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몽상가
지나 민. 한국명은 민진아는 한국계 2세로, 평범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하지 않은 여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고, 평범한 사람들이 대학에 입학할 나이에 이미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누구라도 그녀를 천재라 부르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MIT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칼텍에서 미생물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나는 학위를 받자마자 칼텍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교단에 서는 대신 일생일대의 모험을 결심했다.
바로 스스로의 사업을 일구기로 한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는 칼텍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패서디나의 한 창고에서 몇 년째 두문불출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다고 했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본가야.”
유진은 그녀에게 어떤 제안을 하기도 전에 벌써 진아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연인과의 스캔들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아닐 거야.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자들이 잔뜩 있으니까. 자본가도 맞지만 사악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유진이 가볍게 항변을 해 본다.
“트럼프와 친구잖아? 트럼프가 기후 협약에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지? 트럼프는 이 나라와 지구를 망칠 인간이야.”
그녀의 태도가 딱히 엄청나게 과격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지성인 상당수는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반지성주의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온난화에 대한 부정 등이 그러한 반감의 주요 원인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 자신의 말처럼 미국의 기후 정책을 2000년 이전으로 돌려 버리고 만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트럼프에게 돌릴 수는 없다.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현상에 불과했으니까.
미국인들은 지구온난화를 환영한다.
미국인들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공화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그렇다.
조지 부시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구온난화는 미국에 도움이 된다는 캠페인을 펼쳤고, 미국인들은 그를 지지했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트럼프는 파리 협정을 탈퇴했다.
수많은 과학자와 지성인들이 그 결정에 반대했지만, 절반 가까운 미국인들은 그의 판단을 환영했다.
심지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기업들조차 그 결정에 반대했다. 트럼프 시대에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 후일 훨씬 더 커다란 규제로 돌아올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는 다양한 산업 기술의 발전은 곧 새로운 사업 무대의 탄생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기업인들로서는 그런 새로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의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통해 자신들의 무지를 마음껏 표출하기를 원했다.
“지나야, 유진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트럼프와는 그냥 사업상의 친분이 있을 뿐이고.”
“그게 문제야. 저 남자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는 더욱 지구를 망치고 말 거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유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나라는 똥멍청이들로 가득하니까.”
지나는 반지성주의자들의 위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마음에 드는군.”
유진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확실히 똑똑한 여자다.
“확실히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은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들게 틀림없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거야.”
“내 연구를 망치려는 거지?”
지나는 유진을 지구온난화를 막는 것을 망치려는 악마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유진은 지나에게 투자를 하려 온 거야.”
사라가 다시 한번 유진을 위해 항변했다.
“투자라고?”
“지금 하는 연구가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니까.”
지나는 미생물을 활용해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실제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재난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와 기업들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수단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도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수단은 충분히 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공장을 잔뜩 만들어 놓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해결이 가능하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지구 곳곳에 수만 개에 달하는 포집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그걸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를 논의하기 시작하면, 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유진은 지나의 연구에 거액을 투자하기로 약속했어. 네게 필요한 자금은 얼마라도 내놓겠다고. 우리한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잖아.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사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 돼.”
하지만 지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안 돼. 저 사람의 투자는 받을 수 없어. 내 연구는 세상을 살리기 위한 거야. 하지만 저 사람의 목적은 나랑 달라. 내 연구로 돈을 벌 생각이야.”
맞는 말이다. 유진은 지나의 연구로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다.
“늘 말했지? 내 연구는 세상 모두를 위해 공개되야 한다고.”
지나가 항변하듯 말했다.
그리고 유진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을 잘 알고 있다.
트럼프의 시대가 끝나고, 몇 년 뒤 지나는 자신의 연구를 완성시킨다.
미생물을 사용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수소를 생산하는 그녀의 기술은 그때까지 나온 어떤 탄소 포집 기술보다 경제성이 높았다.
물속에 사는 미생물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물을 분해해서 수소를 생산하고, 포집한 이산화탄소는 점성이 강한 고분자 화합물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만들어진 수소는 청정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고, 부산물인 고분자 화합물은 시멘트로 사용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으로, 1톤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데 겨우 수십 달러밖에는 들지 않았다.
여기에 생산되는 부산물의 가치까지 생각하면 사업성이 높으면서도 지구의 온난화 방지라는 대의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부가가치를 내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지나는 이 혁신적인 연구의 결과를 세상에 무료로 공개한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몇몇 기업인들의 배를 불리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성명과 함께.
“연구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큰돈이 필요한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그 결과에 대한 이익을 모두 포기하고 인류를 위해 공개하겠다는 거지?”
“그래. 내 연구는 몇몇 기업을 위한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어. 미국의 기업이 그걸 사유화하면 결국 가난한 나라들은 온난화에 대한 책임은 없으면서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억울한 대가만 지불하게 될 거야.”
지나가 단순한 아집만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욕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멋진 꿈이야. 그렇게만 될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지나의 연구가 결실을 보아 무료로 공개된다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흘러가지만은 않을 거야. 몇몇 선진국의 기업들이 네 연구 결과를 이용해 새로운 특허를 출원하고, 가장 경제적인 방법들을 사유화할 거야.”
“뭐라고?”
