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사고
외국에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고국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비슷한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장사를 하는 사람끼리,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끼리.
유진이 어울리던 사람들도 그랬다.
대개가 대기업 미주 지사 출신이거나 전문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펍에 모여 예전 잘 나가던 때의 일을 하염없이 풀어 놓고는 했다.
다산자동차 미주 본부의 뉴욕 지사 지사장을 지내다가 은퇴해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김기범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지인들이 그렇게 어울리다가 친해졌다.
하지만 대양전자 뉴욕 지사에 다니다가 미국인과 결혼해 눌러앉은 정용수는 유진이 의도적으로 다가선 사이였다.
대양 그룹과의 분쟁이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유진은 여전히 대양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에 있는 동생은 길고 긴 소송이 끝난 뒤에도 대기업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알아내면 동생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싶었기에, 유진은 정용수라는 사내와 때때로 어울리게 되었다.
“한국 대기업의 해외 지사 사람들이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업무가 뭔지 알아?”
그날도 다산자동차에서 일했던 김기범이 말꼬를 텄다.
똑같은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이나 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 대개 비슷한 행동들을 하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듣고 있었다.
“VIP가 올 때잖아.”
그들 모임에 막 끼어들기 시작했던 정용수가 신이 나서 말을 받았다.
“VIP가 그냥 들르러 온 경우는 차라리 나아. VIP 가족이 여기서 뭔가를 하잖아? 그럼 완전히 몸종 노릇을 하게 된다고. 나 대양에 다닐 때, 그 집 넷째 아들이 여기서 대학 다녔잖아. 라과디아 커뮤니티 스쿨이라고.”
그날은 김기범을 대신해서 정용수가 썰을 풀었다.
“라과디아 커뮤니티 스쿨이면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가는 데지?”
“어. 심지어 영어 능력이 신통치 않아도, 부설 어학원만 들어가면 프리패스야.”
“영어도 안 되는데 무슨 유학이야.”
대기업 미국 지사까지 와서 일할 정도라면 다들 엘리트 사원 출신이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외까지 와서 한국의 전문대와 비슷한 수준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그저 어이없는 돈지랄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그 넷째 아들 녀석은 그랬어. 여기 처음에 왔을 때, 영어는 ABCD밖에 모르더라고. 그래도 자기 아버지한테는 아주 끔찍하게 이쁨을 받았던 모양이야.”
“언제 일이야? 류근수 회장 아들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나?”
“아니. 그 류 회장 말고, 선대. 창업주 말이야.”
“그 노인네 아들이 뉴욕에서 대학을 다닐 때, 자네가 여기 있었다고? 대체 자네 나이가 몇이야?”
“그 집 넷째 아들이 그때 스물이었지. 류 회장이 여든일곱인가 여든여덟인가 그랬고.”
“뭐? 그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그럼 몇 살에 본 거야? 예순일곱? 예순여덟? 힘도 좋네. 노인네가.”
김기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게 늦게 본 자식이니 얼마나 이뻤겠어? 듣기로는 아주 심장이라도 빼 줄 모양으로 이뻐했던 모양이야.”
“하…… 그럼 서출?”
“아니. 그것도 아니야. 예순쯤이었나? 이제 막 스물 넘은 여자를 재취(再娶)했다네. 물론 남사스러우니까 결혼식 같은 건 없이. 그러니까 정식 부인에 호적에 올린 적자(嫡子)지.”
“진짜 그건 존경스럽네. 보통은 남들한테 알리기 싫다고 호적에도 안 올리고 그러지 않아?”
“존경은 개뿔. 여하튼 그때 내가 그 넷째 아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거든. 딸려 온 식솔들이 좀 있었어. 가정부랑 비서에 경호원까지 말이야. 근데 여기 사정은 어둡잖아. 그래서 내가 한 몇 달 정도만 알려 주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더라고.”
“힘들었겠네.”
비슷한 경험이 있던 김기범이 거들었다.
오늘은 자기 이야기를 떠들지는 못하지만, 딱히 불만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녀석 아주 지독한 망나니였어. 학교는 안 나가고, 낮에는 날 불러서 여기를 가자, 저기를 가 보자 종살이를 시키고, 저녁이면 어디서 또래 녀석들을 금세 사귀어서는 매일 술이나 퍼 먹고…… 사고도 몇 번 쳤지. 폭행이라든지.”
