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쁜 사람
미국에서는 기업인들이 특정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대통령을 향해 비난의 발언을 내뱉는 일이 금기는 아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을 밝힐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받는다.
한국이나 여타 다른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의 말대로 유진은 각국의 국왕들이나 국가 지도자들과 약간의 친분 관계를 맺을 생각이다.
그들의 재산을 조금 늘려 주는 대가로 그들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단순히 지도자들과의 친분만을 쌓을 생각은 아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대통령뿐 아니라 다른 정치 세력들과의 인연 또한 맺어 둘 생각이다.
주말이 되자 유진은 사라와 함께 뉴욕주의 연방 상원의원이며 민주당 정책위원인 엘리자베스 슐츠의 후원 행사에 참여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슐츠가 직접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이미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의 셀러브리티가 된 유진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슐츠 여사님의 초청을 거부할 수는 없지요. 멋진 행사로군요.”
롱아일랜드의 호화스러운 저택에서 벌어지는 후원 행사는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로 가득했다.
모두가 뉴욕주의 상원의원을 위해 후원 파티 입장권으로 수백 달러를 가볍게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저를 아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릴 뿐이죠.”
잠시 서로 간에 가벼운 찬사와 잡담이 오고 갔다.
물론 이 자리의 주연인 상원의원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슬슬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다시 떠나야 했다.
“슐츠 여사께 작은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군요.”
유진은 가지고 간 카드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게 뭔가요?”
엘리자베스 슐츠가 미소지으며 카드를 받아 펼쳐 본다.
그곳에는 웹사이트의 주소와 접속 방법 따위가 적혀 있었다.
“제 동생이 이번에 작은 사업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암호화폐 거래소라는 것인데, 기념품으로 몇몇 분들께 암호화폐를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단, 사용은 지금부터 2년 뒤에나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업이군요. 감사히 받겠어요.”
사실 그다지 감흥을 받지 않았지만, 정치판에서 오래 구른 사람답게 슐츠는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암호화폐라고 해도 가격이 존재하는데, 오늘 시가로 100달러가 넘지 않습니다.”
미국의 상원의원들은 자체적으로 개인으로부터 받는 선물의 한도를 100달러로 정해 두었다.
“크게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기념품 정도로 생각해 주십시오.”
“2년 뒤라는 말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념품이니 잘 보관할게요.”
슐츠는 아직 자신이 받은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2년 뒤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참! 보좌관을 통해 영수증을 보내드릴게요.”
서로를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다.
슐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갔다.
유진은 자신의 동생과 요안나 등의 이름으로 정계에 유력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선물을 발송하고 있었다.
현재의 가치로는 100달러 미만, 그리고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시점에서는 적어도 20만 달러에 달하는 선물이 될 것이다.
그때 즈음이면 유진의 자산은 이미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유진에게 그러한 선물을 받은 인사들은 유진의 선물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다양한 로비스트와 후원자들로부터 다양한 수단으로 후원을 받고 있지만, 의외로 한 명에게서 받는 액수는 그리 크지 않다.
보통은 수천 달러가 한도이며, 특정 단체의 회원들 다수로부터 만 달러 이상의 후원을 받게 되면 상당한 부담이 된다.
엘리자베스 슐츠의 경우 뉴욕시의 검사장으로 있으면서 카톨릭 단체로부터 50,000달러 상당의 후원을 받은 사실만으로 상당한 화제가 됐을 정도였다.
그 정도의 후원을 받는다면 당연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편의를 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 불문율과도 같았다.
유진은 한참 뒤를 보고 그렇게 작은 선물을 남발하고 있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지금의 작은 호의는 생각보다 큰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정치인 후원 파티는 그다지 재미가 없네요. 너무 심심하군요.”
사라가 살짝 투덜댔다.
“영국에서 많이 가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싫어요. 사람들이 전부 가식적인 얼굴들을 하고 있어요. 여기나 영국이나 똑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가식적인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역시 어려서부터 이런 자리가 익숙한 모양이다.
“그럼 자리를 떠날까요?”
“그래요. 어디 편한 곳에 가서 편하게 취하고 싶어요.”
“그럼 플라자로 가지요.”
“그럴까요?”
두 사람은 금세 협의했다.
슬며시 파티장을 빠져나온 둘은 차를 몰아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센트럴파크 남쪽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에 투숙한 두 사람은 가볍게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로맨틱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쩐지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유진은 여가가 생길 때마다 사라와 시간을 보냈다.
“어제 일이 뉴스에 나왔어요.”
모니카가 플라자 호텔을 나서는 유진과 사라의 다정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플라자 호텔 앞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진을 치고 있던 파파라치가 한 건 올린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사진이 잘 받았어요.”
모니카가 신경을 쓴 것은 그런 것이다.
호텔을 나서기 전 이미 파파라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플래시가 터질 때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고, 유진도 사라도 적절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에 찍힐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이며 좋은 친구라고 언급했어요.”
“그 정도면 됐어.”
굳이 연인 사이임을 긍정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사진에 나온 것만으로도 유진과 사라가 꽤 다정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좋은 친구 사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사라와 유진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사라는 부친에게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었고, 유진은 사라의 연인인 진아 민과의 만남을 약속받았다.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스캔들은 덤이다.
