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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51화 (51/363)

51화 야망

그날 저녁, 요안나를 불러 다시 자택에서 만났다.

“어떤 이유로 나와 일을 하고 싶다는 거죠? 내 투자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것은 알겠는데, 바클리스를 나오면서까지 비서 노릇을 할 만큼 매력적인 직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바클리스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물론 많겠죠. 하지만 지금은 유진 캉 곁에서 배울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을 것 같아요.”

“원하는 급여는 어떻게 되죠?”

“바클리스에 있을 때의 절반이면 돼요.”

세계구급 투자 은행 애널리스트의 평균 봉급은 10만 달러 내외. 절반인 5만 달러면 맨해튼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신입 사원 봉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기는 그녀에게 급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덜란드의 왕족으로서 그녀는 매년 국가에서 100만 달러가 넘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유럽의 왕족이 국가에서 지원을 받는 것은 완전하게 공짜라 볼 수는 없다.

거액의 연금을 받는 대가로 다양한 공식 행사에 참여하며 이런저런 역할을 해야 한다. 대개는 외교 공식 행사나 국가 행사에 참여해 화사한 미소를 보여 주는 것들이다.

요안나는 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 그러한 왕실 공식 행사에 빠지고 얼굴을 감췄다. 공주에게도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는 명분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네덜란드에서 학교 생활을 하는 대신 미국으로 건너와 하이스쿨을 다니다 뉴욕대학교에 입학해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그녀가 공식적인 왕실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적어도 천만 달러 이상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 돈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10만 달러짜리 애널리스트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다시 5만 달러가 줄어드는 거야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요안나의 상사에게 추천서를 받았어요. 재미있더군요. 성실하고 총명하지만 꽤 건방지다. 동료들과의 인화에 재능이 부족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이다. 요안나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나 데이비드 워커가 보증한다.”

“음…… 데이비드가 날 그렇게 평가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렇게라는 게 어떤 부분이죠?”

“건방지다거나, 인화를 못 한다거나 하는 부분 말이에요. 한 번도 제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거든요. 미리 알았다면 고쳤을 텐데 말이죠.”

“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그나저나 상사의 추천서라고 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추천서를 받았네요. 데이비드 워커라니요. 너무 거물 아니에요?”

“어쨌든 제 상사는 맞으니까요.”

요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바클레이에 다니고 있으니 바클레이 회장을 상사라고 부를 수야 있겠군요. 이렇게 추천서까지 직접 써 줄 정도면 친분이 있는 모양이지요?”

“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에요. 영란은행에 있을 때부터 저희 가족의 자산 중 일부를 관리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죠.”

유진은 요안나가 굳이 바클레이 회장에게서 추천서를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이 강조한 것이 신뢰성이니, 그걸 뒷받침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런던 증권 거래소 운영 위원회 회장, 런던 투자 은행가 협회의 의장 등 거창한 직위를 수도 없이 역임하고 현재는 바클레이 회장인 데이비드 워커가 직접 보증하는 것보다 더한 추천서는 어디에서도 받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 국왕의 추천서가 덧붙여 있다면 좀 더 쇼킹했을 지도 모르지만, 요안나는 아직 그것까지는 밝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좋아요. 바클리스 회장의 추천이니 믿어 보기로 하죠.”

“그럼 저 취직한 건가요?”

요안나가 한껏 밝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우선은 인턴으로 채용하죠. 기간은 3개월. 어떤가요?”

“좋아요. 3개월 동안 제 능력을 보여 드리면 정식으로 채용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하죠.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한가요?”

“지금부터요.”

무척이나 성급한 여자였다.

“우선 바클레이에 사표를 내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건 오늘 출근하자마자 냈어요. 지금쯤은 처리됐을 거예요.”

“내가 채용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행동력에는 유진도 살짝 놀랐다.

“어떻게 해서든 취업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요안나의 눈에서는 그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함께 일하는 것으로 하죠. 우선 여기 서명을 한다면요.”

유진은 준비해 두었던 비밀 유지 계약서를 내놓았다.

유진의 아래에서 일하며 얻은 정보는 유진의 허락 없이 외부에 누설하지 않고, 해당 정보를 통해 어떠한 이익도 취하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월스트리트의 표준 계약서에 조금 더 디테일한 비밀 조항을 나열했고, 위반 시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무한하게 진다라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알겠어요.”

요안나는 잠깐 동안 서류를 읽어 보고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물론 본명과 직위까지 넣어야 하는 거 알죠?”

요안나가 서명하려는 순간 유진이 덧붙였고,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물론 본명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서명을 멈추고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에 대해 알아보신 모양이네요?”

요안나가 금세 얼굴을 풀고 말했다.

“중요한 일을 함께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아보지 않고 채용할 수야 없지요.”

유진이 코를 살짝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좋아요. 저도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이렇게 쓰면 될까요?”

네덜란드 국왕 빌험 8세의 장녀.

네덜란드 공주 요안나 폰 이젠부르크-메르홀츠.

요령 있는 요안나는 유진이 원하는 서명을 써 넣었다.

“좋아요. 네덜란드 공주의 사인을 받다니 굉장한 영광이네요.”

“저야말로 영광이로군요. 그런데…… 제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요. 바클레이에서도 데이비드 워커 경 말고는 달리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항상 명심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요. 우선은 나 말고 몇 명이 알고 있는 비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거예요.”

