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설상가상
“그 사람이 너무 무서웠어. 지금까지 전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 거야. 흑!”
한채아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린다.
아니, 전화기 저편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우는 소리만 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안해. 미안해. 흑!”
어쩌면 연기에 심취해 정말 울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도망가는 중이야. 지금 여기는······.”
그녀가 자기 위치를 알려 주려 했다.
“그보다 차라리 경찰을 찾아가. 지금 날 만나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당신의 행동이 의심받을 뿐이야. 정말로 그 남자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거라면 그 길만이 살길이야.”
유진은 결코 그녀와 만날 생각도, 도움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냉정하게 모른 척하는 말을 남길 수도 없다.
그랬다면 이 여자는 그걸 무기로 사용할 것이다.
“당장 경찰에 연락해. 그리고 신문사에도. 아무 신문이라도 괜찮아. 지금 한국의 기자들은 전부 당신을 찾고 있으니 당장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줄 테지. 아! 민국일보는 빼고.”
“날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거구나?”
“용서의 문제가 아니야.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하는 거야. 당신도 영리한 사람이니 내 말뜻을 알 거야.”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리고······ 살아남게 되면 다시 연락할게. 그때 다시 용서를 빌게.”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나쁜 새끼!”
전화가 끊기자 여자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넘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강간을 당했다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더러운 놈. 너도 똑같은 놈이었어. 퉤!”
여자는 길에 침을 뱉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그녀는 스스로 감추고 있던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여자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엄마. 나야. 어. 방송 봤다고? 보지 마, 그런 거. 어차피 지금은 전부 내 욕만 하고 있을 테니까. 그보다 지금 짐 챙겨서 거기서 나와요. 왜긴 왜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애 데리고 어디 숨어 있어요. 당분간. 응? 아니. 거긴 좀 그래. 거기 말고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요. 당장. 이것저것 챙길 거 없이 젖병하고 기저귀만 대충 가지고 나가요. 필요한 건 밖에서······ 현금으로 사고. 알았어요. 내가 연락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전화도 하지 말고.”
다급하게 지시를 내린 여자는 다시 전화를 끊었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유진은 잠시 고민을 해 봤다. 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고민은 길지 않다. 유진은 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있었던 통화 내용을 알려 주었다.
“통화 녹음은 해 놓으셨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하고, 경찰에 알리겠습니다. 녹음한 파일 제게 좀 보내 주세요.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대양 그룹에 다시 한 방 먹일 수 있겠군요. 하하.”
검찰 고위직 출신의 변호사이니 알아서 해 줄 거라 믿어 본다.
* * *
그날 저녁 대양 그룹 회장 저택에는 다시 고급 승용차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게야! 어째서 그 녀석이 그런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거냐!”
아흔 살 노인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렁찬 호통 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파삭!
거실의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조선백자가 노인의 손에 던져져 박살이 났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장남을 비롯한 자식들과 사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상대가 무얼 갖고 있을지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노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노인의 성이 풀릴 때까지 그저 조아리고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정신들이 없는 게냐? 어쩌자고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노인의 노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와장창!
탁자 위의 도자기에 이어 재떨이까지 하늘을 날았다.
그럴 때마다 아들들과 사위들은 모두 혹시라도 자신에게 날아올까 몸을 움찔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대양을 무어라 하는지 보거라!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란다.”
쾅!
노인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더냐? 차라리 살인이라면 모를까, 불륜? 허! 기가 막히구나! 너희들은 이래 가지고 어디 가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나 있겠더냐?”
노인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좌중의 인물들은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억울해도 보통 억울한 게 아닌 모양이다.
만일 이 자리에 당사자인 류성규가 있었다면, 아주 치도곤을 치렀을 터이다.
하지만 류성규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누구 하나쯤은 그 녀석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 알아봤어야지! 대체 그런 정신머리들로 무슨 사업들을 한다는 게야!”
노인의 질책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 갔느냐?”
마침내 노인의 화살이 이 사태를 몰고 온 당사자에게 돌아갔다.
“지금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경기도에서 오는 중인데 차가 막히는 모양입니다.”
성규의 부친인 류근수가 대답했다.
“올 거 없다. 그 꼴 보기도 싫으니 여기 얼씬도 하지 말도록 하거라.”
노인이 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님. 당분간 자중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이고 뭐고, 그 녀석 당장 태안으로 보내!”
노인의 말에 류근수가 흠칫한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달리 뭐라고 토를 달겠는가?
