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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41화 (41/363)

41화 남의 돈

“네. 정확히는 550억입니다.”

성규는 부친에게 말할 때보다 더 정확한 금액을 말했다.

나이가 90에 가까워도 여전히 류 회장은 자신이나 부친의 행위를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룹이 어려운데 제 몫만 챙기려 들어서.”

조부가 이미 알고 있으니, 변명 따위 소용없다는 생각이다.

“죄송할 거 없다. 그런 기회가 있으면 재빠르게 잡는 게 당연한 일이지. 너 하나뿐이더라. 다른 녀석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공매도를 던질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어.”

노인의 말은 성규가 생각했던 꾸지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 할아버님.”

“500억이라니. 그것밖에 못 넣었다니, 실망이구나.”

“죄송합니다.”

“오 실장은 2,000억을 넣었어. 800억은 벌었다 싶구나.”

“아!”

류 회장의 심복인 비서실장 오경덕이 움직였다는 것은 류 회장의 의중이었다는 의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득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태도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거야. 왜 내게 당장 달려오지 않았더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대양인터내셔널과 대양중공업 지분을 늘리려 했던 거니 말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말이다, 얘야.”

평소와 달리 류 회장은 인자한 얼굴로 손자를 타일렀다.

“난 너희들이 대양의 지분에 욕심을 내는 것을 조금도 막을 생각이 없단다. 대양이라는 커다란 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끝없는 욕심을 가져야 해. 욕심이 없는 놈들은 내가 이룩한 대양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어.”

성규는 노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기회다 싶으면 절대 놓치지 말고 꽉 잡도록 하거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잊지 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할아비가 아니더냐?”

“할아버님.”

성규는 감격한 눈빛으로 조부를 바라보았다.

“됐다. 그렇게 귀여운 척하지 말고, 이제 나가 보거라.”

“네. 할아버님.”

성규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거기 오 실장 들어오라고 해.”

손자가 나가자, 류 회장은 인터폰으로 심복을 찾았다.

“성규 그 녀석은 꼭 나를 닮았어. 욕심은 많고 우애는 없지. 오로지 대양을 제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망뿐이야. 하지만 아직 너무 서툴러.”

류 회장이 말했다.

평소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그 나이로는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자네가 도와주게.”

“진심이십니까?”

오 실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까지 류 회장이 오 실장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아들들이든 손자들이든 그들끼리 벌어지는 그 치열한 암투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노인은 그런 구도에 변화를 주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이번 사태로 그룹에서도, 또 DL캐피탈에서도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대양 그룹에 있어서는 작은 풍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프리스케일을 말하는 게 아니야.”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무얼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어린 녀석 말이야. 강유진이라 했었지?”

“네. 강유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대양 그룹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심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돈놀이로 한번 큰 패를 잡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놈들은 기필코 언제고 제 꾀에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아니야. 느낌이 안 좋아. 이번에 그 녀석이 얼마를 벌었다고 했지?”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대략 1조 2,000억 원 정도입니다.”

아직 유진이 어딘가에 말을 흘리지도 않았지만, 대양 그룹 비서실에서는 얼추 비슷하게나마 유진의 수익을 추산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투자자의 정보가 쉽사리 윗선으로 건네진다.

대양 정도의 위상을 가진 그룹이라면, 이 나라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의 자산이나 투자 내역 따위는 몇 분이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나마 알려지지 않는 것은 해외의 투자 기관에서 대행하는 투자 정도일 것이다.

“자네랑 성규랑 두 사람이 벌어들인 게 기껏 1,500억이 넘지 않아. 그런데 그 녀석은 그 열 배를 벌었단 말이지.”

“운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테러가 일어날 것을 세상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놈은 그저 대양에 대한 적의로 뉴스 기사 하나를 보고 5,000억을 던졌습니다. 당장은 큰돈을 벌었을지 몰라도 너무 무모합니다.”

오 실장은 회장이 유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부정했다.

별다른 정보도 없이 내키는 대로 큰돈을 베팅하는 자가 큰 인물일 수는 없다.

적어도 오 실장이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랬다.

“여하튼 앞으로 좀 더 눈여겨봐.”

류 회장은 자신의 안목과 오 실장의 안목을 비교하며 논쟁할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녀석에 대해서는 최대한 마크하겠습니다.”

