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딜 브레이커
“대체 뭣들을 하고 있는 건가? 수행원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경호원들은?”
“도련님께서 번잡스럽다고 하셔서 최소한도의 인원만으로 수행을 하다 보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회장이 비서를 닥달하는 동안, 회장 부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어디에 올렸다는 거죠? 당장 조처를 취해서 내리도록 해요.”
“그게…… 미국인 계정이고, 연락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 서비스하는 회사에 연락해서 당장 계정을 폐쇄하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해요. 빨리.”
“알겠습니다.”
“아. 그 동영상이라는 거, 어디서 볼 수 있죠?”
비서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서 회장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사람들이 가득한 클럽에서 젊은 사내가 한 여자의 얼굴을 내리치는 모습이 플레이되기 시작한다.
남자가 들고 있던 유리병으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형이 허물어진다.
“이건…….”
회장 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단순한 폭행이라고 보기에는 도가 지나쳤다.
“이게 지금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거지? 뭐 해? 빨리 가서 어떻게든 조처해!”
그녀가 윤 비서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윤 비서가 허겁지겁 자리를 뜬다.
“회장님…….”
부인이 다시 남편에게 몸을 돌렸다.
“명성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아야 해요.”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뿐인 모양이다.
“늦었네. 이미.”
류 회장은 명성의 정보력이 대양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 근석이…… 이대로 두면 안 돼요. 회장님도 아시죠.”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한 채였다.
“저 회장님 곁에서 20여 년 동안 아무것도 바란 거 없어요. 오직 근석이 하나 잘 되기를 바란 거뿐이에요. 정말로 안 돼요. 저 사실 무서워요. 회장님 아드님들.”
여자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티라도 내는 것인지, 냉혹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근석이 일은 잘될 터이니.”
마찬가지로 딱딱한 얼굴을 한 회장이 애처를 다독였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그에게도 그런 얼굴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잘되어야죠. 잘되어야지 말고요……. 흑!”
근석의 부모는 자식의 과격한 폭행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버린 피해자에 대한 걱정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날 밤, 류 회장도 부인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퍼져 나가고 있는 폭행 영상의 확산을 막고, 그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비서진들을 닥달하고, 보고를 받는 사이에 어느새인가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녘에 회장의 아들들이 하나씩 찾아왔다.
모두들 침통한 얼굴로 회장과 어린 새어머니를 위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힐끗힐끗 참을 수 없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도 부친이 막내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부친의 애정이 줄어들지야 않을 터이지만, 섣불리 막내에게 큰 몫을 떼어 주겠다는 말은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 무렵, 안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다.
- 재벌 가문 자제들의 연이은 일탈에 기업이 흔들린다. 위태로운 오너리스크.
- 미국 유학 중 난잡한 마약 파티를 즐기던 재벌 2세 경찰에 체포돼
- 마약에 폭행까지. 재벌 2세의 도를 지나친 행동. 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냄새를 맡은 언론사들이 하나씩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친기업적 미디어는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언론도 있었다.
“밤사이 퍼져 버린 동영상 때문에 이미 손을 쓰기는 늦어 버렸습니다.”
“큰일입니다. 프리스케일 건이 이제 진정되나 했는데.”
“조금 있다가 장이 열리면 또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아들들이 한마디씩 내뱉는 동안 회장은 잠자코 있었다.
“시끄럽다, 다들 나가서 일들이나 보거라.”
참다못한 부친이 역정을 내고서야 아들들은 자리를 피했다.
괜히 남아 있다가 부친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그 비디오를 보니 노리고 있던 거더군.”
막내를 꺼려 하던 아들들이 사라지자, 노인이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우연히 찍은 게 아니야.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근석이한테 초점을 맞추고 있었어.”
아흔이 다 된 나이에도 노인의 눈은 매서웠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오 실장이 전화기를 한 손에 든 채 대답했다.
“더군다나 저 일이 어제 일어난 것도 아니라고 했지?”
“일주일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도련님을 모시던 수행원이 그 여자한테 적당하게 보상을 하고 돌려보낸 모양입니다.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다는군요.”
“어째서 그날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거야?”
“도련님께서 함구하라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수행원이 저희 쪽 직원이 아니라 미국 지사 직원이어서 제가 제대로 단도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제대로 못 했지. 고얀 놈…….”
다른 자식들과 달리 근석은 부친의 통제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류 회장 자신이 그에게만은 너무나 무딘 탓이었다.
당연히 아랫사람들 또한 근석에 대해서는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놈이 이런 짓을 꾸몄는지 당장 알아내!”
회장의 노기는 하룻밤 사이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네.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흥! 고얀 놈들. 어떤가? 세 놈 중 하나는 아니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친형제를…….”
오 실장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놈들한테 친형제가 무슨 의미가 있어. 더군다나 근석이는 반쪽짜리 형제인데. 놈들은 친형제라도 틈만 보이면 물어뜯으려 하는 것들이야.”
“아무리 그래도 지금처럼 그룹에 일이 닥쳤을 때 그러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자네도 물러졌군. 그놈들이 그걸 가릴 거 같아?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기회다 싶겠지.”