“음…… 알았어요. 좋은 교훈이로군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요안나를 보고 있으니, 확실히 그녀가 아직은 애송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쯤 지난 뒤에는 월스트리트를 뒤흔드는 거물이 될 여자이지만, 현재의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투자은행에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초심자에 지나지 않는다.

유진이 내놓은 비밀 유지 계약서에 번듯하게 네덜란드 국왕의 장녀라는 표현까지 넣은 것도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개인 요안나로서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첫 번째 왕위 계승자로서의 행동임을 인정하는 행위였으니까.

물론 그녀가 그걸 모르고 서명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완벽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요안나가 물었다.

“뮤지컬 좋아해요?”

유진이 대뜸 요안나에게 물었다.

“네?”

요안나는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는 얼굴로 유진을 바라봤다.

“나름 즐기는 편이에요. 오페라나 오케스트라를 좀 더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뉴욕에서는 뮤지컬도 나쁘지 않더군요. 무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요. 요즘은 진짜 필름은 거의 없는 편이잖아요? 특히 미국에서는 말이죠.”

유진이 그녀의 취향을 묻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요안나는 묻지 않은 것도 하나씩 꺼내 말했다.

“잘 됐군요. 오늘 저녁 뮤지컬이나 한 편 보러 가죠. 동생이랑 가려고 했는데, 녀석이 영 마땅치 않아 해서요. 마침 같이 갈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사실은 요안나와 함께 갈 생각으로 미룬 것이다.

“음…… 데이트인가요?”

“물론 아니죠. 요안나가 원했던 비서로서의 첫 업무라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겠네요.”

요안나는 데이트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네. 이대로 나가면 되겠군요.”

왠지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척 멋진 쇼였어요. 괜찮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인 알렉산더 해밀턴을 그런 식으로 그릴 줄은 몰랐네요.”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요안나는 활짝 웃으며 감상을 말했다.

“해밀턴을 좋아했었나요?”

유진은 사실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물론이죠. 해밀턴이야말로 지금의 미국을 만든 사람이 아니던가요? 이제 막 태어나는 신흥 국가에 자본주의를 뿌리내리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든 사람이죠. 해밀턴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그저 여러 개의 나라들이 허술하게 연결된 연방으로만 남았을 거예요. 어쩌면 그러다가 몇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정말로 감명 깊게 보았던지, 말이 많아졌다.

“네덜란드는 너무 늙어 가고 있어요.”

극장에서 나와 가까운 카페테리아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요안나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미국에 비하면 너무 활력이 떨어졌어요. 이대로라면 네덜란드는 언젠가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말지도 몰라요.”

요안나는 네덜란드의 공주로서, 그리고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단순하게 상징적인 존재 이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찾은 방법은 왕실의 재산으로 미국식의 거대 투자 기관을 운용해서, 네덜란드 산업계에 어떤 활기를 불어넣을 기회를 가지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진이 알기로 앞으로 20년 뒤쯤에 아주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네덜란드에 충분한 자극을 주는 데에는 성공하게 된다.

“야망이 있군요?”

“야망이요? 물론이죠. 왜요? 여자는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요? 동양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면서요?”

“천만에요. 요안나야말로 동양에 대해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요?”

“으음, 그렇군요. 사과할게요.”

요안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유진 캉에 대해서나 유진 캉의 고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은 모양이에요.”

“나도 마찬가지니 이제부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보스.”

요안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부터는 업무 파악을 합시다. 우선은 지금 진행 중인 투자에 대해 숙지하도록 해요.”

다음날, 이른 시간부터 출근한 요안나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블랙록을 통해 진행 중인 중국 증시 하락에 대한 투자에 대한 서류를 그녀에게 잔뜩 넘겨주었다.

“이게 전부 진행 중인 투자 계약인가요?”

“전부 파악이 되면,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 줘요.”

“알겠습니다.”

요안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투자는 아니군요. 굉장히 위험해요. 오늘 상해종합지수가 5,000을 넘었어요. 여기서 200억 달러를 풋에 넣다니…… 저라면 절대 이렇게 투자하지 않아요.”

요안나는 유진의 베팅에 혀를 내둘렀다.

“지난 2007년 이후 8년 만에 다시 5,000을 넘어선 거예요. 지금은 상승에 모멘텀이 쏠려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해요. 물론 거품도 많지만, 당분간 이 상승세가 꺾일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아요. 최소한의 헷징은 필요한데…… 보스는 오히려 추가 계약을 잔뜩 걸었군요. 그것도 전부 40% 이상 하락하지 않으면 휴지가 되는 계약에 10억 달러를 말이에요.”

“앞으로는 내 투자 방식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그리고 항상 요안나의 판단을 내게 말하는 것에 주저하지도 말고요.”

유진은 요안나를 네덜란드의 공주가 아니라 탁월한 분석력을 지닌 대안 제의자로서 고용했다.

물론 그녀가 원했듯이 비서 역할도 시킬 생각이다.

세상의 그 누가 일국의 공주를 비서로 부릴 수 있는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요안나는 여전히 우려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한 번 5,000을 뚫은 중국 증시는 다시 꿈틀대며 상승을 시작했다.

6월 12일, 상해종합지구는 고점인 5,178을 찍었다.

“심상치 않은데요?”

요안나는 다음날부터 종일 중국 증시 창을 띄워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이제는 요안나를 편하게 대하게 된 유진이다.

“진짜 천하태평이로군요…….”

요안나는 이날 단 한 번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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