“휴우…… 18년 전의 그 사태보다 어쩌면 더 힘겨운 시간이 될 거야.”

노인은 프리스케일 사태로 입은 엄청난 피해보다, 강유진이라는 껄끄러운 애송이가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입은 손해가 모두 20억 달러나 된다는 말이지…….”

“네. DL 건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대양 그룹이 본 손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주가는 떨어질 만큼 떨어졌고?”

“바닥인 모양입니다.”

“그럼 이제 슬슬 거둬들이면 되겠군. 매집이 끝나면 프리스케일 인수 계약을 파기한다는 기사를 내보내. 그러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겠지.”

류 회장은 그야말로 길을 가다 엎어져도 하다못해 흙이라도 주워 일어날 사람이다.

지금까지 늘 그랬었다. 회사에 손실이 날 것 같으면 미리 팔고, 이익이 날 것 같으면 미리 사 두었다.

이번에 대양전자의 주식이 30% 가까이 떨어진 것은 테러에 대한 시장의 반응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걸 오히려 기회로 삼은 류 회장의 의도가 주가를 더욱 떨궜다.

“그걸로 얼마나 만회할 수 있으려나?”

“적어도 절반은 되찾아야죠.”

류 회장이 손자에게 말한 것은 진실과는 꽤 동떨어져 있었다.

“허어, 고얀……. 그렇게 해도 1조 원이나 손해라고……. 이걸 대체 어디서 벌충한다. 괘씸하구나, 괘씸해.”

다시 손해를 떠올린 류 회장의 얼굴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오 실장은 자신의 주인이 진정으로 노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분을 풀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상이 없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테러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말인가?

“한재덕이가 이젠 너무 나이가 들었나 봐.”

마침내 노인은 이 끔찍한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누군가를 찾아냈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드니 처신을 바로 못 하는 모양이죠.”

“그래. 처신을 못 하면 그만 둬야지.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 지났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오 실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잘 알고 있었다.

* * *

프리스케일에 관한 기사가 슬슬 뜸해지고 있던 5월 어느 날, 유진은 다산자동차 본사로 마실을 나갔다.

“이거…… 웃기는 일이로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새옹지마라고, 프리스케일을 인수하지 못한 게 오히려 복이 되었군요.”

“복이라. 맞지. 대양에게 재앙이 내렸으면, 우리한테는 복이지. 흐흐흐.”

곰 같은 인상의 김수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이제 프리스케일 인수는 아주 물 건너간 모양입니다.”

“그러겠지. 150억짜리를 280억에 사는 거랑, 100억짜리를 280억에 사는 거랑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벌써 대양전자의 무모함을 비판하는 기사투성이야.”

“부사장님 생각으로는 대양이 계약을 포기할 것 같으신 모양이지요?”

“포기하게 만들어야지.”

김수호 부사장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이미 정재계 관계자들에게 잔뜩 로비를 하고 난 이후였다.

언론에서 대양의 프리스케일 인수에 부정적인 기사를 그렇게 내보내고 있는 것도 다산의 의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잘된 일이야. 아, 물론 테러의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만일 대양이 프리스케일을 포기한다면, 다산에서 인수할 의향이 있는 겁니까?”

“아마도. 우선 시간은 벌었으니까. 블랙스톤 그룹에서 이번 사태를 수습하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리겠지. 계약 파기 소송도 할 것 같으니 그 또한 시간이 걸리겠고.”

“그 소송 얼마 가지 않을 겁니다. 대양에선 DL캐피탈에 투자한 자금을 계속 묶어 둘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기야 하지. 그래도 몇 달은 걸릴 거야. 여하튼 대양이 계약금을 포기하고 나면 다시는 인수하겠다고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어쨌든 한 2년 동안은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놈이 없겠지. 2년이면 우리도 실탄을 마련할 수 있어. 말레이시아 건으로 인수 가격도 내려갈 테고. 여하튼 프리스케일은 우리 차지야.”

“이런, 어쩌지요? 실은 저도 프리스케일에 관심이 있는데.”

유진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김수호 부사장이 눈을 부릅뜨고 유진을 바라본다.

“솔직히 매력적인 매물이지 않습니까? 전기자동차든, 하이브리드든, 수소차든, 자율주행이든. 앞으로 프리스케일의 가치는 점점 더 커져 갈 테죠. 사 두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유진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앞으로 5년 뒤에는 다산 자동차가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로 공장을 세워야 하는 일도 벌어질 정도이다.

