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스캔들
대양 그룹의 금융 계열사인 대양카드가 유통 대기업인 삼호 그룹의 삼호카드를 인수하게 되는 것은 유진도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삼호카드 인수전에 영국계 사모펀드인 윈튼 그룹과 서성은행 계열사인 서성카드가 뛰어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비율이 어떻게 되죠?”
유진이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8대 2입니다. 윈튼이 8이지요.”
데이비드의 대답을 듣고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성은행이 돈이 없어서 해외 사모펀드와 손을 잡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BIS 비율 때문이군요.”
금융 기업을 인수할 땐 인수 기업의 자기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그걸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그런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윈튼과의 컨소시엄으로 삼호카드를 인수하고 몇 년 뒤에 윈턴의 지분을 서성카드에 넘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투자이다. 몇 년 뒤에 지분을 팔 상대까지 보장되어 있다면,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차지할 수만 있다면 꽤 큰 이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문제는 대양 그룹에서도 삼호카드를 탐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금융룹보다 대기업의 힘이 더 강한 모양이더군요.”
다른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 카드사의 인수도 단순히 경제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정도의 큰 매물이라면 재계, 금융계, 그리고 관계와 정계까지 떡고물을 얻기 위해 달라붙기 마련이니.
대양 그룹이 인수전에 참여한 순간부터 서성과 윈턴의 컨소시엄은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경쟁자를 압도할 만한 자금을 퍼붓는다면 삼호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은행이든 사모펀드든 결국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움직이는데, 대양을 물리칠 만큼 돈을 쓴다면 만족스러운 이익을 남기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한 회사가 아니라 두 회사의 협력이라면 그 이익 부분에 대해 이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진은 대양 그룹의 주 계열사들 몇 개가 이맘때 즈음 주거래은행을 서성은행으로 바꾸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도 서성은행이 삼호카드 입찰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거래은행을 바꾸게 되는 모양이다.
“혹시 제게 원하는 게 있나요?”
이미 상대가 원하는 것은 파악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삼호카드 인수전에 뛰어들 만한 사람. 그것도 어지간한 사모펀드 이상의 재력을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대양 그룹과의 경쟁에서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떠신가요? 윈튼과 함께 삼호카드 인수 컨소시엄에 참여하시는 것은.”
데이비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말했다.
유진이 대양 그룹과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양 그룹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라면 솔깃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모양이다.
“글쎄요. 카드사 인수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서요.”
“알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데이비드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유진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삼호카드 인수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 대한 덕담이나 요안나에 관한 이야기가 평범하게 오갔을 뿐이다.
“오늘 일은 사과드릴게요. 데이비드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요.”
식당을 나서 돌아오는 길에 요안나가 사과했다.
“데이비드가 윈튼 그룹으로 간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네?”
“네.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정말 고약한 영감이라니까요.”
요안나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투자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오늘처럼 연줄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만나고, 투자를 권유하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요안나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다를 것 같아?”
오히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음…… 그렇기는 하지만…… 중간에 있는 내 생각도 해 줘야죠.”
“데이비드 입장에서는 요안나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대양 그룹과의 싸움이라면 내가 기꺼워할 것으로 생각했을 테니.”
“보스가 한국의 거대 기업과 문제가 있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일이 돈이 되지 않는 일에도 뛰어들 정도의 문제인가요?”
“글쎄? 대양 그룹과는 끝을 봐야 할 사이는 맞아. 그렇지만 손해를 보면서까지 싸울 생각은 없어.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내가 이득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승리가 아닐까?”
“역시 그렇죠?”
요안나는 유진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삼호카드와 서성은행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신가요?”
“싸움을 할지 안 할지는 상황을 봐야지.”
“알았어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볼게요.”
유진은 요안나에게 어떤 식으로 한국의 기업들에 대해 알아볼 생각인지는 묻지 않았고, 요안나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걸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로 삼으려는 듯 보였고, 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 요안나랑 데이트 했지?”
데이비드와의 식사 다음 날 유성이 싱글거리며 물었다.
“데이트?”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유진이 동생을 바라보자, 유성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형에게 넘겼다.
“뭐야? 이 사진은?”
그곳에는 유진과 요안나가 다정하게 식당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뉴욕매일신문? 한국어로 된 뉴욕신문이면 한인 신문인 모양이지?”
유성이 보여 준 것은 한국 포털에 올라가 있는 기사였다.
어째서인지 뉴욕매일신문이라는 곳에서 유진의 사진을 입수해 기사를 냈고, 그걸 한국의 한 인터넷 신문에서 다시 베껴 기사로 올린 모양이다.
“맨해튼에 떠오르는 신흥 타이쿤, 묘령의 여인과 열애 중…… 대체 이 녀석들은…….”
유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언론들을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마음껏 이용해 왔고, 반대로 대양 그룹의 손길이 닿는 언론에서 낸 자신의 비난 기사를 적지 않게 보아 왔지만, 이번처럼 멋대로의 기사를 본 적은 없었다.
이건 단순히 비난이라기보다는 그저 유진을 대상으로 한 가십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 기사랑 사진 장난 아니게 퍼져 나가고 있어. 형이 메가밀리언에 당첨된 이후 손에 꼽히게 화제가 되는 기사일걸?”
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요안나가 워낙 눈에 띄잖아. 금발 미녀와 거부의 열애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도 드물지.”
“하기야…… 그나저나 요안나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지?”
유진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보다 지금 SNS에 어떻게 설명할지나 고민해봐. SNS가 난리가 났으니까. 다들 그 여자 누구냐고 묻고 있어.”