정용수는 김기범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 큰 꿈을 품고 대기업에 들어가, 인정을 받아 미국의 뉴욕 지사까지 왔는데, 막상 시키는 일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의 술 시중 따위였으니 아마도 쌓인 것이 많았을 터였다.
“그런데 옆에 있다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더라고. 아버지가 재벌 회장이기는 한데, 언제 꼬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 늙은이였지, 아버지뻘을 훌쩍 뛰어넘는 노인네들이 형제라고 있는데 혹시라도 부친이 이뻐하는 막내한테 회사를 물려주기라도 할까 싶어 견제하지.”
정용수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이 돼? 이제 겨우 스물 먹은 아이한테 회사 지분이 넘어갈까 걱정하는 쉰 넘은 형들이 셋이나 있단 말이지. 그것도 여기 와서나 스물이지, 들어보니 열 살 넘어가면서부터 애가 그걸 느낀 모양이더라고. 애가 삐뚤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한데 그 삐뚤어지는 정도가 아주 심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냥 술과 여자로 만족하는 것 같았어. 근데 어쩌다가 마약을 접한 모양이야. 여기 마약 구하기가 좀 쉬워. 그래도 한동안은 자기 돌봐 주는 사람들 몰래 클럽이나 다른 녀석 집에서 하고 들어갔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결국은 들키고 말았지. 그래서 조용히 끌려가 귀국하고 말았지. 여하튼 그때처럼 기뻤던 때가 없었다니까.”
정용수는 회장의 넷째 아들이 귀국한 것이 너무나 기뻤던 모양이다.
그날 들었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한 것들이지만, 유진에게도 동생인 유성에게도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기업 식솔이 미국에 와서 흥청망청 지내며 술과 약에 빠져 살던 이야기나, 회장의 사망 이후 형제들의 분란이 발생한 정도야 어느 기업에서나 있을 만한 일이다.
당시라면 몰라도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라 기자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유진은 그날의 일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두었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유진에게 있어서, 그날 들은 이야기는 이제 꽤 쓸모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류 회장이 엄청 아꼈었지. 그룹을 막내한테 주고 싶어 했던 모양이야.”
대양 그룹 회장이 90이 넘어서까지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아들들의 경쟁을 그냥 둔 것은 어쩌면 막내아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내심으로는 막내가 그룹을 이끌 만큼 나이를 먹고, 연륜이 생길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그때쯤이면 이미 은퇴할 나이가 되어 버린 다른 세 아들을 건너뛰고 막내에게 대양 그룹을 물려주려 한 것처럼 느껴졌었다고 했다.
“엄마를 닮아서인지 생긴 건 아주 멀끔했어. 어지간한 배우 뺨치더라고. 걔네 엄마? 봤지. 가끔 아들 보러 왔다 가고는 했으니까. 그때 마흔 조금 넘었을 땐데, 난 세상에 그 나이에 그렇게 이쁜 여자는 처음 봤어.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천하의 대양 그룹 회장님이 첩도 아니고 정실로 들였겠지. 하여튼 애가 돈도 있겠다, 얼굴도 환하겠다,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스무 살이 조금 넘는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그리했다는 것은, 그 노인이 그 여자를 그만큼 아끼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나 망나니 짓을 하던 놈인데, 명성 그룹 집안 딸과 결혼을 하더군. 역시 그쪽은 끼리끼리 연결이 되는 모양이야. 그런데 마약하던 걸 명성에서 알았으려나 몰라. 명성이 대양에게 꿀리는 재벌도 아닌데, 약쟁이 사위를 반가워하겠어?”
대양 그룹 막내아들은 결국 그런대로 잘 풀렸던 모양이다.
비록 대양 그룹의 대권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실속 있는 계열사를 물려받아 대양과 명성 양대 그룹에 지원을 받아 가며 편하게 살고 있다고 들었다.
유진은 궁금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그리고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라 생각하는 형제들의 입장은 어떨까?
- 오늘은 종일 클럽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엑스터시로 추정되는 약을 복용하는 영상을 첨부합니다.
- 콜걸들과 함께 시 외곽의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맞은편 방을 잡아 다음날 나올 때까지 감시했습니다. 영상 첨부합니다. 호텔 투숙 비용 청구합니다.