그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태안이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직접 차를 몰고 조부의 저택으로 향하던 성규는 부친의 전화를 받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집으로 가서 짐 챙겨 내려가겠습니다. 아뇨······ 네, 잘 알겠습니다. 제기랄!”
전화를 끊자마자 성규는 욕설을 내뱉었다.
태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대양 그룹 계열의 요양소와 별장뿐이다.
요양소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규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으랴?
부름이 있을 때까지 그냥 별장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지내라는 말이다.
하나 한 번 조부의 눈 밖에 난 이상, 다시 복귀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이 빌어먹을 새끼! 죽어! 죽어! 죽어!”
성규는 차를 세우고 두 손으로 핸들을 마구 내리쳤다.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줄 알고! 강유진! 이 개새끼!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한동안 그렇게 분을 풀지 못해 화를 터트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기에 표시된 상대방 전화번호를 보고 성규는 다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뭐 하는 거야? 어째서 아직도 안 떠난 거야? 내가 제일 빠른 비행기로 떠나라고 했잖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른다.
- 공항에 기자들이 있는 거 같아서 몸을 피했어요.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보는 거 같아요.
“지금 어디야?”
- 청주요. 터미널 근처예요.
“거긴 또 왜 갔어?”
- 아무 버스나 타고 내려왔어요. 경황이 없었어요.
“제기랄, 어쩔 건데? 이제?”
- 차라리 조용한 데에 숨어 있을 생각이에요.
“그렇게 해.”
-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피해 있을 자금 좀 마련해 줘요.
“응? 음······ 그래. 차라리 이렇게 하지. 지금 청주 터미널 근처라고 했지? 사람 보낼 테니까 이쪽으로 와.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보자고.”
성규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지만, 그의 눈빛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여자와의 전화를 끊고 성규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회사에 도착한 유진은 언론과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온통 오늘의 사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 와! 이 형 대단하다. 어떻게 그걸 가지고 아직까지 터트리지 않고 있었냐?
- 쪽팔리니까 그랬겠지. 약혼녀가 다른 남자랑 붙어먹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 쉽겠냐?
- 하긴 나 같아도 쉽게 말 못 하겠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아는데 말이야.
- 참 다행이다. 그 동영상이라는 거 발견 못 했으면 그대로 결혼했을 거 아냐?
- 와, 끔찍하다. 그런 여자랑 결혼해서 같이 산다고?
대체로 유진에 대해 호의적인 글들이 많다.
- 그 동영상이라는 게 진짜인지 모르겠다. 엄청 부자잖아. 그러면 가짜 동영상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 택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그걸 어떻게 만드냐? 더군다나 법원에 증거로 제출할 건데.
- 뭐 할리우드 특수 효과로 대충 못 만들려나? 한 1억 달러쯤 쓰면 되지 않을까?
- 세상에 돈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어. 망상에서 좀 깨어나라.
반면 어떻게 해서든 유진을 비난하려는 글들도 적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상대방 측에서도 지금 필사적일 터이니.
- 그런데 대양 그룹 졸라 웃기네. 얼마 전에는 막내 손잔가? 미국에서 사고 쳤잖아. 이번에도 손자라며? 그쪽 손자들은 다들 막 나가네.
- 그때는 손자 아니고 아들. 대양 그룹 회장 막내아들. 이번에는 손자
- 아들이라고? 그때 보니까 스물 몇 살인가 그렇던데? 회장 나이가 90이라며?
- 회장이 70 다 되서 낳은 아들이라더라. 웃긴다니까.
- 대양 그룹 회장님 대단하시네.
- 근데 산업 스파이면 감옥 가냐?
- 감옥은 무슨. 대기업 사주 가족이 감옥 가는 거 봤어? 잘해야 집행유예지
- 산업 스파인지도 애매하잖아. 솔직히 부부끼리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냐?
- 지랄 났네. 그럼 부부끼리는 회사 기밀을 막 유출해도 되냐?
게시글 중에는 일부러 분란을 일으키려는 글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보다 수없이 많은 글이 부도덕한 대양을 비난하며, 대양 그룹 계열사의 제품을 불매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걸 읽고 있는 유진도 어느 글이 세종 홍보의 하청업체가 올린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상당수는 정말로 분노한 사람들의 글이라 생각됐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남의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결혼을 하려 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게 고약한 의도로 대기업 식솔이 지시를 내린 일이라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반응을 살피며 쉬고 있는데, 세종 홍보의 철우가 찾아왔다.