“음. 그건 그냥 무시해.”
유진은 요안나 때문에 자신이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요안나의 반응이 걱정이었다.
“상관없어요.”
요안나는 유진보다도 더 쿨했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어디든지 마찬가지니까요. 나 역시 열세 살까지만 해도 정말 별의별 기사들이 신문에 올라오고는 했어요. 내가 여섯 살 때 껴안았던 남자아이 이야기까지 몇 년이나 기사에 올리더라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은 유진보다 요안나가 오히려 더 익숙할 것이다.
자국의 공주를 향한 관심은 일개 부자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더 했을 것이니.
“그렇다면 요안나의 사진을 SNS에 올려도 괜찮을까? 오해는 풀어야 할 거 같아서.”
“그렇게 하죠.”
요안나가 미소지으며 유성의 카메라 앞에 섰다.
“제일 잘 나온 사진을 올리고 새로운 인턴이라고 올리도록 하자.”
“사람들이 믿을까?”
요안나의 사진을 찍으면서도 유성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든 말든 상관없어.”
유진은 사람들의 오해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요안나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는 편도 나쁘지만은 않다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대중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좀 더 자극적인 사실에만 늘 반응할 뿐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사실이라 말해도 믿고 싶은 사람만 믿고,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믿지 않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놔 두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편이 유진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어제 내 주신 과제는 마쳤어요.”
유성의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모델이 되어 주고 나서 요안나가 두툼한 서류 한 묶음을 내놓으며 말했다.
“빨리 끝냈네?”
유진은 요안나가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많은 자료를 찾아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밤을 새운 모양이지?”
“그렇지는 않아요. 두 시간은 잤으니까요.”
“피곤하지 않아? 두 시간밖에 못 잤으면?”
유성이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이 모자란 것은 익숙해요. 대학 다닐 때나, 바클리스에서 일할 때나, 할 일이 밀리면 이삼일은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공부나 일을 하는 경우가 한 달에 두어 번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건 없어. 그러다가 업무에 지장이 가면 곤란하니 최소한의 잠은 자 둬.”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가까운 업무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네. 그렇게 할게요. 이번엔 저한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업무 지시라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그래. 우선 대략적인 상황부터 알려 줘.”
“서성카드는 서성금융지주의 계열사로, 13% 점유율로 업계에서 4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회사인 서성금융지주는 은행 3위인 서성은행, 증권 4위인 서성증권, 생명보험사 5위인 서성생명등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어 한국 금융계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금융지주회사입니다.”
요안나는 조금 긴장된 태도로 조사한 내용을 말해 갔다.
“지배 구조는 사주인 오상수 일가와 특수관계인이 11%, 국민연금이 10%, 그리고 특이하게도 한국계 일본인들의 모임인 관친회 회원들 300여 명이 각자 개인적으로 보유한 지분이 모두 합쳐 18%에 달합니다.”
“관친회?”
옆에서 듣고 있던 유성은 요안나의 설명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관동재일거류민친목회의 줄임말이야. 관동. 그러니까 동경 주변에 사는 재일 교포 모임이지. 서성금융지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성은행은 설립 당시 지금의 회장인 오상수의 부친인 오명회가 재일 교포들의 지원을 받아 세웠어. 지금도 관친회 회원들은 철저하게 오상수 회장의 지배를 지지하고 있고. 그러니까 오상수 회장의 지분은 실질적으로는 29%라고 봐야 해.”
유진이 부가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는 일본계 은행인가?”
“딱히 그렇게 볼 수만은 없어. 처음에는 꽤 큰 지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지분도 많이 희석되었고, 경영에 크게 관여하는 편도 아니야. 그저 오 회장 일가에 대해 지지를 해 주고, 때때로 회장이나 행장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관친회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 정도야.”
“음, 꽤 특이하네.”
“어. 많이 특이하지.”
사실은 유진이 전날 데이비드에게 삼호카드 인수전에 서성카드가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관친회는 단순하게 재일 한국인의 모임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한 면이 많은 집단이다.
실질적으로 서성금융지주의 지배적인 대주주라고 볼 수 있는 그들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개인들이 각기 0.몇 퍼센트의 적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지만, 모든 상황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한두 명의 소유이거나, 혹은 특정한 단체의 소유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서성은행 오 회장의 두 아들이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분쟁을 시작하자, 관친회의 주주들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그때까지 약세로 생각되던 둘째 아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뒤로 일이 묘하게 돌아갔다.
새로운 회장에 취임한 둘째 아들은 일본계 자금을 더 많이 받아들였고, 서성금융지주 계열사의 사외이사들은 일본계투성이가 되어 갔다.
지금이야 그저 드러나지 않는 주주들의 모임이지만, 그때 즈음에는 이미 실질적으로 서성금융그룹을 손에 쥐고 흔드는 지배자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한국 금융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금융그룹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일본계 단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물론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딱히 서성금융그룹의 배후가 일본계냐 하는 문제 따위가 아니다.
유진은 자신이 서성금융그룹에 영향력을 발휘할 방법이 있는지를 모색하려 했고, 관친회의 존재가 바로 그 키가 될 것이다.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참 뒤에 관친회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유진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더불어 대양 그룹과 서성금융 사이의 밀착도 막아 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대양 그룹 주 계열사가 주거래은행을 서성은행으로 바꾼 뒤로 두 거대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은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대양 그룹의 행보에 서성금융그룹의 도움이 적지 않게 된다.
그걸 미연에 끊어 버린다면, 유진에게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