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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57화 (57/363)

57화 당사자본인신문

“조금 전에 그 여자가 한국에 돌아온 모양이야.”

변론 하루 전날, 세종 홍보의 철우가 다시 들렀다.

이제는 변론 당일 벌어질 일들에 대해 논의를 해야 했다.

“나도 봤어.”

유진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저 평범한 회사원의 귀국이지만, 포털 사이트는 다시 그녀 이야기로 가득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공항을 나서는 그녀의 얼굴이 기사에 올라갔다.

보통이라면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반인의 사진까지 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쪽도 이번에 단단히 작정한 모양인지, 핼쑥하게 말라 있는 여자의 얼굴을 고해상도 사진으로 찍어 기사에 첨부했다.

“굉장히 안 좋아 보이더군.”

“그러게 말이야.”

“며칠 굶은 모양이야. 사진으로 보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보여. 이걸로 너에 대한 비난은 이제 한도를 넘어섰어. 연쇄 살인범이 옆에 있어도 사람들은 너한테 돌을 던질 거야.”

“그러겠네. 하하.”

유진은 유쾌하게 웃었다.

“걱정 안 돼? 소송 준비 제대로 된 거야?”

철우는 조금 걱정되는 모양이다.

“어. 준비는 충분해.”

“그런데 저쪽은 변호사가 한 명뿐이야. 그것도 아주 새파랗게 젊은 여자. 이쪽이랑은 비교가 너무 된단 말이지. 대양 그룹의 행사치고는 너무 초라하지 않아?”

“그래야 우리 변호인단과 비교가 되니까. 우리 쪽 변호인단은 다들 60이 넘은 고위직 판검사 출신의 전관인사들이고, 저쪽은 검사로 지낼 때 몇 년간 성폭력을 담당했던 신출내기 변호사야. 아주 잘 짜 놓았네.”

“그러니까 말이야. 벌써 네가 돈으로 약혼녀를 압박하고 있다고 말이 많아. 근데 진짜 그런 변호인단은 내가 봐도 심하더라. 파혼 소송에 변호인단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만 아홉이지? 얼마나 들었어?”

“열 개는 넘을걸?”

“허유…… 저기 고갱님. 저희도 식구가 많이 늘었는데요.”

철우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어떻게 비용 좀 더 책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흐흐.”

“아! 그래. 사람은 많이 채용했어?”

“어. 이제 어엿한 중견 홍보대행사 급은 된다. 캬! 진짜 우리 호갱님 덕분에 우리도 아주 호강하고 있다니까.”

“지분 정리 잘해 놔. 언제 출자받을지도 생각해 보고.”

“진짜 해 주는 거야?”

철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슈팅스타 그룹이 10대 그룹 안에 들어갈 텐데, 그룹 하나를 담당하는 홍보대행이면 그래도 규모가 있어야지 않겠어?”

“아유! 이를 말씀이시겠어요. 주주님!”

철우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시작인 거지?”

“어. 내일 변론이 끝나자마자 시작해. 기자들 섭외는?”

“메이저로 네 개. 중견 급으로 여섯 개. 전부 방청객으로 들어갈 거야.”

“가장 먼저 기사를 올리는 곳에 광고가 두 배다.”

경쟁은 언제나 사람들을 열심히 뛰게 만든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철우는 마치 자신이 광고비를 받는다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이번에 민국일보 기사에서 네 재산이 60억 달러를 넘어선다고 추정하더라. 우리 쪽 기사보다 절반 정도만 인정하네.”

유진의 홍보를 대행하는 세종 홍보도 유진의 정확한 자산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유진이 지시하는 대로 추정 자산을 언론에 흘릴 뿐.

최근에는 150억 달러 이상이라는 기사를 올렸었고, 대양 그룹과 가까운 민국일보에서는 그 절반 정도가 진실일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올렸다.

“150억 달러라니. 개인이 가진 돈으로는 네가 한국에서 제일 부자네. 참 할 말이 없다.”

“150억 아닌데?”

“그래? 하긴. 민국 애들이 제대로 쓴 모양이네.”

“그쪽에서 쓴 거에 다섯 배는 넘을 거다. 60억은 언제 적 일인데.”

“허억! 300억 달러? 거의 33조 원이잖아?”

철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하튼 내일은 한 200억 달러쯤으로 하자. 그 정도면 임팩트가 있겠지.”

“20조 원이 넘으면 명실상부 한국 1위 부자야. 확실히 임팩트 있지. 좋아.”

철우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홍보전을 위한 전략을 세우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지 않은 홍보비가 집행될 예정이고, 유진과 대양 그룹의 이야기가 온종일 이 나라를 흔들게 될 것이다.

* * *

“그동안 많이 말랐네.”

남자가 여자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누구 때문인지 몰라요?”

여자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네.”

남자의 손이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새 신부님이랑은 잘 지내죠?”

여자가 조금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그 여자? 참…… 알잖아. 어떤지. 누가 좋아서 그러고 있는 건가? 나도 죽을 맛이라고.”

남자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졌다.

“얼굴도 그냥 그래, 몸도 그냥 그래. 당신이랑은 비교가 되지 않지.”

“그래도 그이는 민국일보라는 아주 큰 배경이 있지요. 나 같은 여자랑 비교가 되겠어요.”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지. 당신은 대양에서도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여자였잖아.”

“아무리 그래도 진짜 당신의 여자는 될 수 없잖아요.”

