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40화 (40/363)

40화 진퇴양난

“대양전자 주가가 2만 원 아래로 떨어졌어. 오늘까지 일주일 연속 하한가야.”

스마트폰으로 주가를 훑어보던 유성이 말했다.

“대양 그룹 전체가 난리야. 서브프라임 모기지 이후로 주가가 이렇게 떨어지는 것은 처음 보는 거 같아. 대양 계열사 주식을 가진 사람들한테는 아주 끔찍하겠다.”

“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겪어 봤어? 그때 군대에 있지 않았었나?”

유진이 웃으며 동생에게 물었다.

“어? 아니. 그냥 책으로 봤다고.”

“그래. 근데 대양 그룹 시총이 지금 얼마나 되지?”

“82조 원으로 추산된대. 엄청나게 떨어졌네.”

2015년 4월 기준으로 대양 그룹 전체의 시가 총액은 약 128조 원.

350조 원이라는 압도적인 시가 총액을 자랑하는 제일 그룹과 140조 원의 다산 그룹의 뒤를 이어 3위의 자리를 10년째 수성하고 있었다.

그 뒤를 잇는 명성 그룹의 시총이 104조 원이니 4위와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프리스케일 사태로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 대양의 시총이 82조 원으로 쪼그라들면서 명성에게 3위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심지어 만년 5위이던 SC그룹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굴욕이라 할만하다.

“대양 인간들 속이 타겠네.”

유성이 쓱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속이 타겠지. 하지만 그룹 시총이 줄어들어서는 아닐 거야. 대기업 사주들은 의외로 시총이 너무 높은 걸 그다지 반기지 않거든.”

“그래? 왜?”

“시총이 높으면 양도세나 상속세 부담도 커지니까. 대양 회장이 이제 90이잖아. 슬슬 준비해야지.”

“아! 그렇구나. 그럼 일부러 상속세를 줄이려고 그룹의 시총을 낮추는 경우도 있겠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그렇게 시총이 낮아졌을 때, 그 틈을 타 다음 대로 양도한다든지 하고는 하지. 물론 일부러 주가를 떨구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고 하는데, 외부인이야 알 수 없는 일이고.”

유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대체 그런 식이라면 배임 아니야?”

“배임이라고 해도 증명할 방법은 없으니까.”

“형 말을 들으니까, 대양 녀석들 오히려 즐거워할 거 같잖아?”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DL캐피탈 때문에 꽤 속을 썩이고 있을 테니. 지금 상태로는 프리스케일을 인수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거든.”

처음 미디어포커스가 대양 그룹과 DL캐피탈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보도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언론사가 무시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테러가 발생하고 나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인데, 대양 그룹과 DL캐피탈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신문사는 물론이고 종편, 지상파 방송 할 것 없이 적어도 한두 번은 DL캐피탈에 대해 보도를 내보냈다.

물론 같은 소재라도 그 내용은 매체에 따라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조금이라도 친기업적인 매체에서는 대양 그룹과 DL캐피탈 사이의 의혹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라 주장했고, 반대쪽은 대양 그룹이 DL캐피탈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계약 이행을 강행한다면 배임행위이며, 사법기관에서 수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수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정상적이라면 인수해서는 안 되지. 차라리 계약금을 날리는 편이 싸게 먹힐 테니까. 테러가 아니었다면 그냥 경영권 프리미엄이 크구나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계약금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10%는 되겠지. 통상적으로 그 정도는 내니까.”

“그럼 28억 6,000만 달러? 3조 원이 넘는 금액을 포기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30조 원을 주고 10조 원짜리 회사를 사서 어쩌겠어? 그걸 정상화시키기 위해 다시 얼마가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몇 년 동안 10조 원 정도는 투자해야 할지도 몰라. 그걸 하다가 대양 그룹이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어.”

“그것도 그러네. 그럼 포기해야지.”

“그렇게 되면 DL캐피탈에서 큰 손해를 보지. 흐흐.”

유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이 들고 있던 칼라일 그룹의 지분을 4억 5,000만 달러에 넘겼다.

테러가 발생할 때까지는 그걸로 아주 큰돈을 벌었다고 좋아했겠지만, 계약이 파기되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아······ 그러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네. 이러다가 대양 망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이 나라에서 대기업은 절대 안 망해. 적어도 10대 재벌 안에 들어 있다면 말이지.”

