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62화 (62/363)

62화 아웃사이더

“정말로 그냥 풀려나 버렸네요.”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양 그룹 류성규는 경찰에 체포되고 겨우 이틀 만에 경찰서를 나섰다.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는 무고에 불과하다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겠다 주장했고, 그걸 입증하기 위한 증거도 변호사를 통해 제출하겠다 말했다.

“성폭행에 납치를 하고도 어떻게 구속되지 않는 거죠? 한국은 굉장히 치안이 잘 되어 있고, 공정한 사법체계를 가진 선진국 아니었어요?”

“미국이었다면 절대로 저렇게 쉽게 풀려나지는 않았을 거 같아? 한 시간에 5,000달러짜리 변호사가 붙어도?”

유진이 물었다.

“어? 음…… 하아, 어디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네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봐요.”

“미국에서 비싼 변호사를 쓰면 살인을 해도 풀려날 수 있는 것이나, 한국에서 재벌과 관련된 범죄가 엄벌을 받지 않는 것이나 피장파장이지.”

“보스는 화가 나지도 않아요? 저 사람이 보스한테 저지른 짓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것이?”

“처음부터 저걸로 그 녀석을 옭아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이 나라에서 대기업 사주 가족이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유진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래도 저 녀석은 이제 대양 그룹에서 쫓겨나게 생겼어요. 이 정도로 사고를 쳤으니 더는 대양에서 일하기 힘들 테니까요. 꼴 좋네요.”

김환은 요안나와 달리 작금의 사태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그건 그렇지.”

요안나나 김환은 몰라도 유진은 류성규가 그 집안에서 무척 불안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녀석은 꼬리에 불과하지.”

진짜 대가리는 대양중공업의 사장, 그리고 그 위의 회장이다.

그러니까 류성규 하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양 그룹 계열사들 주가가 꽤 올랐네요. 당일 오후에는 5%쯤 빠지더니 이틀 만에 회복하고는 이제 확실하게 상승세로군요. 특히 대양중공업은 벌써 15%나 올랐어요. 사람들이 우리가 대양 그룹을 빼앗기 위해 행동에 나설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주식 시장은 예측할 수 없는 짐승과도 같다.

그렇게 큰 사건을 거하게 저질렀는데도 오히려 돈이 모여들고 있다.

대양 그룹에 원한을 가진 한국 제일의 현금 부자가 대양 그룹을 손에 넣기 위해 매수라도 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요.”

뭐.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가가 오르내리는 것에는 그저 핑계가 필요할 뿐이다.

“그렇지. 대양 그룹에 원한이 있다고 해서 내 돈을 주고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서야 놈들한테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에 불과하잖아. 더군다나 내가 원한이 있는 것은 대양 그룹이 아니라 그 회장 일가일 뿐인데.”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늘 그렇다.

사실과 관계없는 예측을 내어놓고, 호재라 생각하며 투자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양중공업 주식이나 사 놓을 걸 그랬습니다. 흐흐, 물론 그랬다면 주가 조작이니 뭐니 골치가 아팠겠지만요.”

“맞아.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야.”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인과 금융기관의 내부 거래를 감시하고 엄벌에 처하지만, 한국의 금융감독원은 외려 대기업과 증권회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아직 아웃사이더에 불과한 유진의 경우,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끝을 볼 때까지 괴롭힐 것이다.

그 때문에 당분간은 대양 그룹 계열사 주식에 대한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유진의 행위가 대양 그룹 계열사의 주가에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작은 이득이라도 얻는다면 당장에 조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SS벤처스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4,000억 원에 달하는 스타팅 기업에 대한 투자를 마쳤고, 추가로 50여 기업에 1조 원의 신규 투자를 확정했습니다. 지금까지 국내 어떤 벤처 캐피털에서 집행한 투자 금액보다 몇 배나 많은 금액입니다.”

그 주 주말, 오진성 COO가 기자들을 불러 기자 회견의 자리를 열었다.

“SS벤처스에서는 단순히 IT 기업뿐 아니라 눈에 띄지는 않지만 경쟁력 있는 기술력을 지닌 국내외의 다양한 기업들에 대한 투자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성진정밀처럼 훌륭한 기술을 보유하고도 대기업의 하청으로 흔들리는 중소기업이 다시는 생기지 않길 바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오진성은 SS벤처스의 투자 방향성을 서두로 말을 이어 갔다.

“1차적으로 국내 기술 중소기업 10여 곳에 1,000억 원 대의 투자를 집행했고, 또한 독일의 퓌클러 짐머만 정밀 기계 개발을 인수해 선진적인 독일 기계 공업 노하우를 국내 기업들에 전수할 예정입니다.”

우선 투자 액수로 기선을 제압했고, 그 뒤로는 대기업들에 좌지우지되는 국내 기술 산업체에 대한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혹시라도 성진정밀처럼 대기업과의 분쟁에 곤란을 겪고 계신 중소기업 사업주분들이 계시다면 저희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만일 정말로 억울한 상황이라면 최선을 다해 법률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들의 손이 점점 분주해졌다.

“앞으로 한국의 산업계는 단순히 대기업에서 1차 벤더, 2차 벤더 순으로 일관되게 단순 하청을 내리는 구조로 유지되는 경제구조에서, 독자적인 기술 경쟁력을 가진 다양한 강소 기업이 대기업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히든 챔피언들이 되어 이끌어 갈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해야 할 것입니다. SS벤처스에서는 앞으로 10년 동안 이러한 기술 기업들에 최소 10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수혈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년간 30만 명에 달하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오진성 COO는 기자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들을 잔뜩 섞어 가며 회견을 이어 갔다.