“미생물을 생산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걸 대량생산하고 다시 사업적인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지. 그런 자본과 기술을 갖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거든. 결국은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중국의 몇몇 기업들이 독점하게 될 거야.”
유진은 지나의 연구 결과가 그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은 몇몇 기업과 국가의 배만 불려 주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지나의 연구는 지구를 온난화에서 정상으로 돌리는 것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자신의 기술이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주지는 못했다.
그녀의 연구는 틀림없이 온난화를 막기에 너무나도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바로 그 사실이 문제였다.
이산화탄소의 포집으로 각국 정부로부터 거액의 지원금을 받고, 청정 연료인 수소를 대량으로 생산하며, 부산물로는 시멘트를 대체할 원료를 만들어 낸다.
이런 멋진 사업에 탐을 내지 않을 기업이 어디에 있을까?
몇몇 기업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고, 그녀의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나오고 특허가 제출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유진의 말처럼 몇몇 선진국의 기업들이 산업을 장악한다.
유진 또한 미국의 기업에서 일하며 그런 플랜트 공장 건설에 참여해 보았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잘 알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기업들이 선점했고,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의 몇몇 기업들이,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가장 빠르게 움직인다.
플랜트를 지어 주는 대가로 개발도상국은 막대한 대가를 그런 선진국에 지불해야 했다.
진아의 말처럼 온난화를 가속시킨 것은 선진국이고, 개발도상국들은 온난화의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일 당신이 미생물뿐 아니라 모든 생산과 관련된 특허까지 장악할 수 있다면, 그땐 그 혜택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거야.”
유진의 말에 지나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지나는 미생물과 생명공학의 전문가이지, 플랜트 설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자신의 연구를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기술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한참 동안 지나는 묵묵히 유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눈에서 지나 자신도 유진이 말한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다. 그게 바로 몽상가다.
그들은 사적인 이익보다 세상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몽상가들이 때로는 정말로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는 성공한 몽상가가 될 것이다.
“그래도 안 돼. 당신 말은 결국 그 모든 이익을 당신의 손에 넣겠다는 말이잖아?”
지나는 몽상가이지만, 자신의 연구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가지고 올지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고 대체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술을 통해 이룰 수 있는 부를.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몇몇에만 이익이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맞는 말이야. 난 지나의 연구를 통해 얻는 이익을 내가 차지하고 싶어.”
유진은 총명한 지나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연구자의 지분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지. 연구에 대한 자금을 대고, 당신의 지분을 인정할게. 사라와 지나 당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만들어,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의 일정 부분을 적립할게. 아마 적은 돈은 아닐 거야. 어쩌면 빌 게이츠 재단 이상의 자금이 모이겠지. 그걸로 당신이 원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업이 진행되면,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동등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약속하지.”
“유진은 자본가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을 사람은 아니야.”
사라가 다시 지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지나는 여전히 유진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잠시 시간을 줘요.”
사라가 유진에게 눈짓했다.
“그렇게 하지.”
유진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사라의 역할이다. 유진이 사라를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여자이지만, 오직 사라의 말은 듣는다고 알고 있었다.
혼자가 된 유진은 거대한 창고 안에 마련된 조잡한 실험 시설들을 멀찌감치서 구경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사라가 다시 유진을 불렀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두 여자가 유진을 기다리고 있다.
유진은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짐작이 갔다.
“정말로 우리 아빠랑 엄마를 설득해 준다는 거지?”
지나가 여전히 삐딱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 두 분을 설득해서 지나와 사라의 결혼식을 성사시켜 줄게. 물론 두 분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게 만들고.”
유진이 내건 조건이 그것이다.
이제는 미국인이 되었다고는 해도, 지나의 부모는 여전히 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총명한 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지나였지만, 그녀 또한 한국인의 피를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에게 축복받는 결혼을 원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사라와 결혼을 감행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물론 약간의 시간은 필요해. 하지만 당장 두 분께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안락한 생활은 보장하지.”
“만약에 거짓말이면 죽는다.”
지나가 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이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유진은 결국 사라와 지나가 결혼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지나는 모르지만,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아니. 사실 있기는 하지만, 지나의 부모는 아니었다.
지나가 성공적인 연구를 마치고 세상 사람들의 감사를 받으며, 사라가 배우로서 훌륭한 커리어를 이루어 내었을 때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몇 년 사이 소수자의 결혼에 대한 미국 내의 분위기도 크게 달라진다.
게다가 유진이 그렇게까지 자신할 만한 배경은 또 있다.
“지나 부모님이 유진을 굉장히 좋아해요. 미국에 온 한국인들의 희망이라고 하더군요.”
사라가 넌지시 건네준 말이다.
하기는 요즘 미주 한인 중에 유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진의 이름이 한 번 거론될 때마다, 미주 한인들의 위상이 높아진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진은 벌써 백만에 달하는 절대적인 팬덤을 가진 셈이다.
지나의 부모님 또한 그중 하나였고.
“그럼 협상은 타결된 건가?”
“사라와 내 재단…… 그것도 확실하게 해. 그리고 지금까지 한 약속들 전부 지켜.”
“물론이지.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계약은 파기되는 걸로 하면 되겠지?”
유진은 이미 지나가 완전히 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지나의 부모를 만나 사인이라도 해 주는 정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