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슬레이트 파이낸싱
이번 생에서는 그린 캡스 클럽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윌리엄은 동거녀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진도 약혼녀와 파혼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다행히 결혼 이전에 알게 되어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한 명의 멤버인 테렌스에 대해서는 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시간 테렌스는 대북의 어디에선가 부인과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테렌스는 사랑하는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될 것이고, 또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이혼 대신 미국행을 선택하겠지.
유진은 테렌스의 부인의 바람을 막을 방법도, 막을 생각도 없다.
테렌스는 어쩌면 그때까지도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가족을 두고 미국에 와서도 새로운 만남을 원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윌리엄과 유진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했었다.
유진도 윌리엄도 몇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때때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니 후일 다시 테렌스와 만나게 되면, 혼자서만 녹색 모자를 쓰고 있을 테렌스를 위로해 주기나 할 생각이다.
“이번 주부터는 다시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이에요. 윌리엄도 올 거죠? 팀 카렐이 자기 지인들을 데려온다고 했어요. 알죠? 팀?”
헤지 펀드 딜리셔스 캐피탈에 근무하는 팀 카렐은 주말마다 유진의 자택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에 자주 방문하며 유진에게 자신을 어필하곤 하는 이였다.
“물론이죠. 팀의 지인들이라면 역시 그쪽이겠군요.”
윌리엄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딜리셔스 캐피탈에서 시네마 투자 부분을 맡고 있는 만큼, 그의 지인 중에는 방송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많았다.
그가 지인들을 데려오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 유진이 부탁한 일이었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다른 멋진 이성과의 만남이 아니던가?
“멋진 여자들이 잔뜩 올 거예요. 어때요?”
“잘 됐군요. 좋은 기회가 되겠어요. 꼭 참가하도록 하죠.”
그 주 주말의 파티에는 정말로 멋진 여자들이 잔뜩 왔다.
대부분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거나, 그쪽에 지원하려는 여자들인지라 하나같이 늘씬하고 미인들이었다.
이대로 미인 대회를 열어도 아주 치열한 각축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들은 한창 젊은 나이의 월가의 유망한 사내들로 가득했다. 서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로만 초대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파티는 젊은 남녀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에게 어울릴 만한 상대를 탐색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어때? 너도 괜찮은 사람 있으면 한번 말이라도 걸어 보는 게?”
유진이 동생에게 물었다.
이 자리는 단지 윌리엄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동생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다.
유성에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다.
지난 삶에서 유성은 대양 그룹과의 싸움에 인생이 매몰되어 갔었다.
부친이 힘겹게 일구 어놓은 회사가 대양의 술수로 망해 버린 뒤, 유성은 대기업의 불합리한 처사와 국가의 방치에 대해 저항하는 길을 택했었다.
대기업과의 하청 관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새롭게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고, 그러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느라 평범한 삶을 포기해야 했었다.
그때 즈음 멀리 미국에 나와 있던 유진은 그저 경제적인 도움만을 줄 수 있었을 뿐이다.
대기업과의 끝없는 싸움을 이어 가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족으로서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 삶에서는 동생에게도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뭐, 남자라면 멋진 여자들과의 로맨스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벌써 대여섯 명은 와서 인사하고 갔어.”
유성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든?”
“몰라. 뭔가 어색해. 다가오는 사람이 전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니까.”
“꿍꿍이는 누구나 다 있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그런 거 아니야? 내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혹은 저 사람과 가까워지면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까 싶어서.”
“너무 계산적이잖아.”
“어. 맞아 계산적인 거. 그게 나쁜 걸까? 그리고 아무런 계산도 없는 관계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거야?”
유진은 어떤 식으로든 계산이란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성과의 관계이든, 그저 친분을 위한 만남이든.
그런 계산이 반드시 금전에 관련된 것일 이유는 없다.
외모라든지, 인간성이라든지, 혹은 가치관이라든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이 가진 부나 권력 때문에 다가선다고 미리부터 걱정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 모르겠다.”
유성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권력이나 금력을 갖춘 사람들 주변으로는 계산적인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람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편하게 생각해.”
유진은 동생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건 가족으로서 지지해 줄 생각이다.
“요즌 투자 트렌드는 어떤가요?”
이날은 멋진 여자들을 잔뜩 데려온 팀 카렐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은 역시 슈퍼히어로 무비죠. 마블이나 DC가 시네마와 TV쇼를 전부 잡아먹고 있어요. 지난 10년 동안은 그래도 돈이 덜 드는 코미디가 잘 먹혔는데, 이젠 아니에요. TV쇼도 돈을 쏟아부어야 해요. 그러다 보니 필요한 투자 금액이 올라가고 있죠.”
