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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56화 (56/363)

56화 출구전략

“지금 상대의 공세가 굉장해. 작정하고 달려든 거지. 어떻게 할까?”

오후에 유진과 유진의 기업에 대한 홍보를 맡고 있는 세종 홍보의 철우가 찾아왔다.

미디어에서 기사를 올리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커뮤니티마다 온통 유진에 대한 포스팅이 올라갔고, 그런 포스팅에는 예외 없이 몇 페이지를 넘어가는 리플이 달렸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리플은 유진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뿐이다.

“어차피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딱히 그쪽에서 유도하지 않아도 전부 나에 대한 비난을 보내고 있을걸?”

“그러겠지. 아무래도 유산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말이야.”

그게 가장 컸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약혼자의 파혼 선언으로 유산을 해 버린 비련의 약혼녀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약혼녀를 버리고 엄청난 거부가 되어, 백인 미인을 데리고 들어온 유진은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이때까지 유진의 편을 들어주던 친 다산그룹 미디어인 재민일보도 감히 유진의 변명을 늘어놓는 기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솔직히 유진의 입장에서야 재민일보까지 함께 돌을 던지는 기사를 싣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다.

56화 출구전략

“그리고 변호인단도 문제가 굉장히 커.”

기자들은 유진이 파혼 소송에 전관으로 가득한 변호인단을 꾸린 것을 비난하고 나섰다.

5, 6명이나 되는 대형 로펌 소속 전관변호사의 고용 비용은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며 거액을 들여 가련한 약혼녀에게 비수를 꽂는다는 이유로 원색적인 비난의 기사를 올렸다.

“로펌에도 찾아간 모양이야. 변호사 한 명이 인터뷰도 해 줬고.”

유진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이라도 던지듯이 유진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소송이 끝나기 전에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물론 유진이 원한 대로이다.

뭐. 이름만 올리는 대가로 수천만 원을 받았으니,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소송이 끝날 때까지는 조용히 있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그래도 너무 심한 글을 쓰는 녀석들에게는 뭔가 경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놈들은 어차피 소송 결과랑 상관없이 끝까지 널 물고 늘어질 거야.”

철우는 이번 사태로 유진에게 안티팬이 잔뜩 생기는 것을 걱정했다.

“어차피 내가 뭘 해도 그런 녀석들은 나오기 마련이야. 그냥 마크만 해 놔.”

“그러지. 대단하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아무렇지도 않기야 하겠어?”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은데?”

철우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런지도 모르지.”

유진은 정말로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참. 저녁은 같이 못 하겠다. 집에 들어가야 해서.”

“밥이야 언제든지 먹으면 되지. 여하튼 알았다. 그럼 그냥 추이를 지켜보기만 할게.”

유진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난 철우는 어쩐지 유진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그럼 편하게 쉬어. 호텔은 어때? 불편한 건 없고?”

유진은 퇴근길에 요안나가 머물고 있는 회사 근처 호텔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너무 호사스러운 방을 구해 주신 거 아닌가요? 그런 스위트 룸은 가족들과 여행 다닐 때나 써 보고, 한동안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어요.”

요안나에게는 제법 비용이 드는 고급 스위트룸에, 유진의 경호팀 중 둘을 붙여 주었다.

인턴에 대한 대우라기에는 꽤 오버한 듯싶지만, 네덜란드의 공주를 한국까지 데려왔으니 최소한의 대접은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유진으로서는 꽤 난처할 것이다.

“불편한 게 없으면 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사용하고 경비로 처리해.”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가족들과 좋은 밤 되세요.”

요안나를 호텔에 내려 주고 돌아가는데, 또다시 플래시가 번쩍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자 몇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요안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곧바로 경호원들이 요안나를 감싸고 호텔로 들어갔고, 호텔 경비들이 나와 기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경호원들은 잘 해 주고 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눈에 띄면 유진이나 요안나가 카메라의 포커스에 맞게 슬쩍 몸을 비켜 주고 나서 다시 둘러싼다.

미국에서라면 이런 행위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총기를 볼 수 없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해가 될 것은 없다.

유진은 굳은 얼굴로 호텔로 들어서는 요안나를 지켜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시흥으로 갑시다.”

오랜만에 만난 철우와의 저녁도 마다하고 집으로 가는 것은 물론 부모님과의 저녁 식사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계속은 무리지만, 가능하면 며칠이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 생각이다.

“그 소송 때문에 많이 힘들겠구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부친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미디어에서 온통 떠들어 대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이다.

“괜찮겠니? 소송을 중단하고 합의를 보는 것보다 낫겠어?”

“물론이죠.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래, 알았다.”

모친도 아들이 온 세상의 공적이 되어가는 것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지만, 달리 어떻게 하자는 말씀은 없었다.

두 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유진도 조금은 불편해졌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유진의 가족들에게는 절대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 잠시 서핑을 해 보니 오후보다 오히려 더욱 난리가 났다. 온 국민이 유진을 비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기사 봤어요. 조금 시원하더군요.”

여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 이제 재판 날이 며칠 남지 않았어. 잘할 수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네. 할 수 있어요.”

여자는 한때 다정하던 그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녀가 원했던 것은 사랑 따위가 아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는 수단이었고,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여자는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 이번 주에 들어오면 되겠어. 비행기 표는 끊어 놓았지?

“네. 공판 바로 전날 들어갈 거예요.”

어차피 한국에서는 온통 그 사람의 그림자투성이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볼 때면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고,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그 이름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찾아본 탓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사람의 이름을 검색해 보는 것은 이제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 그런데 그 자식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냐? 무슨 생각으로 당사자본인신문에 나오겠다는 거야?