일반 반도체와 달리 고압, 고온에 대한 높은 내구성을 요구하는 차량용 반도체는 일반 반도체 업체에서 제조하기에는 노하우가 부족하다.

“설마 프리스케일을 두고 우리랑 경쟁을 해 보겠다고?”

“제가 사놓았다가 다산에 다시 입양을 보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듣자니 NXP에서 프리스케일에 관심을 보인다고 하던데요. 블랙스톤이 대양으로부터 30억 달러의 계약금을 챙기면 조금 싸게 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쪽이야 여지껏 엑시트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 않습니까? NXP로서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겠죠. NXP뿐 아니라 르네사스나 인피니언도 마찬가지고요. 헐값에 나오면 시장이 과연 2년 동안이나 기다려 줄까요?”

“흠…….”

유진의 말에 김수호 부사장은 생각에 들어갔다.

물론 다산이라고 다른 기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진이 그렇게나 확신하며 말하자, 조금은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유진을 지켜봐 온 다산 그룹 총수 일가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그를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

다산 그룹 계열사들의 수많은 중국 사업부에서 하나도 예측하지 못한 상하이시 서기장의 낙마를 알아차린 것부터가, 유진이 범상치 않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더군다나 극비에 진행 중이던 상하이 부부가오 치처와의 동업도 알고 있었고, 대양의 프리스케일 인수도 훤히 알고 있었다.

대양과 DL캐피탈 사이의 관계를 파고들어 터트린 것도 그였다.

그 정도면 단순히 운이 좋아 대박을 터트린 행운아 정도로 치부하기는 무리가 있다.

적어도 정보력이라는 면에서만큼은 인정을 해 주어야 했다.

“르네사스란 말이지…….”

프리스케일이 대양에 넘어가면 큰 문제이지만, NXP나 인피니언에 인수되면 그다지 걱정은 없다. 하지만 르네사스라면 조금 곤란하다.

일본인의 손에 자동차 반도체가 전부 넘어간다면…….

이때 즈음의 자동차 회사들은 미래에는 전장(電裝)이 자동차 산업을 지배하게 될 것을 이미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다산자동차의 국내 라이벌은 대양자동차이지만, 세계적으로 본다면 역시 일본의 도요타가 바로 반드시 넘어서야 할 궁극의 적수이다.

그런데 도요타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르네사스가 프리스케일을 접수한다?

어쩌면 대양에 넘어가는 이상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 프리스케일을 인수할 자금은 있고?”

김수호가 살짝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묻는다.

“없으면 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월스트리트에서 놀다 보니 차입에 맛이 들었군.”

“뭐. 사업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사업이란 것이 그렇지. 남의 돈으로 하는 게지.”

곰 아저씨는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삼켰다.

하필이면 근 10년 내에 가장 자금이 말라 있는 지금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듣고 보니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니다.

“아직 대양이 완전히 손을 떼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한 번 두고 보세나.”

김수호 부사장은 유진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그 양반 아주 잔뜩 열이 받아 있겠구만. 내 그 노인네 사업하는 걸 지켜봐 왔는데, 이번처럼 혼쭐이 난 적은 근 20년 동안 없었지.”

다시 화제가 대양 그룹 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마냥 손해를 보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주가가 정상 반응 이상으로 떨어진 느낌입니다.”

유진은 대양 그룹 주가 하락에 대양의 손길이 뻗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주가 하락에 대한 대양 그룹의 반응이 너무 더뎠다.

대양전자에서 조금 더 빠르게 프리스케일에 대한 손절을 발표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양에서는 주가 하락을 수수방관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지.”

김 부사장도 동의한다.

“그래서 자네, 이번 공매도로 적지 않게 이득을 보았다지?”

“네. 꽤 재미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재미를 볼 수 있는 부분이 더 남아 있다.

대양 그룹은 사태가 끝났을 거라 믿고 있을 테지만, 유진이 준비한 작은 폭탄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쾅!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해!”

노인의 고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렁찬 소리가 저택을 뒤흔들었다.

“누가 근석이를 이렇게 놔둔 거야? 누가 근석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을 해?”

류 회장의 고함이 터져 나오는 동안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국발 뉴스입니다.”

오 실장도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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