“잘된 일 아닌가요? 그만큼 수익도 늘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참! 지난번에 말씀하진 자료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파티를 준비하는 대가로, 팀 카렐에게 그동안 그가 제안한 투자 자료를 보기로 약속했었다.
“잘됐군요. 그럼 월요일 어때요? 점심이나 함께하죠.”
“예.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팀 카렐이 무척 기뻐했다.
“오늘은 즐거워 보이네요. 윌리엄.”
“네. 정말 즐거워요. 솔로가 되니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벌써 몇 명이나 되는 미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유진에게 다가온 윌리엄은 조금 흥분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에이미와의 결혼을 결심했던 것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는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남아 있었다.
역시 사랑하던 사람의 배신에서 오는 아픔이 그리 쉽게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한동안은 꽤 힘든 시간을 보내겠지.
“벌써 약속을 두 개나 잡았어요.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거 같아요.”
윌리엄이 잠깐 튀어나온 우울한 표정을 금세 지워 버리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강한 인간이다. 억지로라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 씨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나도 오늘 멋진 미녀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알고 있던 바이지만 새삼 윌리엄의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은 파티의 호스트인 유진일 것이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의 젊은 남녀들이 짝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정신 연령은 그들보다 두 배는 많은 유진은 어쩐지 자기 혼자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것을 보면, 과거로 돌아왔다 해서 머릿속까지 젊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월요일은 약속대로 팀 카렐과 함께 점심 식사를 즐겼다.
“올해에도 디즈니의 약진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소니도 나쁘지는 않은데, 그쪽은 어딘지 어수선해요.”
식사 시간 내내 팀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풀어 냈다.
“역시 내년에도 디즈니에 투자하는 쪽이 낫겠군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럴 것 같습니다. 요 몇 년 동안 디즈니의 투자 실적이 가장 좋았으니까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유성이 물었다.
“큰 회사들은 자기 돈으로 투자해서 영화 찍는 거 아니야?”
“아무리 메이저 스튜디오라해도 온전히 자체 보유 자금으로 투자를 하기는 어려워. 특히 최근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제작하는 경향이 높아진 탓에 투자금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들의 자금을 받아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야. 보통은 론스타 같은 사모 펀드의 투자를 받지.”
“론스타? 아! 알아. 론스타.”
한국에서 론스타는 사모 펀드의 대명사와 같으니 금세 이해한다.
“돈을 싸 들고 영화사를 찾아가서 당신 무슨 영화 찍는다는데 내가 투자하겠소, 하면 되는 게 아니야. 여하튼 내부적인 시스템이 있으니까. 또 예전에는 개별 영화별로 투자를 받고는 했는데, 요즘은 위험 분산을 위해서 전문회사가 구성한 슬레이트 파이낸싱(slate financing)을 유치하지.”
“그건 또 뭐야?”
“영화를 10개에서 30개 정도 묶어서 하나의 투자 상품으로 만들어 투자자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거야. 그중 상당수는 흥행에 실패해도 몇 개만 대박을 치면 충분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금융 상품 같네.”
“뭐, 비슷해. 할리우드나, 금융계나 이제는 상당히 고도화되서 위험을 최대한 회피하고,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방법을 찾아낸 거지.”
“그러면 형도 그런 투자를 하려는 거야?”
“고려해 보고 있어. 식사가 끝났으니 이제 갖고 오신 자료를 볼까요? 자리를 거실로 옮기죠.”
유진의 말에 팀 카렐이 재빠르게 일어섰다.
지난 몇 달 동안이나 고대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거의 한 달에 두 번씩은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날아온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저희 딜리셔스 캐피탈에서 취급하는 상품입니다.”
팀 카렐은 두툼한 서류철을 몇 권이나 내놓았다.
“이게 형이 말한 슬레이트 파이낸싱(slate financing)이란 거구나?”
유성이 서류를 뒤척여 보고는 말했다.
각각의 서류철에는 수십 개의 영화들이 한 뭉치로 묶여 있었고, 각 영화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과 감독과 캐스팅, 투자 현황 따위가 적혀 있었다.
“그런 모양이지?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유진도 한 권을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Skydance Media…… 파라마운트 거네.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 닌자터틀: 어둠의 히어로,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스타트렉 비욘드, 벤허?”
“벤허. 이걸 또 하나?”
벤허를 새로 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망한 영화인 모양이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하는 작품들은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유망한 프랜차이즈인 트랜스포머도 폭망은 확정이고, 스타트렉도 별반 신통치 않다.