평소와 달리 여자는 작정하고 속에 품은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려. 언제고 대양이 내 손에 들어오면 그때는 정식으로 결혼을 신청할 테니까.”

“그런 사탕발림 필요 없어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약속이나 지켜요. 재판 끝나면 파리 지사장부터요.”

“물론이지. 그건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 그 거지 같은 새끼 얼굴을 눌러 주고 나서 당신이 파리 지사 지사장으로 부임하는 건 대양에서도 나쁠 게 없는 일이야.”

“2년이에요. 2년 뒤에는 다시 돌아와서 본사의…….”

“임원이지. 걱정하지 마. 그때쯤이면 나도 실권을 잡을 때가 되었을 거야. 우리 노친네가 얼마나 더 버틸 거 같아? 이제 아흔이 넘었어. 아버지가 대양을 손에 넣으면 중공업은 내 거야.”

“알았어요. 참! 그리고 아파트 고마워요. 엄마가 무척 기뻐하셨어요.”

여자가 다시 얼굴을 풀며 말했다.

“다행이네. 근데…… 아직 내가 들르지 못하는 건 이해하지?”

“물론이죠. 당신이 지금 어떻게 거길 가 봐요. 큰일 나려고. 아이도 아직 사람을 알아볼 때가 안 됐으니 괜찮아요.”

여자는 남자가 아이가 태어난 뒤로 겨우 한 번밖에 얼굴을 보이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내일은 잘할 수 있지?”

“재판장에 나가 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그편이 나아. 변론 끝나고, 법원 앞에서 인터뷰하는 걸로 충분해.”

“알았어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일 이야기는 그만하지.”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 * *

변론이 시작되고 한동안 양측 변호인의 날 선 변론이 오고 가는 동안, 유진은 상당한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침통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화통하게 웃고 있고 싶은데, 엄숙한 법정에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앞에서 피고가 그럴 수야 없는 것 아니겠는가?

“피고는 결혼식 바로 전날 원고에게 파혼을 통보했습니다. 그 어떤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말이지요.”

드디어 당사자본인신문이 시작되자, 유진은 외려 편안해짐을 느꼈다.

“피고는 원고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성폭력 담당 검사였던 원고 측 변호인의 태도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성폭력범을 대하는 검사와 같았다.

“그날 이후 만난 적이 없어서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유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고의 그러한 파렴치한 행위로 원고가 유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원고 측 변호인이 다시 한번 추궁했다.

신문이라기보다는 비난에 가까운 단어를 섞어 쓰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쪽의 전략일 터이다.

“며칠 전에야 알았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고는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고, 이제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변호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로서 저는 이 끔찍한 사태가 얼마나 큰 불행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엔 유진이 아니라 재판장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네. 저도 알고 있으니 심문을 계속하세요.”

판사는 변호인의 쇼를 보면서도 제지하지 않았다.

재판장 뒷편에 앉아 있는 방청객들 대부분이 기자라는 사실을 들어서기 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리 법의 잣대로만 공정한 심판을 내린다는 판사라 해도, 기자들의 독기 섞인 기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지금처럼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라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피고는 지금까지 원고에게 한 번이라도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일말의 반성도 보이지 않는 피고의 얼굴을 잘 봐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저 오만한 태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는 방청객들을 향해 말했다.

그녀도 오늘의 방청객들 대부분이 기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재판이 자신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것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를 지니고 있다는 남자를 상대로 마음껏 몰아붙일 기회였다.

더군다나 저쪽에는 한없이 불리하고,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무대이다.

일생에 이런 기회가 몇 번이나 더 오겠는가?

슬쩍슬쩍 변호사는 피고의 변호사들에게 눈을 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 출신의 변호사, 같은 법원 수석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 검사장 출신의 변호사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하나같이 머리가 희끝한 노년의 법조인들이다.

다른 재판이었다면, 상대의 면면만으로도 벌써 기가 질려 버렸을 것이다.

당장 이 재판장의 판사부터가 자신의 옛 상사를 두 명이나 내려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재판이라면 몰라도, 이번만은 다르다.

도저히 질 수 없는, 그러니까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변호사의 날카로운 질문이 계속되었다.

변호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고를 세상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어휘를 동원했다.

“피고 측 변호인, 신문할 거 있나요?”

공정한 재판을 위해 이쪽 변호사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피고는 원고의 인생을 불행으로 밀어 넣고도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떤 후회를 하고 있습니까?”

“좀 더 일찍 결정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양쪽 모두에게 조금 더 불행한 일이 덜 생겼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나요?”

유진은 표정 관리에 애쓰며 대답을 이어 갔다.

“외람되지만…… 제 약혼녀의 부정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혼녀가 단순히 저와의 애정 때문에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말인가요?”

“적어도 당시에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한 번 의심을 하게 되니,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심하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서로에게 크나큰 불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의심의 근거가 있습니까?”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그저 그녀가 하는 말, 그녀의 태도가 자꾸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의심만으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로군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제 의심을 확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재판장님. 증거 제출하겠습니다.”

변호사가 판사를 보며 말했다.

“재판장님! 증거 신청되지 않은 증거입니다!”

상대방 변호사가 소리쳤다.

“증거 신청을 하지 않은 증거를 당일에 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재판장이 불쾌한 얼굴로 유진과 변호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해당 증거가 재판에 필요한지 확인한 뒤에 채택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채택 여부는 다음 변론에서 밝히겠습니다.”

재판장이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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