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쿠슈너 컴퍼니
“이제 다섯 층이 비었어.”
테레한로의 슈팅스타 빌딩 관리를 맡은 유성이 빌딩에 입주 중이던 업체 중 몇 곳을 이사비에 두둑한 보상까지 얹어 내보냈다.
“몇 달분의 월세는 충당할 수 있는 조건을 내걸었더니, 금세 이사할 곳을 찾아 나가더라고. 이제 빈 공간을 채워야겠네.”
“금세 찰 거야.”
이곳에 입주시킬 업체들은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다.
아마 다섯 층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내일부터 형이 말한 벤처 업체들과의 미팅이 있어.”
“두그루부터인가?”
“어. 그런데 두그루는 벌써 투자 유치를 꽤 받은 모양이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지분을 얻으려면 생각보다 많이 찔러야 할 거 같은데?”
“상관없어. 그쪽에서 원하는 만큼 줄 거야.”
“그렇게 대단한 회사야? 증권 거래 어플리케이션 제작 업체라고 했잖아. 그쪽의 시장성이 그렇게 큰가?”
유성이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벤처 기업에 투자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사업 아이템도 있지만, 그보다는 멤버들의 능력이 더 중요해. 창의력 넘치고 유연한 사고를 갖춘 경영진이 있거나, 아주 뛰어난 개발자가 있다면 투자를 고려해 볼 만하지.”
“두그루 쪽은 경영진이 뛰어난 거야? 아니면 개발진 쪽이야?”
“창업자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전공에 경제학 부전공이야. 아이디어도 훌륭하고, 사업에 대한 의욕도 넘쳐.”
“아! 능력자네. 증권 관련 어플의 시장성은 모르겠지만, 그런 능력자라면 언제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래. 지금의 두그루를 창업하고도 여러 개의 아이템을 계속 시험하고 있는 거 같아. 벌써 몇 번이나 시장성이 없어서 접었지만,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 이번에는 주식 거래 시장이 컴퓨터에서 모바일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경쟁자들보다 발 빠르게 뛰어들어 벌써 꽤 성과를 올린 모양이야.”
하지만 유진이 두그루에 투자하려는 것은 증권 어플리케이션 때문은 아니다.
앞으로 2년 뒤, 두그루는 한창 활황 중이던 암호화폐 거래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짧은 시간 사이에 국내 최대의 암호화폐 거래소로 성장한다.
그건 두그루가 그동안 꾸준하게 증권 거래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온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경영진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유진은 두그루가 어떤 전략으로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 전략만으로 그렇게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물론 전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업을 이끄는 리더의 리더십과 투지라고 생각했다.
만일 암호화폐 거래소만을 경영하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성공시킬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 거래소는 유진이 그리는 커다란 그림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성공이 보장된 업체와 협력을 이어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유진은 이미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 중인 비트 코리아, 빗원, 코인제로 세 업체에 꽤 후한 투자로 적지 않은 지분을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더불어 개발자들을 모아 따로 암호화폐 거래소를 개설할 준비도 하고 있다.
거기에 두그루까지 합류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한국에서의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양전자를 비롯한 대양 그룹 주식을 정리하는 동안 스무 곳이 넘는 스타트업과 초기 단계 기업들에 대한 투자 유치를 이어 갔다.
당일 주문 시 다음날 새벽 현관 앞에 배송해 주는 획기적인 서비스를 무기로 하는 신선 식품 전문 쇼핑몰 마켓 컬리넌.
간편 송금을 대표로 하는 종합 금융 플랫폼을 표방하고 나선 바비리퍼블릭.
지역 맞춤형 중고 거래 어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인 캐럿.
모두 2015년 중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기업들로, 앞으로 몇 년 사이에 해당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보여 줄 기업들이다.
그때 즈음 후배인 김환을 비롯해 유진이 명성상사에 다닐 때 동료들이 하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들에게 각각 업무를 배정해 주었다.
스무 곳에 달하는 업체들을 지원하는 일이라든지, 유아라, 이현욱 커플에게 맡긴 패션 브랜드 사업이라든지, 유성이 담당하는 암호화폐 거래사이트 등 해야 할 일은 잔뜩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합류한 인원들이 서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손발을 맞춰 온 사이여서, 새로운 조직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의 시간이 훨씬 단축된다는 점이다.
