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인턴
올라간 것은 언제고 떨어지기 마련이다.
종합지수 5,178를 기록한 중국 증시는 그날부터 무시무시한 하락을 시작했다.
그날 5050까지 떨어졌고, 다음날은 5000을 뚫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다시 4,800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일주일 뒤인 19일에는 4,500 아래로 내려왔다.
유진이 숏을 치고, 열흘 만의 일이다.
“벌써 50%의 수익이네요. 아무리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에요.”
요안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50% 수익이면 20억 달러지?”
“4,000포인트까지 내려가면 40억 달러를 벌어들이겠지요. 하지만 진짜는 그 이후부터예요. 옵션과 보험 계약이 발동할 수준까지 내려가면 정말 천문학적인 수익이 나겠어요. 3,000포인트에서 최하 100억 달러가 넘는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어요.”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휴지가 되는 옵션은 그만큼 높은 수익을 가져온다.
“어느 정도까지 유지하실 건가요?”
이제는 조금 불안감을 내려놓은 요안나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요안나는 저점이 어디쯤이라고 생각해?”
“솔직히 버블이 꺼질 때는 저점이 어디인지 알 방법 따위가 어디 있겠어요? 고점이 5,000이었으니 연초인 3,000 수준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지난해 최저점인 2,000 미만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최악의 경우 10분의 1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시장이 그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보는군.”
“특히 중국 증시는 불확실성이 더욱 크잖아요. 다른 시장에 비해 일반인들의 비중이 월등히 커요. 상해 주식 시장에 외국인의 유입이 차단된 까닭에 그런 것도 있고, 또 정권에서 국민들의 주식 투자를 권장해 와서이기도 하지요.”
말이 길었지만, 결국은 예측 불가라는 말이었다.
“지수 선물과 주식 공매도도 보스가 투자 은행과 맺은 계약 포인트까지는 기다려 볼 만한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난 요안나는 자신의 대답이 그저 유진의 결정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요안나가 직접 투자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저라면…… 3,000포인트에서 어차피 옵션과 보험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얻게 되니 나머지는 2,400포인트까지 기다려 보겠어요.”
생각보다 과감한 결정이다.
하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옵션 계약으로 벌어들일 수익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조금 더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저점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말이다.
유진은 지수가 3,000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간 뒤로 다시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더 이상 증시의 하락을 방관하면 정권에도 피해가 올 것을 우려해 과감한 정책으로 증시 부양에 노력할 것이다.
그러니 3,000을 넘어서면 깨끗하게 정리할 생각이다.
“지금 유가 선물 가격이 어떻게 되지?”
며칠 동안 중국 증시의 하락세를 지켜보다가 이번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 확인해 봤을 때는 60달러 선을 오가고 있었어요.”
지난해 하반기에 유진에게 거액을 벌어 주었던 기름값은 유진이 손을 뗀 이후로 다시 점차 회복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 증시에서 벌어들인 돈 중에서 20억을 그쪽으로 돌리도록 하지.”
“롱인가요? 숏인가요?”
“요안나 생각에는 어떨 거 같아?”
“음…… 아무래도 중국 증시의 영향을 받을 거 같아요. 중국 증시가 앞으로도 더욱 무너지면 유가도 타격을 볼 거예요. 그러니까 공격적인 투자라면 숏을. 헷징을 한다면 롱이겠군요. 보스의 투자 스타일이라면 헷징 대신 최대한 수익을 늘리는 쪽이겠구요.”
“눈치가 빠르네. 오일 선물도 숏으로 가지. 최대한 많은 풋옵션을 잡으면서.”
그날 오후부터 유진의 투자 포트폴리오에는 오일 선물과 옵션도 포함되었다.
“데이비드가 언제 한번 시간 나면 보스를 만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한창 오일 선물에 투자를 시작한 6월 말 어느 날, 요안나가 바클레이 회장의 말을 전했다.
“데이비드 워커? 개인적으로도 자주 연락을 하는 모양이지?”
“가끔씩은요. 바클레이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식사를 하고는 했어요.”
