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58화 (58/363)

58화 증거

“증거를 당일 제출하게 된 것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증거를 내놓을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피고는 물론이고 원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쉽사리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유진의 변호인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재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먼저 제출하면 보고 판단을 내리겠습니다.”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재판장이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지금 세간의 피고에 대한 비난이 지나칩니다. 언론에서 온통 피고를 비난하고 있어 피고의 사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피고는 물론이고, 피고의 사업 관련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현재 피고가 한국의 산업에 투자한 돈만 1조 원에 달하고, 투자 예정인 금액은 3조 원에 달합니다. 피고에게 투자를 받은 사업체들이 입는 피해 규모가 막대한 만큼 더 이상 피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현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가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하며 재판장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는 무엇보다 경제 논리가 잘 먹히기 마련이다.

“본 사건과 관련 없는 이야기입니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 주십시오!”

상대방 변호사가 검사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마냥 필사적으로 외쳤다.

“본 소송과 굉장히 관련이 있습니다. 이 소송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원고뿐이 아닙니다.”

유진의 변호사가 여유 있게 발언했다.

“만일 이 증거가 원고의 명예와 관련된 증거라면 배척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증거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방 변호사도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민사소송법 제290조에 의거, 당사자가 주장하는 사실에 대한 유일한 증거인 때에는 증거로 채택해야만 합니다. 이 증거를 지금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진의 변호사가 가볍게 반론했다.

“재판장님!”

상대방 변호사가 다시 발언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재판장이 손짓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잠시 재판장과 변호사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험험······.”

그리고 잠시 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재판장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의 상사였던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이었던 사람의 작은 바람을 거절한다고 당장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손해라는 것은 틀림없다.

유진이 굳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얼마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에서 퇴임한 전관을 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실 원래라면 저쪽 변호인의 주장을 들어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순간 재판을 주관하는 사람은 판사이고, 그 판사의 마음은 벌써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만일 상대방도 유진처럼 거물급 변호사를 썼다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나약한 피해자를 코스플레이 하기 위해 젊은 여자 변호사를 고용했다.

나름 대형 로펌의 촉망받는 변호사인 듯했지만, 이런 난장판을 헤쳐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재판장님!”

원고의 변호사가 거칠게 소리쳤다.

“조용히 하세요. 증거 채택 여부는 내가 결정합니다.”

재판관은 유진의 변호사를 볼 때와는 달리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원고의 변호사에게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증거라면 우선 틀어 보세요. 피고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고, 한국 경제에 큰 피해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 살펴볼 필요는 있겠군요.”

나름 공평한 재판을 이어간다는 태도로 재판장이 말했다.

유진의 변호사가 경제적 피해를 강조한 것은 판사에게도 변명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감사합니다. 재판장님.”

잠시 뒤, 변호사가 법원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노트북을 재판장의 스피커에 연결했다.

변호사가 노트북의 영상을 플레이하자 반라의 남녀가 다정하게 침대에 누워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노트북의 화면이 그리 크지 않아 재판장의 모두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스피커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본부장님. 어때요?”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자신의 배로 끌고 가며 물었다.

“뭐가 어때?”

“아이······ 우리 아이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냐고요.”

“벌써 느껴질 때인가?”

“16주면 슬슬 태동이 있을 때라구요.”

여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방청석에 기자가 있다면, 본 공판이 끝날 때까지 중계하거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금지하겠습니다. 만일 위반한다면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겠습니다.”

재판장은 사태의 추이가 예상 밖으로 흐르자, 기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러자 몇몇 기자의 얼굴이 굳어진다.

유진은 슬쩍 방청석을 돌아봤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사의 기자들인 듯하다.

그중 일부는 유진의 요청으로, 또 일부는 아마도 대양의 사주를 받고 취재를 나와 있을 것이다.

공판 과정을 지켜보며 열심히 필기를 하거나, 노트북을 사용해 사건 내용을 기록하고 있던 기자들 중 일부가 재빠르게 지금 지켜보는 내용을 회사로 송고하기 시작했다.

몇몇 기자들은 유진과 눈이 마주치고는 씩 웃음을 보였다.

아마도 세종홍보에서 섭외한 기자들인 모양이다.

어떤 기자는 험악한 표정으로 유진을 노려본다.

