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9화 (39/363)

#38.

#38. 공매도

4월 하순 미디어포커스가 대양전자와 DL캐피탈에 대한 탐사 내용을 보도했다.

“대양그룹과 DL캐피탈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엄청나게 세세하게 취재했어.”

“그러네. 꽤 유능한 기자였네.”

기사에는 유진이 탐정 사무소에서 받은 자료 이상의 것들이 적혀 있었다.

“리처드 한의 한국 이름은 한재덕이고, 대양 그룹 회장의 금고지기 노릇을 하던 한재호라는 사람의 동생이었대. 그리고 대양 그룹에서는 회장 비서실에 근무했었고.”

아무래도 미국의 탐정 사무소보다는 한국의 기자가 현지의 정보를 얻기 쉬웠을 것이다.

“그 사람 아들은 대양자동차 연구소에서 관리급으로 근무하고 있고, 딸은 대양 그룹 계열사 사장 아들과 결혼해서 강남에 살고 있다네. 미국에서 전문대 수준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엘리트들만 모여 있는 대양자동차 연구소에 근무한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 모양이야. 그런데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도 되나?”

“한재호라는 사람은 몇 년 전에 사망했는데, 그 사람 아들도 대양에 근무하는 모양이야.”

기사를 죽 읽어 보니 도저히 DL캐피탈과 대양이 서로 한 몸이 아니라고 생각 못 할 정도였다.

대양 그룹의 자회사나 자산을 비교적 헐값에 인수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고, 반대로 대양 그룹이 DL캐피탈의 사업을 시세보다 더 주고 인수한 적도 있었다.

물론 전부 정황증거뿐이지만, 기자는 아주 교묘하게 대양의 사주 일가가 DL캐피탈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고 몰아가고 있었다.

“포탈에는 올라왔어?”

보통 이런 사건은 각 그룹 언론 대응팀에서 재빠르게 조처해서 적어도 포탈에서는 내리게 만든다.

군소 언론사 자체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것까지는 통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인터넷 신문사로 등록된 수만 수천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포탈 사이트 세 곳을 컨트롤 하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에 퍼져 나가는 것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대양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 * *

“이게 무슨 꼴이냐!”

평소와 달리 대양 그룹 류재덕 회장의 목소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노기가 섞여 있었다.

부친의 명으로 재빠르게 회장 자택에 모인 형제들은 그 서슬 퍼런 노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만 했다.

평소와 달리 이 자리에는 노 회장과 세 아들만이 모여 사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어느 놈이야, 대체! DL캐피탈을 노출시킨 게!”

노인이 가장 분노할 때는 주로 비자금에 관련된 경우였다.

지난 2000년대 초에 런던에 숨겨 놓은 비자금 관리 회사가 노출되는 바람에, 정치권에 엄청난 액수를 헌납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런던의 비자금 관리 회사를 폐쇄하고 새롭게 여러 개의 사모펀드를 만들어 은밀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 DL캐피탈 쪽에 확인하라 지시를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그 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여기 있는 사람과 오 비서실장,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몇몇이 전부입니다. 그쪽에서 나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둘째가 말한 대로, 대양 그룹의 핵심 중의 핵심 인사 몇 명만이 비자금에 관여하고 있었다.

“빨리 찾아내. 어디서 말이 샌 것인지 확실하게 알아 와!”

류재덕 회장의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응책은 있어?”

첫째가 물었다.

“대응책이랄 게 있겠어요? 무대응이 최선이지.”

둘째가 별수 있겠냐는 듯 말했다.

“무대응?”

류재덕 회장의 반응에 둘째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한재덕이 젊은 시절 대양 비서실에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엮기는 어려울 겁니다.”

“맞는 말이에요. 막말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모펀드를 검찰이 조질 겁니까? 아니면 이제 미국인이 된 한재덕을 불러들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첫째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도 여론이 계속 나빠지면, 정치권에서도 우리를 압박하고 나설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나서면 프리스케일 인수 건이 뒤집힐 수도 있구요.”

셋째인 류근수가 가장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 포탈에서 내려가질 않는 거야?”

첫째가 다시 둘째에게 물었다.

슬쩍 이번 건에 대한 책임을 둘째에게 미루는 눈치였다.

“지금 홍보팀이 협상 중이에요. 조만간 전부 내려갈 겁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재민일보에서 바로 받아 쓴 게 신경 쓰이네요.”