“하기는······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지.”

“틀린 말은 아니니까. 4대 그룹 정도면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사람만 수십만이 넘어. 그리고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말할 필요도 없지. 너라도 그걸 결정할 위치에 서 있다면, 쉽게 대기업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지는 못할 거야.”

“어렵네······.”

유성이 고개를 내젓는다.

“어. 그냥 말로는 쉽지만, 막상 책임을 지게 되는 입장에서는 대기업이 무너지게 놔둘 수는 없어.”

“그렇지만 잘못된 경영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아?”

“책임도 나름 져 오기는 했어. 사재를 복지 기금 따위에 출연한다든지, 재단을 만든다든지. 그게 정말로 제대로 책임을 지는 방식인지는 의문점이 많지만.”

“그러니까 문제 아니야? 대기업이 무너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치더라도, 제대로 된 책임도 묻지 않는 것은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사실상 유권자들이 선택한 거니까.”

“이거 참······ 아! 이번 대양 그룹 공매도로 올린 수익 보고서 올라왔어.”

이제 한국에서의 투자는 유성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이 쌓여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얼마나 되는데?”

“대양전자에서 8,800억 원, 대양자동차에서 3,600억 원, 그리고 나머지 계열사에서 2,700억 원.”

6억 달러를 담보로 모두 3조 5천억 원어치의 공매도를 대양 그룹 계열사에 걸었고, 슬슬 바닥이지 싶어 청산했다.

청산 이후에도 주가는 오히려 더 떨어지고 있었지만, 유진은 그리 아까워하지 않았다.

“보름 동안 1조 5,000억 원이야. 시간 단위로 보면 지금까지의 투자 중에서는 가장 높은 이익을 올린 셈이야.”

유진이 공매도를 할 때만 해도, 대양 그룹 주가는 프리스케일 인수에 대한 기대로 전보다 약간 더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 상황에서 테러로 인한 손실을 전부 대양 그룹이 뒤집어 썼으니, 이런 기록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잘됐네.”

솔직히 유진으로서는 큰 수익을 기대한다기보다는, 대양 그룹 총수 일가에게 보여 준다는 의미가 더욱 컸었다.

하지만 일이 끝나고 보니, 유진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익이 생겼다.

“이걸로 쇼핑이나 더 해야겠다.”

“또 뭘 사려고?”

“살 거야 많지. 우선 마켓 컬리넌부터 시작해볼까?”

“마켓 컬리넌?”

유진과 유성 두 형제가 그렇게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대양의 불행으로 인한 수익에 즐거워하고 있던 그 시간, 바로 길 건너편 대양 그룹 사옥은 여전히 난리통이었다.

“어떻게 됐어? 계약금을 돌려받을 수는 있겠나?”

대양전자 사장 류근일이 법무팀장에게 물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계약서상 MAC(중대한 부정적 변경)에 테러에 대한 예외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인수 합병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의 종료 시까지 인수 대상 기업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약정하는 겁니다. 판매하는 쪽에서는 다양한 예외 조항을 두어서 계약의 이행을 성사시키려 하지요.”

“그래서? 테러가 일어났어도 우리가 프리스케일을 사야 한다?”

“네. 프리스케일의 과오나 불법 행위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 요즘처럼 테러가 발발하는 와중에 어째서 그런 예외 조항을 그냥 놔둔 거야?”

류근일 사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M&A 계약시 그런 조건으로 합니다. 영국은 아예 MAC 조항을 넣지 않는 경우도 있구요. 9.11 이후에도 미국은 M&A 계약서상의 MAC 조항에 테러를 제외 조항에 포함시켜 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미국 법원에서도 MAC 조항으로 인한 계약 해제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요. 판매하는 쪽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거나, 숨긴 것이 있다면 모르지만, 원인이 외부에 기인하는 사태는 계약 파기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쪽은 계약 행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습니다.”

법률 담당 이사가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말이 돼? 미국 놈들은 미국 놈들이고, 우리 쪽은 뭘 한 거야?”

“말레이시아에서 테러가 일어난 적이 없어서 간과했습니다.”

사실은 미국 쪽 로펌의 의견에 그대로 따랐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법무팀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그냥 계약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계약금을 포기하는 쪽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길입니다.”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재무 담당 전무가 말했다.