모니카가 보여 주는 기사는 유진에게도 사라에게도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여배우나 여가수가 연애를 한다는 것이 인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언론에 한 번이라도 더 오르내릴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동양에서 온 행운아로 널리 알려져 온 유진 또한 사라와의 스캔들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출신의 미녀 여배우와의 스캔들은 대중에게 아직은 낯선 동양에서 온 행운아를 조금은 더 친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플라자 호텔 인수 건은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니카가 물러나자 데이비드가 다가와 보고했다.
“수브라타 로이가 궁지에 몰려 있으니 그쪽에서 오히려 매각할 수 있게 돼서 반기고 있습니다.”
플라자 호텔은 유진이 처음 뉴욕으로 와 머물렀던 팰리스 호텔, 그리고 다산 자동차의 호의로 머물렀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과 더불어 뉴욕을 상징하는 호텔 중 하나이다.
지난 1985년에는 막대한 무역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선진국의 재무장관들을 불러 공개하지 못할 협박으로 달러의 환율을 낮추고, 반대로 다른 선진국 화폐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합의를 결정한 곳이 바로 이 플라자 호텔이었다.
플라자 호텔에서 진행되었기에 후일 플라자 합의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일본은 엄청난 경제적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뉴욕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이 호텔은 지금 인도계 대기업인 사하라 그룹에 넘어가 있다.
하지만 사하라 그룹은 지금 회장인 수브라타 로이가 인도 정부에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3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채무 상환을 명령받으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느 개발도상국처럼 온갖 비리로 점철된 인도 재계의 거물인 수브라타 로이는 혐의에서 벗어나고, 감옥에서 풀려나오기 위해 막대한 현금이 필요한 상태였다.
마침 유진은 슬슬 트럼프 타워를 떠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센트럴파크 남쪽에 마련한 두 회사 사이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플라자 호텔을 구입한 뒤, 가장 위층의 펜트하우스를 자신의 저택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지금 머물고 있는 트럼프 타워는 꽤 훌륭한 집이기는 하지만, 수행 인원이 늘면서 점차 좁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플라자 호텔은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뉴욕에 들를 때 머무르는 고급 호텔 중 하나였으니, 유진이 플라자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편하게 그들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10억 달러를 부르고 있습니다만, 7억 내외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시간에 쫒기고 있으면 서두를 것은 없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인도의 교도소 사정이 그리 쾌적하지는 않은 모양이더군요.”
데이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인수 합병의 전문가인 데이비드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훌륭한 사냥꾼이다.
“그러면 적당한 가격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볼까?”
돈이야 충분히 넘쳐나지만, 굳이 비싸게 구입할 필요는 없다.
“아마 내년 초까지 기다리면 원하는 가격까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호텔 운영팀을 구성할 수 있겠어?”
지난번에는 트럼프와 합작으로 몬테카를로 호텔을 구입했다.
이번에 플라자 호텔을 손에 넣고, 다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도 한두 개씩의 호텔을 매수할 생각이다.
모두 유진 자신이 편하게 움직이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게 되면 나름 호텔 사업에도 진출하게 되는 셈이다.
수익을 목적으로 한 사업은 아니지만, 기왕 시작하는 거 제대로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플라자 호텔 매입 전까지는 해결하겠습니다.”
“그래. 이번 주말에는 캘리포니아로 갈 예정이야. 시간 확인 좀 해 줘.”
다시 모니카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라에게 받기로 한 가장 중요한 것을 받아 낼 차례이다.
할리우드에서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패서디나에서도 북쪽으로 15분 정도를 더 가야 하는 한적한 동네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였다.
“지나가 나쁜 애는 아니에요.”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러 가는 동안, 사라는 평소와 달리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때로 조금 공격적일 때도 있으니…….”
유진과 지나의 만남이 불편한 탓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원래 천재들은 괴팍한 면이 있잖아요?”
“천재라…… 천재 맞지요. 지나는. 그런데 유진도 일종의 천재 아닌가요? 투자의 천재?”
“그렇게까지 보아 주면 고맙지요.”
“그런 것치고는 괴팍하지 않아요. 휴우…….”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왔어요. 저기 보이는 건물이에요.”
사라가 저소득 지역의 한구석에 서 있는 휑한 창고 건물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크군요.”
유진은 인류의 미래가 걸린 연구를 진행 중인 장소를 보며 감회를 말했다.
“사용하지 않는 창고라서 싸게 빌렸어요. 그래도 한 달에 4,000달러나 나가요.”
사라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여전히 정신이 어지러운 모양이다.
“나쁜 사람.”
사라의 연인인 진아는 유진을 보자마자 한 마디 던졌다.
“지나…….”
사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뉴스에서 본 거는 사실이 아냐.”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과 유진 사이를 해명하려 했다.
벌써 며칠째 미디어에는 동양의 부호와 영국 출신 여배우의 애정 행각에 관한 기사가 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 트럼프랑 친구야. 트럼프처럼 나쁜 사람과 친구라면 똑같은 종류가 틀림없어.”
지나의 말에 사라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당혹감이 서렸다.
“이 나라, 지구의 환경을 망칠 주범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