이쪽은 반대편인 모양이다. 난감할 것이다. 유진을 매장하기 위해 나온 취재인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영상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영상 속 두 남녀는 잠시 배 속의 아이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됐어? 카타르 건은 진행할 예정이래?”

그러다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고, 남자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 사람 회사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잖아요.”

여자도 살짝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낼모레가 결혼인데 아직도 그래?”

“결혼하고 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 아직 노트북 비밀번호도 모르고?”

“네. 내 앞에서 노트북을 연 적도 없어요. 그것도 결혼하고 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싶으면 안 되지. 꼭 그렇게 만들어야지. 할 수 있지?”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누구 보아도 강요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꼭.”

“그리고 성진정밀 건은?”

“다음 주에 공장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그쪽 사장하고는 이야기가 잘 되고 있어요. 공장 확장도 끝났고, 인력도 추가로 뽑을 예정이에요. 추가 물량에 대해서는 걱정할 거 없어요.”

“그쪽이 메인인 거 알지? 최대한 공장을 키워야 해.”

“네. 2년 내로 지금보다 세 배까지 확충시키도록 할게요. 필요한 자금의 차입은 전부 한주 저축은행으로부터 받도록 할 거구요.”

“착하군.”

남자가 굳었던 얼굴을 펴며 여자의 몸을 다시 어루만졌다.

“여기서부터는 서로에게 민망한 장면들이 나올 것이므로, 그만하겠습니다.”

변호사가 판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만 보지요.”

판사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하자, 법원 직원이 노트북의 영상을 정지시켰다.

“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변호사가 다시 요청했고, 판사가 승낙했다.

“강유진 씨는 방금 동영상에 나온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네. 저 당시까지 제 약혼녀였습니다.”

유진은 참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대양솔루션의 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류성규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양솔루션이라면 대양 그룹 계열사지요?”

유진이 대답하려는 찰나, 원고의 변호인이 소리쳤다.

“이 사건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조용히 하세요. 상관이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합니다.”

재판장이 굳은 얼굴로 변호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양솔루션은 대양 그룹 계열사로, 대양중공업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류성규 사업본부장은 대양 그룹 회장의 손자라고 합니다.”

유진이 잠시 멈췄던 대답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대양솔루션의 사업본부장이 어떤 이유로 유진 씨의 업무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요?”

“당시 제가 근무하던 명성실업에서는 카타르의 정유 공장 건설에 대해 입찰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입찰에 대양중공업도 참여할 예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양중공업에서 유진 씨의 약혼녀를 이용해 명성상사의 기업 비밀을 탈취하려고 했단 말이지요?”

원고 측 변호사가 다시 한번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재판장님! 증언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 이건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변호인. 한 번만 더 증언을 방해하면 퇴장시키겠습니다.”

재판장이 변호사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변호사는 입술을 깨물며 재판장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누군가에 책임을 묻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 자신이 가장 먼저 화살의 과녁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저 증거라는 동영상이 공개된 것은 그녀의 책임이 맞다. 어떻게 해서라도 공개를 막아야 했다.

이제 앞날이 창창하던 변호사는 자신이 속한 로펌의 가장 큰 고객인 대양 그룹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계속하세요.”

재판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변호사를 외면하고 유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양중공업은 대양솔루션의 류성규 사업본부장을 통해 제 약혼녀를 구슬려 제가 알고 있던 명성상사의 사업 계획을 탈취하려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진 측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함께 살게 되면 제가 알고 있는 회사 일들을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공유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일할 때도 꽤 있으니, 제 컴퓨터에 담긴 기밀문서도 그녀가 접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증인은 명성상사의 프로젝트 오가나이징 부문의 팀장으로 명성상사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프로젝트 오가나이징 그룹의 다섯 개 팀 중 하나를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취급하던 사항들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기밀이 많았습니다.”

“만일 계획대로 결혼을 하고 원고가 피고의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다면, 명성상사에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겠군요.”

변호사는 몇 번이나 명성과 대양을 강조해 말했다.

물론 전부 유진의 오더였다.

“확실하게 대답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나름 주의는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한다 해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국내에서 프로젝트 오가나이징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는 모두 다섯 곳입니다. 그중 대양과 명성은 지금까지 여러 번 같은 사업으로 경쟁을 했습니다. 만일 제가 알고 있던 기밀이 누설된다면, 작든 크든 영향을 받았을 것은 확실합니다.”