“다음은 TSG 엔터테인먼트라…… 20세기 폭스인가? 엑스맨: 아포칼립스,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 이웃집 스파이, 에이리언: 커버넌트…….”
그렇게 죽 서류들을 하나씩 넘겨 가다 보니, 5대 메이저에서 투자하는 영화는 물론이고, 미니 메이저급 영화들도 보였다.
“라이언스게이트…… 파워레인져스: 더 비기닝 , My Little Pony: The Movie…….”
벌써 망작의 기운이 스멀거린다.
“그런데 라이언스게이트와 서밋이 묶여 있네요?”
“네. 서밋 엔터테인먼트가 라이언스게이트의 자회사라 그렇습니다.”
자회사라고는 하지만 서밋의 아웃풋이 훨씬 더 훌륭하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헝거 게임 시리즈, 그리고 무려 이병헌이 나오는 RED 시리즈들을 찍고, 이번 해에는 존 윅까지 배출해 냈다.
“핵소 고지, 존 윅2, 메카닉 - 리저렉션…… 여기는 흥미가 가네요. 디즈니 스튜디오와 라이언스게이트 이 두 곳에 투자를 하고 싶군요.”
그리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상품을 결정할 수 있었다.
디즈니야 지금부터 주욱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갈 테니 투자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고, 써밋 엔터테인먼트는 나름 톡톡 튀는 영화를 내놓으니 유진의 구미에 맞았다.
“그런데 이런 영화에 투자하는 게 큰돈이 돼?”
“한 편의 영화에 투자하는 것에 비하면 딱히 대단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열 개의 영화에 투자하면 한두 개의 대박이 나오고, 여섯 개쯤의 평작과 한두 개의 망작이 나오니까 평균으로 보면 일반적인 금융 투자와 비슷한 수준일 거야. 하지만 운이 좋으면 짭짤한 수익을 남길 수도 있지. 할리우드에서는 매년 두어 개의 투자 대비 대박 작품이 나오고는 하니까.”
물론 유진은 그런 소소한 수익 때문에 영화에 투자하려는 것은 아니다.
“디즈니에 4,000만 달러, 그리고 라이언스게이트에 3,000만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이제는 푼돈 같이 느껴지는 금액을 부른다.
“알겠습니다. 계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개별 영화에 대한 투자도 가능할까요? 여기서 몇 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네요.”
“적절한 수준의 투자라면 타진해 보겠습니다. 리스트를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우선 이거요.”
유진은 써밋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 중인 작품 하나를 뽑았다.
“제가 데이미언 샤젤 감독의 전작을 너무 즐겁게 봐서 말이죠. 이 영화라면 투자 금액에 상한 없이 원하는 만큼 수표를 끊겠습니다.”
“이건 할리우드에서도 꽤 기대작이지요. 감독의 데뷔작이 저자본으로 아주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니까요.”
“그리고 이것도요.”
20세기 폭스의 데드풀도 골랐다.
“이건 감독도 증명되지 않았고, 주연 배우도 영 신통치가 않아서…….”
“그래도 연기력은 훌륭하잖아요?”
“하긴…… 여하튼 원하시면 알아보겠습니다. 뭐, 거절할 것 같지는 않네요.”
“디즈니에서 만드는 것은 어떤 거라도 좋아요. 그리고…….”
유진은 그 외에도 몇 개의 작품을 더 선택했다.
“전부 원하는 만큼 투자하겠다고 해 주세요.”
“그렇게 하죠.”
유진은 무슨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듯 투자할 영화들을 골랐다.
팀 카렐은 그렇게 유진이 하나씩 고를 때마다 즐거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진의 요구대로라면 적어도 1억 달러 이상 투자가 가능해 보였고, 그럴 경우 그에게 떨어지는 수수료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무슨 영화를 그렇게 많이 골랐어? 그것들도 다 돈이 될 거 같아?”
블랙록에서 나오며 유성이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큰돈이 되겠어. 차라리 적당한 레버리지로 주식에 넣어 두거나, 아니면 코인에 넣어 두는 게 낫겠지.”
“그런데 왜?”
“우선은 안전한 투자라고 생각했어. 저 많은 영화들이 전부 망하지는 않을 거 아냐?”
“하기는. 요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흥행을 휩쓰니까. 손해는 안 보겠다.”
“그리고 재미있잖아.”
“맞다. 형이 투자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기분은 좋겠다.”
“그렇지?”
물론 단순히 기분 좋으려고 억 소리가 나는 금액을 투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