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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70화 (70/363)

70화 속셈

“어쩐지 버킷리스트를 새로 업데이트해야 할 거 같군요.”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의 눈빛과는 묘하게 달랐다.

“업데이트는 다 되셨나요?”

사라가 물었다.

“네. 다 된 것 같군요.”

유진이 차를 출발시켰다.

사라는 유진의 허벅지에 댄 손을 떼고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 MoMA로 가지 말아요.”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이대로 달려가요.”

“알았어요.”

유진은 어디까지냐고 묻는 대신 차를 몰았다.

“서로에 대해서 궁금한 걸 물어봐요. 우리.”

“그러죠.”

“유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사라의 목소리는 다시 발랄해졌다.

“나도 사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요.”

“잘 됐군요. 지금 아메리카에서 유진 캉이 가장 신비한 인물로 꼽히는 거 알고 있지요?”

“그런 모양이더군요.”

그런 이미지는 절반 정도는 유진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봐요.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지요.”

“직접 만나보니까 유진은 인간적으로도 꽤 매력 있는 남자더군요.”

사라는 질문하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직 동양 남자와는 만나본 적이 없는데, 유진은 그런 날 꽤 두근거리게 만들었어요.”

만일 유진이 사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면, 그녀를 부자에게 접근하려는 흔한 골드 디거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재벌과도 비견되는 가족 배경과 그녀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그녀가 몇 년 뒤에 결혼하게 되는 사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칭찬이 너무 과하면 무서운데요.”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과하지 않아요. 그런 업적을 이루어 낸 사람치고는 괴팍하지도 않고요.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젊은 나이에 굉장한 부를 이룬 사람들을 몇 명 만나보았는데, 다를 어딘가 망가져 있었어요.”

“망가져 있다라…….”

“독선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더군요. 하나같이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죠. 어떤 의미에서 커다란 성공을 이루려면 그렇게 자기밖에 몰라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참, 여기서 우회전이요.”

사라가 손가락으로 앞의 사거리를 가리켰다.

아마도 마냥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면이 있겠지요.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요. 특히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공감 능력 같은 것은 솔직히 말해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때가 많지요.”

월 스트리트나 실리콘밸리의 많은 성공적 인물 중 상당수는 독선적인 성격을 넘어서 사이코패스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위주라는 사실은 꽤 유명하다.

“한데 유진은 조금 다른 사람 같아요.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유진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더군요.”

사라의 말처럼 유진은 그런 성공자들과는 꽤 다른 특성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런 이유 덕분에 유진은 지난 삶에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능력을 지니고도 독선적인 리더가 되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계속 달려가면 돼요.”

어느새 유진이 몰고 있는 DB5는 맨해튼을 벗어났다.

교외로 빠지면서 뻥 뚫린 도로를 유진은 편안하게 질주했다.

룸미러로 보니 경호원들이 탄 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렇게 큰 배신을 당하면 어떤 기분이에요?”

사라가 처음으로 유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불쾌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사라가 묻는 것은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유진에게 그 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가 느꼈던 당혹감, 분노, 후회 따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비참했던 것 같군요.”

한참 만에 유진은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라는 가볍게 유진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의 당신을 보면 어째서인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거 같아요.”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굉장히 유쾌하고, 친절하고, 그림자가 없어요. 심지어 가식적이지도 않고요. 그런 일이 벌어진 지 겨우 1년밖에 안 된 것 같지가 않아요.”

“1년은 꽤 긴 시간이지요.”

유진이 살짝 고개를 돌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정말로 그 일을 저 멀리 던져 버린 것인지.”

사라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게 다예요. 당신처럼 성공하고 멋진 사람이 정말 그런 커다란 배신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말이지요. 그런데 더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확실히 후회나 미련 따위가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제 당신 차례에요.”

“좋아요. 내 질문에 사라도 정직하게 대답해 줄 것을 믿어요.”

“물론이죠.”

“지나 민.”

유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라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어떤 사람의 이름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라의 얼굴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어…… 음…….”