만일 헤드헌팅으로 그들만큼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려 했다면 조직을 갖추는 것에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적응하기까지의 시간이 다시 필요했을 터이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과 김환이 공을 들여 영입한 옛 상사에게 실질적인 사령탑을 맡겼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동생 유성은 대표의 직함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유성 스스로도 자신이 그룹은 커녕 하나의 회사를 이끌어 갈 능력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은 암호화폐 사업에 매진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일해 보기로 했다.
유진 역시 아무리 동생이라 해도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일을 맡길 생각은 없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옛 상사는 웃음기도 띄우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회장 같은 거 안 합니다. 요즘 누가 촌스럽게.”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룹을 거느리고 있으면 회장 정도는 붙여 줘야 합니다. 아니면 요즘 새로 뜨는 명칭인 의장님은 어떠신가요?”
“한국 법인은 제 관할이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미국 회사의 경영인이에요.”
뉴욕에 설립한 유진 명의의 법인에서 LA에 설립한 유진과 유성 형제의 법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의 슈팅스타 컴퍼니까지 일련의 출자 관계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
유진은 어디까지나 뉴욕 법인의 대표이고, 한국 법인의 대표는 동생인 유성이다.
“그러니까 회장님이 맞다니까요.”
옛 상사가 이번에는 조금 웃음기를 머금고 다시 주장했다.
“여하튼 맡기고 갑니다. 다음번에는 꼭 뉴욕행 비행기 표 보내 드리죠.”
“뉴욕으로 부른다면 뭔가 어려운 일을 시킬 것 같은데…….”
“휴가나 관광이라 생각하세요.”
“휴.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유진은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이제 또 다른 빅 이벤트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 6월에 생길 일을 대비하려면 슬슬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에 가셨다가 돌아오셨다고 들었어요.”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네. 이방카 트럼프의 패션 컴퍼니 설립을 위해 다녀왔습니다.”
그건 이번에 서울에 들른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지만, 상대에게 유진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조직은 이미 구성이 되었고, 늦어도 올해 말에는 런칭할 생각입니다. 기대해도 좋아요.”
“정말 기대되는군요.”
이방카는 약속한 브랜드 라이센스 비용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 우리 남편이 유진 씨에게 관심이 많아요. 언제 한 번 만나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번에 찾아온 것은 목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이죠. 부군이신 재러드 쿠슈너 씨는 굉장히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과 교류를 할 수 있다면 언제나 환영이지요.”
이방카 트럼프의 남편인 제러드 쿠슈너는 트럼프 가문처럼 부동산으로 부를 쌓은 가문 출신이다.
또 트럼프처럼 주로 남의 돈으로 사업을 꾸려가는 데에 일가견이 있기로 유명하다.
부동산 업계는 금융 투자 업계만큼이나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대선에 나선 트럼프가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월스트리트 자본에 좌우된다고 비난을 일삼았지만, 사실상 월스트리트의 금융 자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트럼프 그 자신이었다.
쿠슈너도 마찬가지다.
뉴욕에서 크게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이런저런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들의 돈을 아주 많이 끌어모은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런 그가 유진과 만나고 싶다고 한다면, 아마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것이다.
만남은 정말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바로 그날 오후, 재러드가 유진을 찾아왔다.
“좋은 투자 상품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역시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 사업에 투자를 권유한다.
“좋은 투자 상품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지요.”
“우리 가족 회사인 쿠슈너 컴퍼니가 5번가에 보유하고 있는 상업 빌딩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도 가장 중심지에 있는 곳이지요.”
“멋지군요.”
재러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면서도 유진은 짐짓 모른 체했다.
트럼프 가문 사람들과의 유대를 위해, 유진은 이미 그들 가족이 보유한 자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재러드가 말하고 있는 맨해튼 5번가 666번지는 무척 중요한 물건이다.
지난 2007년, 재러드는 18억 달러라는 거금으로 해당 빌딩을 매입했다.