청년 실업의 문제가 심화되며 정부의 기조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는 시기이다.

기술 위주의 중소기업에 대한 거액의 지원 방안을 내놓는데 싫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기자들은 열심히 오진성 COO의 회견을 받아 적었다.

때때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대개는 이미 사전에 협의된 질문들이다.

“SS파트너스에서 강남의 대형 빌딩들을 마구잡이로 매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보다 부동산에 투자한 금액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결국은 해외에서 들어온 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 회견장에 온 모든 기자들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강남의 빌딩을 매입한 것은 투자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신사업을 위한 것입니다. SS벤처스에서는 3년 이내에 적어도 수백 곳의 벤처기업에 투자를 확정할 예정에 있습니다. 단순한 자금 투자뿐 아니라 각 스타팅 기업들이 곤란해하는 문제들에 대한 지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액의 사무실 비용은 이런 스타팅 기업들에게 상당히 곤란한 문제 중 하나이지요.”

“그렇다면 부동산 매입이 SS벤처스에서 투자한 기업들에 사무실을 제공하기 위한 것인가요?”

“물론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SS벤처스에서 미처 투자하지 못한 수많은 스타팅 기업들에게 저렴하고 편리한 업무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다소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오진성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강남에 5, 6명이 사용할 사무실을 임대하려면 최하 월 수백만 원은 필요합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기업에 있어서 1년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은 무척이나 큰 부담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서울, 그것도 강남이 아닌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면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습니다. SS파트너스의 신사업은 이러한 스타팅 기업들에게 개별 오피스 임대에 비해 월등히 적은 비용으로 강남권의 번듯한 빌딩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기자회견은 자연스럽게 신사업에 대한 홍보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사실 그런 목적으로 빌딩을 구매한 것은 아니다.

유진은 강남의 빌딩들이 지금부터 천정부지로 오를 것을 잘 알고 있다. 여유 자금도 넘쳐 나는데, 사 놓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했고, 마침 안성맞춤인 사업이 있었다.

세계적인 코워킹 스페이스 제공업체인 위워크도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니 이러한 신개념의 사업을 시작하고, 한국 경제에 이바지할 벤처기업에 도움을 주겠다는 포부가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오진성 COO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시간, 유진은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할 일들을 얼추 마무리 지었으니, 다시 수금하러 갈 시간이다. 여전히 유진에겐 뉴욕에서의 일이 메인이고, 한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좋은 거래가 되었네.”

맨해튼에 돌아와 며칠 뒤, 트럼프와 회담 시간을 가지고는 몬테카를로에 있는 호텔을 매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2억 달러짜리 호텔에 유진은 1억 8,000만 달러를, 그리고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은 2,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물론 양측 다 대부분의 자금은 은행에서 차입해서 해결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호텔에 트럼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대가로 매년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에 150만 달러의 사용료를 내기로 협의했다.

트럼프의 투자액이 적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90년대에 운영하던 사업체를 4번이나 파산시킨 이후로 트럼프는 자기 돈을 들여 부동산을 구입하고 사업을 하기보다는 이름을 빌려주고 라이선스 비용을 챙기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자산이 될 이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TV쇼에 출연하고, 다양한 기행을 벌여 왔다.

트럼프의 막말은 그가 정말로 미치광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행동들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인식시키려는 방편에 불과할 뿐이었다.

몬테카를로의 멋진 호텔에 트럼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상관은 없다. 겨우 몇 년 동안만 그 이름을 쓸 생각이니.

그리고 그 호텔에 들어간 자금도 유진의 자산에 비하면 푼돈에 가깝다.

딱히 운영할 생각 없이 별장으로만 써도 나쁘지 않다.

“공화당 경선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다면서요. 축하합니다.”

“뭐.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트럼프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요. 당연한 일이지요. 지금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까지 쳐도 트럼프 씨 정도의 인지도와 파급력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 트럼프 씨가 무난하게 백악관을 차지할 거라 믿습니다.”

“글쎄, 내가 공화당 대선 후보에 오를 것을 예상하는 사람은 많아도, 대통령은 무리라고들 하더군.”

트럼프가 슬쩍 비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결국 트럼프 씨가 이길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우리 가족 말고는 처음이야.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 미국인들은 올바름 놀이에 신물이 났으니까요. 정의라든지 세계의 평화 따위가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내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낭비를 강조하는 여자에게 표를 주기는 정말 싫을 겁니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맞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야. 내 삶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꼭 승리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야.”

트럼프도 유진이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가능성도 없는 베팅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베팅에는 자신이 있어서요. 지난 1년 동안 10여 개의 크고 작은 투자를 해 왔고,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지요.”

“나도 들어보았네. 1년 동안 수백 배의 이윤을 보았다지?”

“이번에도 내 눈이 틀림없이 맞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겁니다. 트럼프 씨를 통해서요. 가능하다면 트럼프 씨의 선거에 기부금을 제공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민권을 받지 못해 그럴 수 없군요.”

“정말 아쉬운 이야기로군.”

트럼프가 입맛을 다셨다. 현재 월가에서도 이름난 현금 부자인 유진의 도움이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트럼프는 대선을 오직 자기 돈으로만 사용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대선에 필요한 자금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상황에서 거액의 기부금 없이 선거를 치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트럼프 씨의 당선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그 이후가 문제이지요.”

“문제라고?”

“물론이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지금의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이 수익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아요.”

트럼프가 대선에 나선 이유는 첫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는 그 자체였고, 그다음은 그걸 통해 이익을 보는 것이다.

“트럼프 씨는 워싱턴에서 아웃사이더죠. 그러니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적지 않은 시기와 감시에 시달릴 겁니다.”

“그러겠지.”

트럼프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