잠시 유진은 사라가 당황하는 것을 즐겼다.

“제 룸메이트이고, 좋은 친구예요.”

한참 만에 사라가 대답했다.

“솔직한 대답.”

유진이 유쾌하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요.”

사라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해했죠? 비슷한 거예요. 난 아주 많은 일들을 알고 있어요.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조합해서 정답에 다가가는 것.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에요.”

“음…… 그런가요? 확실히 내가 지나와 함께 살았던 것은 몇 번쯤 인터뷰에서 밝힌 것 같기도 하네요.”

조금 새침해진 표정으로 사라가 말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이에요. 어째서 나한테 접근한 거죠?”

그녀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궁금할 것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녀가 유진에게 접근했는지는 궁금했다.

사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진아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요.”

“능력 있는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걸요?”

“그런 거죠. 우리 아빠는 절대 이해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 관계…….”

사라의 부친은 상류층답게 꽤 보수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진아에게 투자가 필요해요. 아주 많이요. 아빠한테 자금을 투자받고 싶은데, 조건이 있었어요. 제대로 된 남자와 사귈 것.”

“그러니까 날 이용하려고 했던 거네요?”

“미안하게 됐어요. 그래도 공짜는 아니었다고요. 당신한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어떤 도움 말인가요?”

“스캔들이요.”

사라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지금 미디어에서 당신에 대해 수없이 많은 기사를 올리는 거. 조금, 아니 꽤 비정상적이에요. 내 생각에는 당신 스스로가 만드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때 즈음 스캔들 하나 터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특히 나처럼 멋진 여자라면 말이죠.”

“그렇군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몸은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사라가 살짝 기가 죽어 말했다.

“스캔들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잠자리는 같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거죠?”

“그 정도는 할 자신이 있었다구요. 이젠 전부 망해 버린 것 같지만.”

“좋아요. 그렇게 하죠.”

유진이 흔쾌히 사라의 조그마한 음모에 가담하기로 했다.

“사라 양의 부친과도 만나도록 하죠.”

“정말요?”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뭔가요?”

“진아 양과 만나고 싶어요.”

“어째서요?”

사라가 깜짝 놀란다.

“진아 양에게 투자를 하고 싶으니까요.”

사라와의 데이트에 나선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아니. 사라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전부 그 때문이다.

며칠 뒤, 유진은 사라의 부친을 만났다.

그녀와의 거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반갑습니다.”

아서 델비안은 키가 크고 잘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딸인 사라의 미모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여왕 폐하의 자금을 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깐의 스몰 토크가 오고 간 뒤 아서는 본 용건을 꺼냈다.

요안나를 통해 이미 그런 의사임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유진은 놀라지 않는다.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3억 달러 상당입니다.”

생각보다 꽤 많은 돈이다.

영국 왕실 재산의 상당수는 부동산이다. 런던 쇼핑 중심가 리젠트 스트리트의 거대한 상업용지와 랭카스터 영지 등에 맨해튼의 세 배에 달하는 부동산을 지니고 있어, 이 가치가 왕실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더군다나 공식적으로 영국 왕실의 부동산은 크라운 이스테이트(Crown Estate) 재단에 위임되어 있다.

거대한 부동산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크라운 이스테이트를 통해 영국 재무부로 들어간다. 그 대신 재무부는 부동산 수익의 일정 부분을 왕실에 제공하는 식이었다.

“정상적인 자금이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 여왕과 영국 왕실이 15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해도 3억 달러를 한 명에게 맡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유진은 혹시 여왕의 비자금을 말하는 것인지 의심해 본다.

여왕의 자금을 굴리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괜히 영국 왕실의 비자금을 굴리다가 정치적으로 곤란해지기는 싫다.

“물론 정상적인 자금입니다. 출처도 명확하고요.”

“좋습니다. 정상적인 여왕님의 공식 자금이라면 받아들이지요. 매년 두 번 자금 운용 현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익의 30%를 운용 수수료로 공제하겠습니다.”