일국의 공주쯤 되면 세계적 투자 은행 총수와 주기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는 것쯤은 별 게 아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하지. 어디서 보면 좋을까? 여기로 초대를 할까? 아니면 밖에서 만날까?”
“보스가 편한 대로 해요.”
“그럼 오랜만에 밖에서 식사나 할까? 요안나가 적당한 곳을 예약하고 이번 주 안으로 약속을 잡아 줘.”
공주님께서 비서를 자청했으니, 유진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그녀에게 일을 시킨다.
“그럼 버나딘이 어떨까요? 데이비드가 거길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하지. 그런데 예약이 쉽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그 정도쯤은 해결할 수 있어야 비서라고 할 수 있겠죠?”
요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 주 수요일 저녁, 맨해튼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데이비드 워커를 만났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반갑소.”
벌써 70이 훌쩍 넘어가는 노인인 데이비드 워커는 여전히 힘 있는 손아귀로 유진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워커 회장님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현재 바클레이의 회장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전엔 모건 스탠리의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까지도 모건 스탠리의 고문으로 재직 중인 데이비드는 두말할 것 없이 영국과 미국의 금융계에 걸쳐 굉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거물이다.
유진으로서도 허술하게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데이비드라고 불러요. 참, 우리 요안나는 어떤가요?”
데이비드 워커는 네덜란드의 공주를 마치 조카나 손녀처럼 친근하게 불렀다.
“굉장히 명석한 인재더군요.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되는 사람이에요. 언제고 월스트리트에서 이름을 날리는 투자자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칭찬은 공짜다. 그리고 가성비가 아주 뛰어나다.
“그렇죠?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사람들 평판을 들어 보면 대개 비슷하더군요. 언제고 월스트리트의 위대한 투자자 중 한 명으로 우뚝 솟을 거예요.”
월 스트리트의 거물도 공주의 칭찬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하기는 세상 그 누가 일국의 공주를 앞에 두고 평판을 깎는 짓을 하겠는가?
“그렇게까지 칭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미숙하다는 건 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요안나의 얼굴엔 자랑스러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 중국 증시의 하락에 크게 베팅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식사를 하면서 데이비드가 유진에게 물었다.
“네. 이쪽에서도 그렇게 베팅한 펀드가 꽤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언제고 내려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5,000을 넘자마자 바로 꺾여 버릴 줄은 몰랐어요. 6,000 능선은 오를 거라 믿는 쪽이 우세였는데.”
모두가 버블이라 생각해도, 버블의 꼭지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를 직접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4,00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지금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하락이라 믿는 분석이 절반을 넘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중국 증시 문제로 우리한테 골칫덩이를 하나 던져 주신 모양이에요.”
“그랬던가요? 음…… 바클레이와 계약을 한 게 있었나?”
데이비드의 말에 유진은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해 유가 하락에 헷징 보험을 들 때에 모두 다섯 곳의 투자은행과 각기 1,50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었다.
그리고 유가가 절반이나 떨어졌을 때, 각 은행으로부터 4억 5,000만 달러씩 받아 챙겼다.
그 때문에 이번에 중국 증시에 투자할 때에도 다시 여러 투자 은행에 옵션과 보험을 포함한 파생 상품을 제안했을 땐, 이미 유진과의 거래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던 투자 은행들은 대부분 이번 제안을 거절했다.
모두들 4억 5,000만 달러의 손해로 경영자들이 책임을 져야 했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계약은 주로 아시아계 투자은행과 맺었는데, 바클레이 은행도 홍콩 지점을 통해 계약을 받아들였었다.
“얼마짜리였지?”
유진이 요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클레이 홍콩에서 5,000만 달러의 헷징 계약을 체결했어요. 3,000 미만으로 내려가면 5억 달러가 되죠.”
“혹시 계약 중도 해지를 원하시나요? 상해지수가 3,000까지 내려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의견이 더 많을 텐데요?”
유진이 조금 의아한 생각으로 물어보았다.