“그야 저도 모르지요. 무슨 생각인지.”

한때는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일에 집중하고, 거짓말을 싫어하고, 주변 사람에게 성실했던 사람.

그게 문제였다. 똑똑하기는 하지만,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조건을 잔뜩 갖추고 있었다.

여자는 잘 알고 있다. 세상의 꼭대기까지 올라 다른 사람을 내려보려면 성실하고 친절한 것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그보다는 냉철하고, 야비하고, 누구라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 혹시 무슨 증거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남자의 목소리에는 아주 조금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증거 따위가 있을 게 뭐가 있어요. 그때 그 사람이 뭐 얼마나 대단했다고 우릴 쫓아다녔겠어요, 아니면 도청이라도 했겠어요. 그리고 그런 증거 있다고 해도 절대 못 써요. 막 나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불법적인 증거를 재판에 내놓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리고 변호인단을 그렇게까지 꾸린 걸 보면 확실히 자신이 없어서인 게 분명해요. 그 정도라면 본질을 흐리고 소송을 지지부진하게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 어림도 없는 소리. 어차피 여론은 이쪽으로 완벽하게 넘어왔어. 시간을 끌어 봤자 자기 숨통만 계속 조이는 셈이지. 여하튼 이번 기회에 녀석을 공적으로 확실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성진정공 건도 편하게 끝낼 수 있어.

“네. 지금 보니 더 뭔가 할 필요도 없겠네요. 내가 그 정도로 욕을 먹고 있다면 죽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더군요.”

여자가 처음으로 웃음을 내비췄다.

- 그 정도로 모자라. 얼굴은 어때? 제대로 하고 올 수 있지?

“벌써 이 주일째 거의 굶다시피 하고 있어요. 누가 봐도 아사 직전으로 보일 거예요.”

- 그래. 끝까지 마무리 잘하자고.

남자가 이제 슬슬 전화를 끊으려 했다.

“네. 잘할게요.”

무언가 감정이 실린 말을 내뱉으려다가 여자는 도로 삼켜 버렸다.

- 이번 일 끝나면 같이 그리로 가지. 며칠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야.

남자도 여자의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말씀만으로도.”

- 당신한테는 늘 고마워하고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우리. 알았지?

여자는 남자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빌어먹을…….”

남자가 대화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그녀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일부러일까? 아니면 무심해서?

여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총명한 남자이다.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 없다.

“나쁜 자식!”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힘차게 내던졌다.

도대체 지금 그녀가 누구를 욕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짜증나는 새끼들아!”

마침내 참지 못하고 여자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그랬지?”

여자는 인정해야만 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

그녀에게는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한 남자의 좋은 아내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과 어떤 한 남자의 숨겨진 여자로 더 먼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

그녀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은 최고의 길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길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길이라는 사실이 이미 판명되었다.

“전부…… 죽어 버려!”

여자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스마트폰을 다시 손에 쥐고 조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를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니, 아직은 아냐.”

여자는 머리를 흔들며 잠시 자신의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을 지워 버렸다.

자신이 가진 패를 쓰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좀 더…… 그 남자를 바닥까지 끌어내린 뒤에나 내밀어 볼 생각이다.

얼마나 뜯어낼 수 있을까?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무척 힘이 들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밀어붙여 보도록 하자.

어차피 그를 구덩이에 밀어 넣으려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아무리 큰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나 비난을 받고 있다면 자신을 구원해 줄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여자가 알고 있는 그 남자는 굳은 심지를 지녔지만, 무척이나 선량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비난에 휩싸여 있는 상태를 계속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여자는 통화 화면을 지우고 다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안에 숨겨 놓았던 파일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파일을 플레이해 본다. 지금까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더 들어 본 음성이 흘러나온다.

“안 돼요! 본부장님! 하지 마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러시면 안 돼요. 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몇 번을 들어 봐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 녹음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녀가 원치 않는 관계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물론 이게 녹음될 때, 여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원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신도 원하던 것이다. 그저 약간의 줄다리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반쯤은 유희에 가까웠다.

하지만 녹음 내용은 명백하게 여자가 강제로 당하고 있다고밖에는 판단할 수 없는 증거로 보였다.

이거라면…….

그 사람도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고한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사람 또한 희생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물론 이번엔 다른 악역이 태어나겠지만…….

늘 그랬듯 여자는 고심하고 있었다.

과연 이걸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얼마나 될까?

그 남자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보다 나은 길일까?

그 사람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람의 선의를 믿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자신을 불쌍하게는 생각해 줄 것이다.

“다시 되돌릴 수는 없겠지?”

여자는 조금 전 자신이 던져 깨져 버린 유리잔을 바라보며 홀로 말했다.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 선량한 사람은 적어도 다시 한번 관계를 시작할 기회를 내어줄지도 모른다.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여자가 씩 웃었다.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그 사람을 떠올리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연약한 희생자에 불과했을 뿐이다.

결혼을 바로 앞두고 나쁜 남자에게 억지로 원치 않는 관계를 강요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상사이며, 약혼자의 부친이 운영하는 공장에 크나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뿐이다.

어느샌가 그녀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에 심취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럴듯하다.

“전부 당신을 위해 그런 거였어.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 아버지 회사가 망했을 거야!”

그렇게 한 번 내뱉고 나서 여자는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한 수이다.

물론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진과 지금의 유진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스스로의 작전이 오류투성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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