그중 쿠슈너 컴퍼니가 투자한 돈은 5,000만 달러였고, 나머지 17억 5,000만 달러는 바클레이, UBS 등 대형 투자은행으로부터 차입해서 지불했다.
그리고 이듬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했다.
쿠슈너의 투자는 이제 재앙으로 돌아왔다.
2010년이 되자 이 건물의 평가 금액은 8억 달러로, 구매 가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현재 이 멋진 건물은 무려 30%에 달하는 미임대 공실을 보유 중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미국 경제가 회복된 뒤로 주변 오피스 건물들의 공실률이 겨우 10% 미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망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쿠슈너 컴퍼니는 이 애물단지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사방으로 투자할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장인인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적자투성이인 그 건물에 돈을 내어 줄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비어 있는 공간이 너무 많군요. 이래서는 수익성이 별로 없겠어요.”
“지금 내부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아 그렇습니다. 새롭게 단장을 하고 나면 최고의 가격으로 임대를 유치할 수 있을 겁니다.”
“내부 공사에 필요한 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이 빌딩은 뉴욕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에서도 중심지에 위치해 있죠. 아주 많은 기업이 그 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니 거기 걸맞은 투자가 필요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초고층으로 리모델링을 할 필요가 있어요. 80층 정도까지 올릴 수 있다면 수익이 엄청날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쿠슈너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이 맨해튼 5번가에서 쇼핑을 한다.
그리고 쿠슈너의 빌딩은 맨해튼 5번가의 중심부에 있다.
투자 가치로 봐서는 절대 나쁘지 않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 자리가 세계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로 남을 것을 생각한다면, 유진으로서도 탐이 나는 곳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건물의 지분이 엄청나게 지저분하다는 데에 있다.
겨우 5,000만 달러로 뉴욕에서도 비싸기로 손꼽히는 건물을 사들였으니, 이자 부담이 굉장히 컸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타격을 입으면서 빌딩 지분의 절반을 다른 부동산 업체에 넘겼으며, 가장 가치 있는 상업 공간도 꽤 많이 팔아 넘겼다.
유진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리뉴얼에 성공한다면 투입된 비용의 몇 배를 회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뉴욕에서 콘도 사업을 하기 최고의 시기입니다.”
재러드는 이미 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자신의 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수완가였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돈을 끌어내는 것에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이 빌딩은 누가 봐도 문제가 너무 많았다.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한 거죠?”
“적어도 7억 달러는 필요합니다.”
재러드가 웃으며 말했다.
“7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어느 정도의 지분을 받을 수 있나요?”
“쿠슈너 컴퍼니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의 30%를 드리겠습니다.”
역시 입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다.
“지금 카타르 투자청과 이스라엘, 사우디, 중국 등의 투자자들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방카의 좋은 친구인 유진 씨에게도 이 멋진 투자의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쿠슈너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 빌딩의 수익성에는 의문이 많습니다. 그리고 장인이신 도널드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이 빌딩에 대한 해외 투자는 무척 어려워질 것 같은데요.”
“도널드가 백악관에 입성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재러드가 묘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트럼프는 아직 내년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는 트럼프를 잠재적인 공화당 후보로 보고 여론조사에 그의 이름을 항상 끼워 넣었다.
그리고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공화당의 후보군 중에서도 확연하게 낮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겨우 4%에 불과한 지지율을 갖고 있는 트럼프가 정말로 공화당 경선에 나설 것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아가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실없는 농담에 불과했다.
“물론이죠. 도널드는 지난 6년 동안 쉬지 않고 오바마를 비난했지요. 오바마는 틀림없이 많은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오바마를 싫어한다고 알고 있어요. 도널드는 그렇게 오바마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아주 훌륭한 대안이 될 겁니다. 물론 도널드가 지닌 매력도 한몫하겠지요.”
“재미있는 의견이로군요. 하지만 아주 그럴듯한 분석이에요. 마치 도널드의 마음속을 훑어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재러드와 이방카는 도널드에게 부족한 점을 메꿔 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파트너구요. 만약 도널드가 정말로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재러드와 이방카의 역할이 무척 클 겁니다.”
유진이 확신에 찬 어투로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