40억으로 하죠.”

상대방 쪽에서 비용이 너무 크다고 하는데, 유진은 오히려 두 배로 올렸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진심인가 보네요.”

변호사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이죠. 설마 전직 대법관님을 앞에 두고 허언을 하겠습니까.”

김동수 변호사는 꽤 독특한 성향의 법조인이다.

부장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대기업에 불리한 판결을 제법 많이 선고했고, 대법관 시절에는 몇 번의 진보적인 소수 의견을 내서 일반인에게까지 이름을 알렸다.

그렇다고 진보적인 성향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가 낸 소수 의견은 오히려 다른 대법관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다.

그러면서도 대기업이나 권력 비리에 대해서는 사정을 봐 주지 않는 엄정한 판결을 내렸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 하겠다.

법치와 자유를 중요시하고, 능력에 따른 차별을 인정한다.

대신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판결문을 통해 외부에 드러난 법관 김동수의 사상은 그런 것이었다.

또한 여느 고위 법조인과 달리 강남도 아닌 강북의 평범한 서민 아파트에서 살아 가며, 수십 년의 법관 생활 동안에도 재산의 증식이 없다는 사실 또한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공정하고 서민을 위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정계에 들어서면 바로 경쟁력 높은 대선후보 감이라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대법관 자리를 물러나서 정계에 들어가지 않고, 법률 사무실을 열어 열심히 수임료를 챙기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은 정통 보수주의자답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40억 원은 자문료로는 지나친 금액인 것 같군요.”

김동수 변호사가 말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시니까요.”

“혹시 내가 대법관 출신으로서 법조계에 로비하기를 원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비를 부탁드리면 청탁이 되지요. 어디까지나 변호사님의 법률적 지식과 연륜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뿐입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은 많아요. 굳이 내가 아니라도 말이죠.”

“그렇겠죠. 하지만 모든 변호사들이 대법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죠.”

“흐음······.”

김동수 변호사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 액수가 너무 커서 오히려 겁이 나네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는 또 아깝고 말이에요.”

그가 노인의 눈이라기에는 아주 또렷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유진 씨가 지금 대양 그룹과 소송을 하고 있다 했었지요?”

아까는 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참 고약한 노인네로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습니다. 제 부친께서 운영하시는 회사와 대양중공업 사이에 분쟁이 있습니다.”

“그럼 그 소송에도 참여해야겠네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결국은 대양과의 싸움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 주길 원하는 거군요?”

“적어도 우리가 공정한 심판을 받을 기회를 얻고 싶은 겁니다. 대양 그룹 같은 대기업이 지닌 힘은 너무나도 크지 않습니까?”

“그래요. 이 나라에서 대양 같은 대기업이 얼마나 손에 든 칼을 마음대로 휘두르는지는 나도 오랫동안 보아 왔었죠.”

“사실 손에 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은 오히려 법원이나 검찰이 아니던가요?”

“젊은 사람이 겁이 없네요. 막 대법원에서 퇴직한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잖아요?”

초로의 노인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대법관님의 인품을 믿으니 하는 말입니다. 검찰은 자기 식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하지 않고, 법원은 자기 식구의 죄를 조사하겠다고 하면 영장조차 발부해 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거······ 너무 매섭네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 도대체 반박을 못하겠어. 사실 재벌 그룹에서 그렇게나 커다란 힘을 휘두르는 것은 절반은 사법 체계의 모순 때문이라 할 수 있어요. 검찰과 법원이 금력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그렇게나 무소불위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예요.”

김동수 변호사는 의외로 유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저희도 그런 무소불위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 최소한의 방패가 필요합니다. 저희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정한 심판을 받을 권리 정도는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내가 그럴 힘이 있나 모르겠네.”

“대법관님 한 분만으로 대양 그룹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법조계의 인맥에 대항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법관님은 적어도 최소한의 공정한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알았어요. 그래, 노력은 해 보지요.”

김동수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문 변호사를 승낙했다.

“하지만 10년 일시불은 곤란해요.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려나 몰라.”

노인이 조금은 힘없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삶이 몇 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10년이 지나기 전에 그는 급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감사원장의 물망에 올랐다가 고액의 수임료로 낙마해서 다시 재산 증식에 여념이 없는 변호사 생활을 이어 가던 중이었다.

성진정밀의 소송을 맡았던 오주원 변호사가 유진의 지난 삶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솔직히 감사원장 한 번 하시고, 정계에 나가셨으면 큰일을 하셨을 분인데 말이지요.”

오 변호사는 이 노인이 많은 법조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법조계에 사익만 챙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거든요. 김 대법관님이 그런 분이셨어요. 적어도 법정에서만은 공정하려고 노력하시던 분이에요. 그러니까 법복을 입고 계신 동안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셨죠. 대법관에서 퇴임하시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버신 것도 부인과 두 딸에게 그동안 못 해 주던 호강 한번 시켜 주고 싶으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남들 말하는 것처럼 전관예우로 얼토당토않은 수임료를 청구하신 것도 아니에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능력에 맞는 수임료를 받으신 거죠.”

대양중공업과의 1심 소송에서 이긴 뒤, 2심까지 갔을 때 오 변호사는 만일 재판관이 공정하지 않게 나온다면 대법관 출신의 김 변호사를 찾아가 보자고 했었다.

수임료야 눈이 튀어나오게 비싸겠지만, 적어도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를 앞에 두고 완전히 불공평한 재판을 진행할 판사는 감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진이 가장 먼저 이 노인을 찾은 것은.

이 사람을 끌어안으면, 적어도 최소한의 방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매년 자문료를 받는 것으로 합시다.”