유진은 자금 운용의 조건을 나열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유진 씨가 받아 주시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솔직히 유진 씨가 굳이 다른 사람의 자금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여왕 폐하의 자금이라면 저로서도 영광이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여왕 폐하께서도 유진 씨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실 겁니다. 물론 공식적으로요. 그리고 언제든 영국에 들러 주시면 알현하실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영연방 어디서든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아서는 유진의 호의에 대가를 치르겠다는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이내 실무진을 불러 영국 여왕의 자금을 유진의 펀드에 송금하는 절차까지 마무리지었다.

“참! 사라가 유진에 대해 많은 말을 하더군요.”

공식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이번에는 딸의 새로운 남자 친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며칠 뒤, 요안나가 말을 꺼냈다.

“어떤 거?”

유진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제 가족의 자금 운용에 대해서요.”

“아! 고민해 본 거야?”

“물론이죠. 당연하지 않아요?”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지?”

“원래는 보스 곁에서 어느 정도 일을 하다가 제가 자립한 뒤에 직접 운용해 볼 생각이었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곁에서 지켜보니 도저히 배운다고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군요. 십 년을 보스 옆에 있어도 보스처럼은 할 수 없을 거예요.”

요안나의 말에, 유진은 어쩐지 자신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영영 어려울 거 같아요.”

유진의 투자는 솔직히 말해 어떤 뛰어난 지성이나 통찰력으로 이루어지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치트키에 가깝다.

그걸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좌절감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요안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언제고 독립하겠다고 하면 난 기쁘게 축하해 줄 생각이고.”

조금 미안해진 유진이 말했다.

“독립은…… 지금으로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보스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요안나는 아직 젊잖아.”

“여하튼 그때 말씀하신 것 말이에요. 여전히 유효한가요?”

“물론이야. 1억 달러 단위로 최대 10억 달러까지는 맡아 줄 수 있어.”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덜란드 왕실 자금 10억 달러를 운용해 주실 것을 정식으로 요청드려요. 왕실 자금의 운용 대행인으로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요안나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요안나에게 그 역할을 맡기신 거야?”

“네. 물론 전부는 아니에요. 대부분은 네덜란드 국내 기업에 투자되어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죠. 10억 달러는 그런 자금을 뺀 가용 자금 전부에 가까워요.”

“조건은 알고 있지?”

“운용 이익의 30%가 운용 수수료이고, 손해가 발생할 경우 책임지지 않는다는 거죠? 자금의 출납은 6개월 전에 통보해야 하고, 이익이 발생해 운용 자금 총액이 10억 달러를 넘어가는 경우 무조건 지정한 계좌로 송금한다.”

요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나머지는 요안나가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외부 자금은 미스터 트럼프의 5억 달러, 영국 왕실의 3억 달러, 그리고 네덜란드 왕실의 10억 달러. 총 18억 달러로군요.”

“다른 사람의 돈을 굴리는 건 귀찮은데 말이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부 속셈이 있는 거잖아요. 이걸로 끝이 아닌 거죠?”

요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속셈이라…….”

“보스는 트럼프 씨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 왕실의 자금, 아마도 또 다른 왕실이나 국가 지도자들의 자금을 맡아 줄 생각이겠죠? 당연히 그런 곳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보스의 호의에 보답할 수밖에 없구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시고 있는 건가요?”

“호의까지 기대하지는 않아.”

유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다른 누군가의 호의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도 없는 거니까. 그저 방해만 받지 않으면 돼.”

유진의 부는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의 재산보다 많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의 정치적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를 쌓은 지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부지런히 인맥을 쌓고 있지만, 아직 그가 지닌 부에 비한다면 정치적인 기반은 사상누각에 가깝다.

권력과 부는 사실 좀처럼 떼어 내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를 노리고 권력의 힘을 투사하려 한다면 꽤 피곤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유진이 고국이 아닌 미국에 자신의 기반을 만들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정치 권력이 부당하게 금융 권력을 억누를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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