오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흐음, 범인 찾는 데에 너무 힘 빼지 말고 수습이나 제대로 하지. 보석은 될 것 같은가?”
“네. 금일 중으로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집 말고 다른 곳으로. 은밀한 곳을 수배해서 집어넣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 더 이상은 그냥 둘 수 없어.”
노인은 밤을 샌 몸으로도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 거 대양 그룹이라더라?”
유성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직까지 국내 뉴스에서는 마약과 폭행의 당사자가 어느 그룹의 자제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인터넷에는 이미 대양 그룹의 4남이라는 말이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잘됐네.”
유진은 동생에게 이번 사태의 뒤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동생에게도 비밀로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참 개차반인 놈이네. 동영상을 보니까 진짜 위험하더라.”
“그러게 말이야.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겠어.”
하지만 사실 그녀의 부상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찢긴 부위를 몇 바늘 꿰매고 항생제를 먹은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유진이 고용한 탐정이 그녀를 찾아가 경찰에 고소하라고 꼬드길 때까지, 그날 근석의 수행원에게 받은 두둑한 지폐 뭉치에 마냥 기뻐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탐정이 사건의 동영상을 제공하고 경찰에 고소하면 아주 두둑한 합의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당장에 변호사를 고용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자신을 폭행한 아시아인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나라의 무시무시한 부자집 도련님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가, 지금쯤 돈을 세는 꿈으로 부풀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가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야. 더 떨어지지는 않는다.”
“벌써 떨어질 만큼 떨어졌으니까. 오너리스크라고 해도 평상시의 일이지. 이만큼이나 떨어졌는데 더 떨어질 바닥도 없는 거야.”
하지만 유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원한 것은 주가에 더 영향을 미치는 따위가 아니었다.
유진은 명성 그룹과 대양 그룹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양의 회장이 사망한 다음에야 두 가문의 혼인 관계가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명성이 대양의 위기를 그냥 방치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제정신이 박힌 부모라면 자기 딸을 그런 망나니에게 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대양보다 한참 아래의 기업이나 언론사를 운영하는 집안이라면 모르겠지만, 명성 정도라면 굳이 그럴 이유는 없다.
“그럼 다시 대양전자 주식이나 매집해 볼까.”
“다시 올라갈 거 같아?”
“어. 틀림없이. 이번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할 테니까.”
“그러겠지?”
유성도 이제는 제법 국면을 보는 눈을 키워 갔다.
유진은 공매도로 벌어들인 돈을 그대로 사용해 대양 그룹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닥까지 떨어진 대양전자 주식과 적지 않은 타격을 본 대양자동차 주식 위주였다.
이번에도 적절한 레버리지를 사용한다.
지난번과는 달리 대부분의 자금을 외국계 투자기관을 통해 거래했다.
공매도를 때릴 때는 감출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미디어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공연하게 공매도를 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더 은밀하게 추진할 생각이다.
당연히 국내의 증권사를 통한 매매는 생각지도 않는다.
한국의 개인 정보는 만인의 공공재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매집이 한창 진행 중일 무렵, 슬슬 반등이 오기 시작한다.
류근석의 사건은 상당한 화제는 되었지만, 대양 그룹 계열사 주가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대양전자에서 프리스케일 인수를 포기하고, 계약금 반환 소송을 하겠다는 발표가 나간 뒤 대양전자의 주가가 반등했다.
더불어 애널리스트들도 불확실성이 해소되었다며 지난달과 비슷한 수준의 목표가를 제시했다.
뉴스에서는 대양이 프리스케일과의 계약금 반환 소송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개별 계약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상상의 계약 문구를 만들어 내며 대양의 편을 들었다.
계약금 반환 소송에서 승리하면 대양의 손해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당연히 주가가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내려갔던 주가를 당장이라도 회복시키고 싶다는 듯이 대양전자의 주가는 매일 상한가를 기록한다.
“돈이 복사가 된다. 복사가…….”
6억 달러로 공매도에 들어가 1조 5,000억 원을 만들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매수한 주가가 끝을 모르고 상승을 하며 자산을 마구 불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 주일이 지나자, 대양전자의 주가는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비해 오히려 10%는 더 올라 있었고, 다른 계열사들의 주가 또한 사태 이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오른 상태였다.
“대양전자에서만 2조 3,000억원이나 수익을 올렸어. 대양자동차에서 1조 2,000억 원. 나머지는 6,000억 원 정도.”
이번에는 유진 뿐 아니라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인지, 바닥에서 충분한 주식을 매수하지 못했다.
그래도 대양전자의 주가가 워낙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생각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당장 수익을 내기는 어렵겠다.”
주가가 정상화 되고 나서도 들고 있던 주식의 양이 꽤 되는 탓에 바로 현금화를 시킬 수는 없었다.
그 물량을 다시 털어 내면 주가가 요동칠 것이다.
“상관없어. 당분간은 대단한 이벤트는 없을 테니까.”
매수해 놓은 주식을 적은 손실로 현금화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형제에게는 할 일이 아직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