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54화 (54/363)

54화 천직

“대양카드와 합작으로 삼호카드 인수에 나설 회사를 찾았어요.”

요안나는 벌써 월가에 꽤 많은 인맥을 갖고 있었다.

인턴이라기에는 너무 훌륭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토미 베이커슨이라는 사모펀드에요.”

“역시 사모펀드였나?”

이 시점에서 4, 5위권을 달리는 대양카드와 서성카드가 8%의 점유율을 지닌 삼호카드를 인수하면 단번에 수위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양 그룹 계열사인 대양카드나 서성은행 계열사인 서성카드는 삼호카드 인수를 위한 자기자본비율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두 곳 모두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서 자금을 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고, 서성은 영국의 윈튼 그룹과, 대양은 미국에 근거지를 둔 사모펀드와 손을 잡았다.

“합자 비율은 확인할 수 없었어요.”

요안나는 그건 자신의 실패라는 듯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마.”

유진이 알고 싶었던 것은 대양과 연결된 다른 자금줄이다.

지난번의 DL캐피탈처럼 토미 베이커슨도 대양의 자금이 들어 있는 사모펀드가 아닐까 생각했다.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런 사모펀드에 누구의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외부에서 알 도리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대양과 연관이 되어 있으면, 그냥 대양의 자금이 들어 있다고 판단하는 편이 낫다.

이렇게 수조 원이 오가는 사업이라면 약간의 콩고물 만으로도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챙길 수 있다.

대양과 토미 베이커슨이 협력해서 삼호 카드를 3조 원에 인수하고 3년 뒤에 토미 베이커슨의 지분을 대양에 넘기기로 한다면 그 중간에서 적지 않은 수익을 챙길 수 있다.

그 수익의 진정한 종착지가 다시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일 거라 예상하는 것이 그다지 억측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 프리스케일 사태 이후로 대양 그룹은 DL캐피탈과 작전을 벌이는 대신 다른 사모펀드를 이용할 것이다.

이제 유진이 염두에 두어야 할 기관이 하나 더 늘어났다.

“데이비드는 영국으로 떠났나?”

“네. 후임자가 회장에 올라섰으니,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바쁜 모양이에요. 그쪽에서 다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가려면요.”

“대단한 노익장이군.”

“그렇다니까요.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좀처럼 은퇴를 하고 싶지 않아지는 모양이에요. 보스도 그럴까요?”

“글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유진은 자신이 80이 되어서도 투자를 이어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 황혼에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 보았지만, 70이 넘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때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유진이 그동안 해 놓은 일들로 인해 그때 즈음이면 유진이 알고 있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유진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주욱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만, 그리고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곳에만 투자를 이어 갈 생각이다.

“요안나는 어때? 나이가 들어서도 투자 업계에 몸을 담고 있지는 않을 테지?”

언제고 부친의 뒤를 따라 네덜란드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다. 일국의 국왕이 주가나 유가에 숏을 치고 롱을 던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 일이 너무 즐거우니까요. 세상에서 이런 일보다도 짜릿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싶어요.”

그 말을 하고 있을 때의 요안나는 굉장히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제가 직접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흥분이 돼요. 만약에 제 돈을 넣었다면…… 우리 가족의 돈이라면 어땠을까요? 지수가 1포인트 떨어질 때마다, 혹은 반대로 1포인트 오를 때마다 두근거려요. 그리고 다음 1분 뒤에는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고요. 기업 인수도 마찬가지예요. 그 이전에 인수 대상을 확정하기 위한 분석도 그렇고요. 아무래도 이일이 제게 천직인가 봐요.”

누가 봐도 요안나에게는 이 일이 천직으로 보였다.

“한 달도 안 되서 이렇게까지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요안나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7월 9일 상해종합지수는 3,300대까지 떨어졌다.

“숏 포지션으로 벌어들인 수익만 170%, 그러니까 거의 70억 달러에 가까워요. 그리고 300만 더 떨어지면 100억 달러의 추가 이익이 날 거예요.”

그날 온종일 요안나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50억 달러로 한 달 만에 20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현장을 목격할 기회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유가 선물 투자도 순항 중이에요. 벌써 10% 가까이 떨어졌어요.”

20억 달러를 넣은 유가 선물에서도 벌써 8억 달러를 회수했다.

“어떻게 된 게 고르기만 하면 전부 성공하시는 거 같아요. 틀림없이 보스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겠죠?”

요안나는 어떻게 해서든 유진의 노하우를 배울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진의 노하우는 누군가가 배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중국 증시는 다시 상승을 시작했다.

3,400까지 내려갔던 지수는 하루 만에 3,700을 넘어섰다.

“역시 증시는 어렵네요. 하루 이틀이면 고지가 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반대로 하루 만에 5%가 넘게 올랐어요.”

요안나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투자 금액이 크니 하루 사이에 빠져 버린 수익이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아무리 월가에서 큰돈이 오가는 모습을 보아 왔던 요안나라 해도 상승하는 그래프를 보면서 가슴이 조여 오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중국 정부에서 강력한 증시 부양 정책을 내놓을 거라는 말이 있어요.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보스?”

처음부터 유진이 요구했던 대로 요안나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것에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대책이라면?”

“지금이라도 계약을 종료하자는 연락이 온 투자 은행이 몇 곳 있어요. 그쪽을 해약해서 헷징을 한다거나, 지수 투자 일부를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투자은행과의 계약은 그대로 두고, 지수 투자 부분만 청산하도록 하지.”

유진은 지수가 3,000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한 번 정도 조정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언제가 그때인지는 몰랐지만, 상황을 보면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 모양이다.

일시적이지만 어느 정도 회복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대로 수익을 줄일 필요는 없다.