“설마 그럴 리 있겠소? 그 계약 건은 어차피 홍콩 지점에서 가져온 계약이었고, 어차피 난 이달까지만 바클레이에 있을 것 같으니 말이지.”
“그만두는 건가요?”
요안나도 모르고 있던 일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음 달에는 자리에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후임도 정해졌으니까.”
“아쉽군요. 아직 한창 일하실 나이인데요.”
“뭐, 그렇기는 하지. 그렇지 않아도 윈튼 그룹으로부터 제안을 받아서 그쪽으로 가 볼 생각이거든.”
“윈튼 그룹이면 런던에 있는 사모펀드였죠?”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커리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적당한 규모 같아서.”
“참! 윈튼 그룹에서 이번에 한국에 투자하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데이비드가 슬쩍 운을 띄운다. 아무래도 오늘 유진을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인 모양이다.
“어떤 투자를 하시려는 겁니까?”
“삼호 카드가 매물로 나와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쪽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요?”
“삼호 카드라…….”
데이비드의 말에 유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한다.
삼호 카드는 한국 신용카드사 점유율 5위나 6위 정도를 오가는 회사로, 유통 대기업인 삼호 그룹의 계열사이다.
유진이 흥미 있어 하는 것은 삼호 카드가 이맘때 즈음 대양 카드에 인수 합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대양 그룹 금융 계열사인 대양 카드는 점유율 7위 권으로 신용카드사 중에서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삼호 카드와의 인수 합병으로 점유율이 17%가 되며 단숨에 업계 2워 권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때의 일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때 즈음 윈튼 그룹과 삼호 카드 인수 경쟁을 벌여 승리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걸 굳이 자신에게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사모펀드라면 해당 매물에 대해 이미 충분한 분석이 나와 있을 것이다.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진에게 물어보는 것은 이상하다.
“삼호 카드 인수전에 강력한 경쟁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유진은 금세 데이비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경쟁자인 대양 그룹에 관련된 정보를 획득했다면 대양 그룹과 척을 지고 있는 유진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제 바클레이를 그만두고 사모펀드의 수장으로 갈 데이비드는 강력한 경쟁자인 대양 그룹에 맞서 손을 잡을 만한 자산가를 섭외한 채로 대표로 취임한다면 처음부터 회사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거대 은행이나 사모펀드의 수장이라고는 하지만, 창업주가 아닌 이상 월가의 회장이나 대표들은 사실 주주들의 선택을 받아 조건에 따라 쉽게 자리를 옮기곤 하는 프리 에이전트에 가깝다.
이 데이비드만 해도 대형 투자 은행을 벌써 몇 번이나 옮겨 다니고 있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하니 이번에 가는 사모펀드에서는 뭔가 제대로 된 실적을 보여 주고, 한탕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맞아요. 대양 카드라고 하더군요.”
데이비드가 자신이 던진 화두를 바로 꿰뚫어 본 유진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국에서 제일이나 대양 같은 대기업과 경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군요.”
유진은 데이비드가 던진 미끼에 딱히 큰 관심은 없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나라든지 주도적인 기업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경우 공정한 경쟁을 기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죠.”
“삼호 카드가 꽤 매력 있는 매물인 모양이군요.”
“물론이죠. 삼호 카드는 그저 하위권 카드사에 지나지 않지만, 점유율은 거의 8%에 달하고 있죠. 다른 카드사에서 인수하면 점유율이 훌쩍 올라게 되니 지금이 투자에 적기지요. 인수해서 몇 년만 묵히면 10억 달러는 이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쩐지 10억 달러 정도는 별 게 아닌 듯 느껴졌지만, 그건 1년에 100억 달러도 넘는 돈을 벌어들인 유진에게나 그렇지, 대형 사모펀드에서도 10억 달러의 이익을 보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하는 큰 사업이다.
“그런데 윈턴 혼자서는 힘들 텐데요?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회사가 따로 있겠군요.”
“네. 서성 은행 계열사인 서성 카드입니다.”
데이비드의 대답에 유진은 심히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