김동수 변호사가 말했다.

“그래도 그쪽이 워낙 돈이 많다고 하니, 40억 받는 게 미안하지는 않네.”

그리고 정말로 즐거운 웃음을 내비쳤다.

“자문료만 40억이고, 소송 수임료는 따로 드리겠습니다. 우선 10억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야 고맙지. 진짜 부자하고는 일할 만하네요. 허허.”

어쩐지 노인의 웃음이 허해 보였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번에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변호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너무 큰 수임료는 후일 정계 진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과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것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없을 때, 신념보다 가족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용기일 수도 있다.

법조계 인사들에 대한 영입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유진은 거의 하루 한 명꼴로 변호사를 만났다.

“어서 오세요. 김 부사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대검장 출신으로 대형 로펌에 적을 두고 있는 변호사도 만났다.

이번에는 다산자동차 부사장의 소개를 받았다.

유진이 원하는 사람은 적당히 때가 묻은 고위 법조인 출신의 변호사.

하지만 대양의 손이 닿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차라리 다산의 관리를 받는 변호사를 찾았다.

“대양과 소송 중이라고 하셨죠? 제가 한 번 열심히 나서 보겠습니다. 허허허.”

가식적인 웃음이 얼굴에 가득했다.

“김 부사장님의 부탁이신데, 대양 그룹하고 척 좀 져 보죠. 허허.”

말끝마다 김 부사장을 거론한다. 그동안 받아먹은 값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모양이다.

“매년 40억씩 10년 계약을 제안 드리겠습니다. 거기다 이번 소송에 변호사님 도장을 찍어 주시는 대가로 다시 10억 원의 수임료를 드리지요.”

“네?”

조금은 거만해 보이던 변호사가 깜짝 놀란다.

“혹시라도 다른 소송이 있으면, 역시 도장 한 번만 찍어 주시면 됩니다. 물론 매번 10억씩 드리지요.”

유진이 하는 말을 듣던 변호사의 입은 살짝 벌어졌고, 눈은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다.

머릿속으로 유진과의 계약을 통해 얼마나 챙길 수 있을지 계산하기 바쁜 모양이다.

적어도 수십억, 아니 수백억에 달하는 제안이다.

다산 그룹의 소개로 찾아왔으니 그저 생색이나 내려 했었는데, 유진의 제안은 그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아무리 대검장 출신이라 해도 매년 수십억을, 그것도 하는 일 없이 도장 한 번 찍어 주고 따박따박 받는 횡재수가 마냥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전관예우라고 해도 고작 몇 년이 전부이다.

퇴직하고 시간이 지나면, 검찰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기 마련이다.

보통은 그동안 아주 바짝 벌어들여야 한다.

유진의 제안은 대검장 출신으로서 전관예우를 최대한 살려 벌어들일 수 있는 액수를 아득히 상회했다.

대단한 재벌이라도 되지 않는 한 당황하고 기뻐하는 게 당연하다.

“어. 아, 네. 저야 뭐······.”

조금 전까지 은연중에 내비치던 거만함이 사라지고 있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하다.

“물론 대양과의 소송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회사가 관련된 소송에는 모두 대검장 님의 도장이 올라갔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강 회장님과 관련된 사항이라면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유진에 대한 호칭도 달라졌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체면도 지켜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만은 좀처럼 참기 어려운 듯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대검장 출신 변호사는 유진을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도 유진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

유진이 찾는 사람은 법조계 인사만은 아니었다.

법조계 인사와 마찬가지로 세무직 공무원도 퇴직 후 공직자윤리법상 일정 기간 대형 로펌, 세무법인, 기업체 등에는 취업할 수 없다.

때문에 개인 세무사무소를 열거나, 대형 세무법인의 자매 회사 성격의 세무사무소를 열고 취업제한 기간 동안 그곳에서 활동한다.

유진은 이런 세무 법인을 찾아가 마찬가지로 고액의 세무 자문 계약을 맺었다.

1년 자문료로 10억원, 계약 기간은 10년.

만일 그동안 다른 세무법인이나 로펌으로 옮긴다면 자문 계약도 그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위 법조인 출신 변호사에 비해, 전직 국세청 차장 출신의 세무사는 처음부터 훨씬 더 정중했다.

아무래도 전직 후 몇 년 동안 수십 억의 수익은 어렵지 않게 올리는 법조인에 비해, 세무직 출신 전관은 기대 수익이 덜하기 때문이리라.

별다른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십 년 동안 무려 100억 원을 챙길 수 있으니, 공손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일주일 동안 유진이 찾아다닌 로펌과 세무법인은 모두 열 곳.

전부 대법관이나 고등검찰청 검사장급, 그리고 국세청 차장급 이상의 전관이 열었거나 재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중에는 몇 달 뒤에 청와대에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불려갈 사람도 있다.

물론 정작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이지만.

조건은 모두 동일했다.

법조계 인사에게는 1년에 40억 원.

국세청 출신은 1년에 10억 원.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성진정밀과 대양중공업 간의 소송에 변호사 선임계에 이름을 올리고 제출하는 대가로 각각 10억 원씩의 수임료도 지불하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쓴 돈이 모두 500억 가까이 됐다.

단지 이름값치고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하지만 결코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을 통해 그 자신이, 그리고 가족들이 조금이나마 더 안전할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혔다는 생각이다.

“형. 뉴스 봤어?”

미디어포커스가 특종을 터트렸을 때, 형제는 여전히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대양전자의 프리스케일 인수 뒤에 숨겨진 어두운 뒷거래 ]

제목을 참 찰지게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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