“4,000즈음까지 가도 제대로 된 부양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시 들어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보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중국 증시에 투자한 자금 중 상당수를 정리했다.

그리고 유진의 말처럼 다시 4,000을 회복할 때까지도 중국 정부가 내놓은 부양 정책은 그다지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중국 정부에서는 이대로 증시가 회복될 것이라 믿는 모양이다.

“다시 숏으로 들어가지.”

유진이 기다리던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동안의 수익도 상당수를 다시 숏에 넣기로 했다.

“80억 달러를 다 넣나요?”

처음 투자 금액 40억 달러에, 그동안의 수익까지 합하면 대략 100억 달러의 여유가 있었다.

이 중 20억 달러를 유가 선물에 넣었으니, 지난번보다 무려 두 배가량 많은 80억 달러를 중국 증시의 하락에 쏟아붓는 것이다.

“물론이지. 전부 다.”

“항상 그렇게 과격하게 투자를 하네요. 제가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에요.”

요안나가 투자 자금으로 생각하는 것은 네덜란드 왕실의 자산이다. 당연히 왕실 자산을 가지고 유진처럼 무식한 투자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요안나에게 어울리는 투자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맞아요. 저만의 방법을 찾아내겠어요.”

요안나는 유진의 투자 기법을 익혀 자신 나름의 방식을 만들 생각이었다.

“다음 주에 잠시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유진은 민국일보 미주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오재혁과 짧은 만남을 가지고 언제나처럼 그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어 호의를 표하며 정보를 흘렸다.

“이번에는 좀 힘든 길이 될 거야.”

“소송 때문이지?”

오재혁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 이젠 더는 피하기 어려울 거 같아.”

유진은 좀처럼 짓지 않던 어두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중국 증시가 다시 상승하고 있는 동안 유진은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전 약혼녀와 진행 중인 소송의 변론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은 부친의 회사인 성진정밀과 대양중공업 간의 소송에 맞춰 자신의 소송도 이어지길 원했고, 이제 슬슬 성진정밀의 첫 번째 소송 결과가 다가오고 있었다.

“요안나도 필요한 게 있으면 준비해.”

이번엔 요안나도 함께 데려갈 생각이다.

“한국이요?”

요안나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보스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하네요. 참! 네덜란드에는 가 보신 적 있으세요?”

“한 번. 일 때문이었지만 꽤 멋진 곳이었던 기억이 있어. 로테르담과 헤이그에 갔었는데 인도네시아 음식만 잔뜩 먹고 온 기억이 있네.”

“다음엔 저와 함께…… 아니, 그건 조금 힘들겠네요.”

요안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본국에 들어가면 공주의 신분으로 움직여야 할 터이니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한 번 기회가 되면 같이 가 보기로 하지.”

그렇지 않아도 네덜란드에는 갈 일이 있다. 프리스케일과 함께 자동차 반도체의 강자인 NXP 세미컨덕터나 반도체 생산 장비 업체인 ASML 때문이라도 조만간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국 기업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공주님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더위가 한창인 7월 중순, 암호화폐 거래소 구축에 여념이 없는 유성은 뉴욕에 둔 채 요안나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입국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플래시가 터졌다.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플래시가 터진 곳을 바라보는데,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유진을 둘러쌌다.

“괜찮으니 앞을 열어 줘요.”

경호팀의 팀장인 존에게 말을 하자, 유진을 가로막은 두 사람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다시 플래시가 터져 나오며 누군가가 다가와 유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민국일보 남지현 기자입니다. 강유진 씨의 귀국이 전 약혼녀와의 소송 때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결혼 전날 파혼당한 약혼녀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습니까?”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기자의 말에 유진은 얼굴을 굳혔다.

“파혼은 결혼식 하루 전날 통보했으면서 소송을 이렇게 질질 끄는 행동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유 없이 결혼식 전날 파혼당한 신부의 심정을 생각하셨다면 사과의 말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터뷰를 위해 나왔다기보다는 전적으로 유진을 비난하기 위한 행동으로만 보였다.

“강유진 씨의 비열한 행동으로 인해 전 약혼녀 되는 분은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유산을 했다고 하는데, 반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유진이 차마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열심히 외친다.

처음부터 유진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여기 나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여성을 그런 불행으로 몰아 놓고, 금발의 백인 여자와 밀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국민들은 지금 유진 씨가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 놓고도 일말의 반성도 없이 뻔뻔스럽게 활보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이어 갈 생각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기자는 연신 원색적인 비난만을 쏟아 내고 있을 뿐이다.

민국일보는 친 대양 그룹 계열의 언론사이니 어떤 이유에서 여기 나와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남지현 기자라고 했죠?”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네. 민국일보의 남지현 기자입니다. 약혼자분께 반성의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잔뜩 흥분해 있는 기자의 얼굴을 보니 단순히 대양의 사주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 취재를 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취조를 하려는 건가요?”

“국민들을 대신해 유진 씨의 사과를 듣고 싶습니다.”

“국민들이 남지현 기자한테 내 사과를 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까?”

“네. 많은 국민들이 유진 씨의 파렴치한 행위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국민이 남지현 기자에게 그걸 요구했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취재를 원한다면 정식으로 요청을 하고 취재를 하도록 해요. 그리고 오늘 내가 남지현 기자에게 들은 말들에 대해 법적으로 조처할 부분이 있다면 따로 법률 대리인을 통해 연락을 드리지요.”

유진이 냉랭한 얼굴로 기자에게 말했다.

“지금 국민의 공분을 사는 행동을 하고서도 기자를 협박하는 겁니까?”

민국일보 남지현 기자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아직까지 한국 기자들은 소송의 쓴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때이다.

“가지. 이제.”

더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군불은 충분히 피워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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