류근수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형제들은 이 사태마저 서로를 헐뜯을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다산에서 작정한 것 같은데, 어쩔 셈이에요? 프리스케일 인수에서 물먹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류근수도 장남처럼 둘째를 몰아붙인다.

“싸우자면 싸워야지.”

이번에 입을 연 사람은 류재덕 회장이었다.

“아무리 서로 이를 갈고 있다고 해도, 금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물러설 수야 없지.”

노인의 눈빛은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들들은 노인에게서 훨씬 더 지독한 악의를 읽을 수 있었다.

“우선은 언론사들에 전언을 돌리거라. 이 이상 사태를 확대하는 놈이 있다면, 다시는 대양의 광고는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해외 비자금의 존재는 대양의 아킬레스 건과 같은 존재였다.

* * *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가게 생겼다. 이걸 빌미로 양당에서 선거자금을 요구하고 있어.”

대양중공업 류근수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막내아들과 이번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방 선거나 보궐 선거에는 그렇게까지 지원해 줄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에요.”

성규가 부친의 말에 덧붙였다.

“적어도 100억씩은 나갈 거 같아.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이 노하셨는데, 생돈까지 나가게 생겼으니 더 뼈아프구나.”

“연세도 있으신데, 자꾸 이런 일이 생기면 안 좋은데요.”

“그러게 말이야. 아버님이 아직은 정정하셔야 하는데.”

류재덕 회장을 위한 걱정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직 회장의 마음을 손에 넣지 못했다.

대양 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 대부분은 여전히 그 노인네가 쥐고 있다.

혹여 노인이 급사라도 한다면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은 노인의 유언에 따라 세 형제 중 누군가에겐가 상속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셋째인 성규의 부친일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다.

성규의 부친이 노인에게 후계자로 낙점을 받을 때까지는 버텨 줘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한재덕이 그렇게 쉽게 자신을 노출할 사람은 아닌데.”

류근수 사장이 다시 주제를 돌렸다.

“그러게요. 저도 미국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만나봤는데, 그렇게 쉽게 노출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한재덕이가 미국으로 건너간 게 20년 전의 일이야. 그리고 시민권을 딴 것도 10년이 훌쩍 넘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는데 하필 이 시점이냐는 말이지.”

“공교롭기는 하네요. 하필이면 그 녀석한테 칼라일 지분을 매입한 뒤의 일이니 말이죠. 그렇다고 그 녀석이 한재덕과 대양 사이를 알아챌 건수가 있을 리는 없는데요.”

“만일 그 녀석이 정말로 DL캐피탈과 대양의 관련을 미디어포커스에 제보한 거라면······.”

부친이 자신의 아픈 손가락인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프리스케일 건으로 제법 큰 이익을 얻었던 네 공이 전부 없던 게 될 거다.”

성규의 부친이 고민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아들이 공을 세우면 곧 자신의 공이 되듯이, 성규의 실수는 자신의 실수로 치환된다.

류 회장은 자신의 후계자를 낙점하는 데에 있어 아들들의 능력뿐 아니라, 다음 대를 이어갈 3세들의 능력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몇 번이나 밝혀 왔다.

아들만 믿고 대양을 넘겨주었다가, 손자가 말아먹으면 모두 허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의 능력이 조금 못해도, 손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놈이 있다면, 중히 쓰겠다 했다.

이번 칼라일 지분에 대한 건을 물어온 것이 성규이니, 그걸로 손해가 생기면 성규는 물론이고, 그 아비인 류근수 사장에게까지 피해가 올 것은 너무 자명했다.

“아무래도 그 녀석을 한 번 혼쭐 내 줘야 할 거 같아요. 마침 한국에 들어와 있으니 미국에서보다는 다루기 쉬울 겁니다. 검찰에 사주하면 어떻게든 잡아넣을 수 있지 않겠어요?”

성규는 이번 기회에 유진을 확실히 밟아 버리고자 했다.

“사실은 그게 문제다. 그 녀석 애비의 회사와 진행 중이던 소송에 문제가 생겼다.”

“문제라고요?”

“그래. 이번에 변호인단을 추가시켰더구나. 대략 열 명 가까이.”

“돈이 생겼으니 그런 모양이죠.”

성규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선임계에 올린 이름들이 문제다. 하나같이 최근 퇴임한 법원과 검찰 고위직이야. 대법관 출신이 두 명, 지원장이 하나, 헌법재판관이 하나, 차장검사가 하나, 고검장이 둘. 이 정도의 호화 변호인단은 나도 처음 본다”

“돈지랄이네요. 허, 그딴 소송에 전관을 열 명이나? 수임료가 더 나오겠네.”