“이 영상을 보았을 때, 증인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참담했습니다. 그전에도 조금 의아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유진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증거가 있는데 어째서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이걸 공개하면 상대방에게도 저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피고에게도 말이지요?”

“네. 경쟁사의 계략에 휘말려 자기 회사의 정보를 누설할 뻔한 사실만으로도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지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제가 사랑했던 사람의 계략으로 부친께서 오랜 시간 동안 일구어 온 회사까지 빼앗길 뻔했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제가 잘하고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실을 두 분께서 알게 되시면 얼마나 괴로워하실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말하는 지금도 고통스러운 듯한 유진의 발언에, 변호사가 잠시 시간을 두고 말했다.

“강유진 씨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법정이니 재판에서 밝혀야 할 것은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겠군요. 부친의 회사가 노려지고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네. 동영상의 뒷부분에 두 사람이 그에 대한 모의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복장 때문에 여기서 공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송의 원고와 대양 그룹 회장의 손자가 지금 성행위를 하며 당시 원고의 약혼자였던 피고의 부친이 운영하던 회사를 빼앗을 계획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말씀이시지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영상을 살펴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상대측 변호인이 다시 외쳤다.

“해당 영상은 타인의 개인적인 생활을 침해한 도촬 영상으로, 독수독과이론에 따라 증거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 재판장님은 기자들에게도 오늘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주십시오!”

“독수독과이론은 형사소송법에 의거해 증거의 위법 여부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민사소송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상은 도촬이 아니라 강유진 씨 소유의 자택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입니다.”

“그렇다해도 불법적인 증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변호사는 간신히 잡아 낸 꼬투리를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 했다.

“도촬도 아니고 불법도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걸 증명하겠습니다. 강유진 씨, 이 영상을 촬영한 방범 카메라는 어떻게 설치하게 되었습니까?”

“당시 약혼녀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카메라를 설치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전 카메라만 구입했고, 설치는 그 사람이 직접 했습니다. 방범 카메라가 돌아가는 사실도 몰랐고, 결혼식 전날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참담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영상의 후반부를 보면 이 카메라를 설치한 이유가 집안에서 제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부부 사이를 도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대화가 오고 갑니다.”

다행히 유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먹먹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울컥해지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감시 카메라를 강유진 씨의 카드로 결제한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변호사가 쐐기를 박았다.

“변호인. 할 말 있어요?”

재판장이 원고 측 변호인을 바라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 여전히 증거의 불법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호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건 내가 판단하겠습니다. 반대 신문 없으면 본인신문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판사가 선언했다.

“오늘 제출받은 증거의 채택 여부는 우선 유보하겠습니다. 이번 변론은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판사가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진은 이날 열심히 해 준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 출신 변호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생하셨어요. 힘든 시간이었죠?”

근엄하던 판사의 얼굴은 이미 오래전에 훌훌 벗어 버린 변호사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유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재판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이래서야 상대방이 더 진행할 의지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허허.”

누가 봐도 이제 끝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자. 들어들 갑시다.”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건너편 원고 측에 앉아 있던 변호사는 파래진 얼굴로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기 얼마 전.

법원 앞에 정차한 택시에서 막 내려서던 여자가 벨 소리를 듣고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네. 도착했어요. 법원 앞이에요. 네? 뭐라고요? 돌아가요? 왜요? 택시!”

그녀는 지시에 따라 우선 손을 들어 다시 택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택시가 없다. 타고 온 택시는 이미 누군가를 태우고 떠나 버린 뒤였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한채아 씨!”

카메라를 목에 건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뭐라고요?”

여자는 아직 들고 있던 전화기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한채아 씨! 오늘 재판장에서 한채아 씨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증거가 나왔다고 하는데요.”

가장 먼저 도착한 기자가 물어본다.

동시에 뒤따라온 기자가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번쩍!

플래시가 터진다.

“네? 지금 기자들이······.”

여자는 패닉에 빠졌다.

도망가라니? 어디로? 대체 왜?

“한채아 씨. 류성규 본부장과 밀회를 즐기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명성상사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려 했다던데, 맞습니까?”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씨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온 것도 그와 동시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