- 소호의 뒷골목에서 딜러에게 정체가 불명확한 약을 구매하였습니다. 위험수당 청구합니다.
- 호텔에서 에스코트 서비스를 불렀습니다. 영상 첨부합니다.
- 교내에서 친구들과 마리화나를 피웠습니다. 영상 첨부합니다.
유진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뉴욕의 탐정이 보내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여러 명으로 된 팀이 24시간 밀착으로 붙어 벌써 두 달 동안 대양 그룹 넷째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위법적인 행위가 있을 경우 전부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받은 영상만도 수십 개에 달했다.
이 정도면 미국에서도 류 회장의 막내아들을 처벌받게 하기 충분할 정도였다.
그걸 위해 지불해야 했던 비용이 적지 않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우니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이제 이걸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만 선택하면 된다.
* * *
“명성전자 사장님, 사모님과 만나 보았어요.”
“그래. 수고했네. 그쪽은 뭐라고 하나.”
자기보다 40살이나 어린 부인을 대할 때면 대양 그룹 회장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상이하게 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회장의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그 아이도 보스턴에 있으니, 조만간 날을 잡아서 둘이 한 번 만나 보게 하면 어떻겠냐 묻더군요. 요즘은 옛날이랑 달라 당사자들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면서요.”
“그쪽 집안은 그런 모양이더군.”
“저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역시 근석이가 마음에 들어야겠죠.”
“그렇지. 그 애 마음에 들어야지.”
“그런데 그 아이가 하버드에 다닌다니 조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며느리감에 비해 학력이 너무 달리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아들이 며느리에게 무시라도 당할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따위 걸 뭐하러 걱정하누? 학벌이야 그냥 감투지.”
류 회장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무시했다.
“그러겠죠? 무슨 서민도 아니고 학벌을 신경 써요.”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 너무 신경 쓸 거 없네. 근석이한테 언제 한번 시간이나 내라고 해.”
“네. 그렇게 할게요. 참 다행이에요. 명성 정도 되는 집안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굉장히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대양 그룹 회장 아들의 상대로는 적어도 같은 4대 그룹 안에 들어가는 집안 자식이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죽어도 자네랑 근석이 구박할 사람은 없으니까.”
투박하게 말하고 있지만, 노인의 말에는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씀 드리는 거 아니에요. 다시는 그런 말씀 마세요. 회장님 아직도 정정하시니 근석이 장성해서 어엿한 아들 몫 할 때까지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디리링! 침대 옆 테이블 위에서 인터폰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직 어린 자식을 걱정하는 애정 넘치는 부부의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누구야? 이 시간에?”
노인은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듯 한마디 했다.
“무슨 일이죠?”
조금 전까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여인이 인터폰에 물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사고가 생겼습니다. 급히 보고를 드려야 해서요.
“알았어요. 들어와요.”
여인이 대답하고, 잠시 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당직 비서를 맡은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급히 들어와 당황한 얼굴로 보고를 한다.
“무슨 일이야? 또 무슨 사고? 말레이시아인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도련님께서.”
“근석이가요?”
먼저 반응한 것은 여자 쪽이다.
“지금 경찰에 체포되셨다고 합니다. 마약 복용과 폭행으로…….”
“뭐라고?”
노인의 음성은 노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지금 어디에요? 경찰서인가요?”
회장 부인의 목소리는 오히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변호사는 보냈어요?”
“네. 지금 보석 협의 중입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은 단순 마약 사범에게는 한국처럼 그렇게 엄벌을 처하지는 않는대요. 폭행도 합의만 보면 되고요. 전 오히려 회장님 혈압이 더 걱정돼요. 윤 비서, 우리 나가서 얘기해요. 회장님께 심려 끼치지 말고.”
회장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그런 정도로 충격받지 않으니, 그냥 예서 얘기해.”
류 회장이 만류했다.
“그래요. 그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가요?”
“저, 경찰서로 잡혀가신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뭔가요? 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네. 사실은…… 도련님께서 클럽에서 약물을 하는 장면이랑, 폭행하는 장면…… 그리고 경찰에 잡혀가는 장면까지…… 누가 녹화를 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뭐라고!”
“뭐예요?”
두 내외의 날카로운 고함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