“그래, 오늘 수고가 많다.”
“수고는 무슨. 다 네가 만들어 놓은 요리를 상에 올리기만 하는 건데.”
“포털 사이트고 뉴스고 아주 난리가 났더구나. 그만큼 세종에서 열심히 해 준 덕이지.”
“난리는 난리지. 적어도 일주일은 이번 일로 도배가 될 거야.”
“일주일이나?”
연쇄살인범이나 아동 학대 같은 큰 사건도 일주일이면 슬슬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기 마련이다.
“한국 벤처에 대한 투자 발표는 주말쯤 하면 될 거야. 장작이 떨어지지 않게 계속 지펴야지.”
철우가 돌아간 뒤에는 김환과 요안나를 불러 진행하던 일을 논의했다.
“투자 대상 기업의 수를 50개로 압축했습니다.”
먼저 김환이 보고했다.
“이번 주 주말에 1조 원의 투자 확정을 발표할 거니까, 그때까지 협상 끝낼 수 있지?”
“주말이라······ 시간이 촉박하군요.”
김환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투자 유치도 아니고, 투자를 하겠다는 건데 굳이 안 될 거야 없지요. 적어도 MOU 교환까지는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1조 원이라는 금액 정말 크네요. 하하.”
“그래. 컨펌은 하지 말고 양해 각서까지만 끝내. 그 정도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요안나는?”
“대양 그룹에서 진행 중인 사업들을 확인해 봤어요. 당장 중요한 것은 삼호카드 인수 건과 맥스 편의점 인수 건이더군요. 놀랍더군요. 한국의 대기업이란 것들은.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분야를 손대고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는 거죠?”
“아무래도 세대가 넘어갈수록 챙겨 줘야 할 식솔들이 많아지니까. 손자가 열 명쯤 되면, 열 개쯤의 기업이 필요한 법이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뭐. 아시아 기업들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여하튼 맥스보다는 삼호카드 쪽이 좀 더 규모가 크더군요. 만일 보스가 관여한다면 삼호카드에 힘을 싣는 게 좋겠어요.”
“그래? 맥스 편의점이라······.”
유진은 이맘때 맥스 편의점이 어떻게 되었었던지를 더듬어 보았다.
대양과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원에서 유진이 그걸 터트리는 순간부터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었다.
* * *
태안의 별장에 도착한 성규는 거실의 장식장에서 독한 위스키부터 꺼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오실 거라는 연락을 못 받아 지금 요리사도 없는데······.”
별장의 관리를 맡고 있는 노인네가 냉장고에서 몇 가지 안줏거리를 챙겨 성규 앞에 가져다주고는 머리를 수그리며 물어 왔다.
“저녁은 됐어. 그냥 혼자 쉬고 싶으니 냅 둬. 아! 그리고 김 씨도 들어가 봐. 당분간 조용히 지낼 생각이니 부를 때까지는 얼씬거리지도 말고.”
“예에. 알겠어요.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셔요.”
관리인은 넙죽 인사를 하고는 별장에서 나가 버렸다.
“후우······ 씨발······.”
성규는 거칠게 위스키병의 뚜껑을 따고 글라스에 가득 담았다.
생각만으로도 열불이 돋는다.
내려오는 내내 고심을 해 봤지만, 아무 성과도 없다.
이 난관을 헤쳐나갈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 새끼······ 가만 두지 않는다. 내가······.”
술잔을 비우고 있는 성규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위스키를 연신 비워갈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위스키병이 1/3이나 비었고, 성규의 얼굴도 조금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가 조금이나마 수그러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놈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성규가 다시 위스키를 잔에 따르고 있을 때였다.
거실의 인터폰에서 벨 소리가 난다.
아마도 그녀를 데려오라 시킨 녀석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성규는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고, 대문까지의 꽤 긴 거리를 걸어 가며 김 씨를 돌려보낸 것을 약간 후회했다.
녀석들이 오고 나서 돌려보내도 늦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다.
대문까지 걸어 가는 동안 찬 바람을 쐬며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성규는 약간의 심호흡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한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은 성규가 기대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류성규 씨?”
재킷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누구요?”
갑자기 술이 확 깬다. 혹시 기자인가?
“경찰입니다. 류성규 씨를 성폭력 및 납치 사주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형사가 수갑을 꺼내 성규의 손에 거칠게 채우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