“30억 달러야! 30억 달러! 그게 한두 푼이야?”

“물론 그렇지만, 프리스케일의 현재 가치가 100억 달러가 간신히 넘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286억 달러를 지불하고 인수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보험은? 보험은 들어 두었을 거 아니야?”

“보험금이 3억 달러 정도로 책정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돼? 공장 손실이 얼만데? 그리고 영업 손실은?”

“일반 보험은 테러로 인한 피해에 면책이 됩니다. 따로 들어둔 테러 보험에서 최대한 받아 낼 수 있는 게 그 정도라고 합니다.”

“미치겠군······.”

류근일 사장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다들 방법을 생각해 봐. 어떻게든 손해를 줄여야 해. 30억 달러를 전부 물어 줄 수는 없다고!”

“되든 안 되든 소송을 하는 방법뿐입니다.”

법무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안 된다며?”

“그게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소송 과정에서 협상을 통해 얼마라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얼마나?”

“그건 어디서 재판이 열리는지, 또 어떤 로펌을 고용하는지에 따라 다르니······.”

“그럼 한 번 추진해 봐.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과 우리가 돌려받을 수 있는 계약금을 산출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 이사 들어오라고 해. 말레이시아 공장과 다른 해외 공장들 안전에 대해 보고할 준비하고.”

회사에 있는 동안의 류근일은 정상적인 기업의 수장이었다.

“인수는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압박이 너무 많이 들어옵니다.”

대양전자 사장이 아닌 둘째 아들로서의 류근일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회사에서는 손해를 줄이기 위해 발악을 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프리스케일 인수를 감행할 생각이었다.

DL캐피탈을 통해 확보해 놓은 22%의 지분 때문이다.

하지만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았다.

“산은에서도 전화가 왔고, 기재부와 산업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프리스케일 인수는 곤란하답니다.”

주거래 은행과 정부에서 반대하는 인수를 계속 진행할 수는 없다.

“나도 청와대로부터 전언을 받았다.”

류재덕 회장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프리스케일 인수를 강행하는 것이 정권에 부담이 된다는구나.”

불쾌하다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정말로 286억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를 투자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도통 방법이 없네요.”

첫째인 대양자동차 사장이 포기한다는 투로 말했다.

“만약 계약을 파기하면 우리가 사 놓은 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는 거냐?”

첫째가 이번 건의 책임을 맡은 둘째에게 물었다.

“만일 프리스케일의 가치를 100억 달러로 인정하면 우리가 가진 22%의 지분 가치가 22억 달러라는 말인데······.”

“7%를 12억 달러에 인수했고, 17%를 35억 달러에 인수했으니, 모두 47억 달러를 쓴 셈이에요.”

셋째 류근수가 말했다.

“25억 달러나 손해를 보게 생겼습니다. 그것도 어디에 팔아야 25억 달러지 이대로라면 47억 달러가 그대로 묶여 버립니다.”

“만약 계약금 30억 달러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지?”

다시 첫째가 묻는다.

“그러면 대략 6억 5천만 달러의 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가족들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으로 회사의 피해가 생기지만, 대신 자신들의 피 같은 6억 5천만 달러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계약금을 더 크게 거는 건데 말이야.”

“그러게요. 하······ 참.”

“말레이시아에 테러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아무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또 법률적으로도 계약금을 돌려받는 일은 지난하니, 깨끗하게 포기하는 쪽이 소송비용을 줄이는 것도 있고,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소송으로 들어가서 계약금의 일부라도 건지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회사의 손해보다, DL캐피탈에 묶여 있는 자금이 훨씬 더 중요했다.

대양전자 수준의 기업에서 30억 달러 정도의 손실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의 의견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래도 바로 손을 떼면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계약금을 되찾으려는 제스처를 취한 뒤에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거라. 그리고 성규야, 너는 좀 남거라.”

이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류재덕 회장이 그동안 이뻐하던 손자를 불렀다.

“이번에 얼마의 수익을 올렸느냐?”

아들들을 전부 물린 뒤, 류 회장이 성규에게 물었다.

“알고 계셨군요.”

성규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500억 정도를 공매도에 넣었다지?”

류재덕 회장이 다시 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