“대체 얼마나 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렇게 나오는 이유야 뻔하지. 자기도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야.”

“우리 대양이 지금껏 쌓아 온 인맥이 이 정도에 못 미치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지. 하지만 상대에게 그런 거물급 법조계 인사들이 달라붙어 있으면, 일을 억지로 진행시키지는 못 해. 그쪽도 돈을 받아먹었으니 뭐든 행동을 취할 테고, 법조계 인사끼리는 원래 법정 밖에서는 상대방의 밥그릇을 깨트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어. 아주 고약한 놈들이야.”

“골치 아프게 됐네요.”

성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칼라일 그룹 건으로 조부에게 큰 점수를 따 놓았다 싶었는데, 만일 유진이 관련되어 있다면 오히려 큰 실책만 남기게 되었다.

“그나마 주가는 떨어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프리스케일 인수 건이 미리 공개되는 바람에 그다지 재미를 못 봤는데, 이번에 하락했으면 안 좋았을 뻔했어.”

“제가 알아보니까 그 녀석이 이번에 대양전자 공매도를 걸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성규는 이걸 보고하려고 들른 것이다.

부친은 성규에게 유진에게서 손을 떼라고 했지만, 성규는 녀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전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 언제?”

“기사가 나가고 나서 바로 걸었답니다.”

“흐음······ 기사가 날 걸 알았다면 미리 공매도를 쳤겠지. 그렇다고 정말로 관계가 없다고 볼 수도 없고······ 여하튼 그냥 둘 수 없는 놈이야.”

“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놈을 그냥 둬서는 안 됩니다. 건방진 자식.”

“그래······ 그냥 둬서는 안 되지.”

류근수 사장은 창문 건너편으로 바로 보이는 빌딩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도 저 꼭대기에서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열불이 타올랐다.

* * *

“그건 그렇고, DL캐피탈 건은 생각보다 불이 활활 타오르지는 않네.”

유성이 서운한 듯 말했다.

“포탈에서도 겨우 하루도 안 돼서 내려가고, 그걸 보도한 신문도 몇 개 안 돼. 너무한 거 아니야? 오히려 그 기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더 많아.”

“원래 그런 거야. 대기업에 대한 평범한 비판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핵심부를 겨누는 기사라면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지.”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그 기사를 쓰기 위해 그 기자가 얼마나 열심히 취재를 했겠어? 그리고 그런 행위는 주주들에 대한 배임행위 아니야? 근데 검찰도 언론도 다들 모른 체야.”

“당연하지. 명확한 증거가 없잖아. 해외에 근거지를 둔 사모펀드야. 어지간한 증거가 없다면 검찰에서 수사를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형은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모양이네?”

“당연하지 않아? 범죄를 저지르고 유죄 판결을 받아도 무사히 법정을 벗어나는데, 의혹만으로 대기업에게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아쉽잖아. 탐정까지 고용했는데.”

“하나도 아쉽지 않아. 대양과의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유진이 정말 아쉬운 것은 이제 며칠 뒤면 벌어질 사건에 대해 동생에게 말할 수 없다는 정도이다.

미디어포커스에게 대양과 DL캐피탈 사이의 의혹에 대해 제보한 것도, 대양전자 주식을 공매도한 것도 모두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를 위함이다.

* * *

“큰일 났습니다. 폭탄이! 테러가! 말레이시아에서······.”

너무나도 황급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서 수위를 다투는 명문 대학을 나와 대양전자 전략 기획실에 근무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

대양전자 대표이사인 류근일 사장이 방금 전 급하게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 더듬거리며 보고를 올린 직원에게 말했다.

“마. 말레이시아 프리스케일 현지 공장에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용케 제대로 사건을 보고했다.

“프리스케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상황 보고 제대로 해!”

“30분 전에 말레이시아 IS 테러리스트들이 프리스케일 공장을 습격해 폭탄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해는?”

“패키징 공장에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직 테러리스트들이 진압되지 않고 있어 최종 피해를 짐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지 경찰······ 아니, 군은 뭘 하고 있는 거야?”

“프리스케일 공장 주변을 폐쇄하고 감시 중이랍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장갑차와 특수부대가 출동한 상태입니다.”

“TV! TV 틀어 봐! 당장!”

류근일의 다급한 외침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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