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집안싸움
“서성도 서성인데 명성까지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요. 지금 상황이 명성이랑 전쟁을 벌일 때도 아니고요.”
“명성도 명성이지. 우리 상황을 뻔히 알면서 하필이면 이럴 때에…….”
명성 건은 다른 건보다 훨씬 더 골치 아팠다. 서성은행이야 거래를 끊는 것으로 어떻게든 보복을 할 수 있었지만, 명성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정석대로라면 대양 그룹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강유진과 협력하는 기업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 하는데, 비슷한 체급의 명성이라면 쉽게 보복을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유진이라는 벅찬 적이 있는데, 하물며 명성까지 진짜 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서 발을 뺄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냥 둘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장남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빼서 불을 붙였다.
그의 얼굴에 초조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단지 명성과 서성은행 때문이 아니다.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강유진의 그림자가 버겁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강유진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액수의 자산도 문제이지만, 그가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매일같이 유진의 이야기가 뉴스를 장식한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스타들과 파티를 즐기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집과 비행기에 1조 원을 썼다고 하지를 않나,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만나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뿌듯해할 만한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터져 나온다.
그럴 때마다 항상 기사에는 대양에 관한 이야기가 슬쩍 달렸다.
이제 사람들은 강유진의 기사가 나오면 으레 대양그룹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대양 그룹이 그동안 저지른 많은 비열한 행동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강유진의 파혼 소송으로 대양 그룹의 악덕이 모두 밝혀진 이후 그동안의 자세한 내막이 뉴스를 통해 수도 없이 까발려졌다.
지금에 와서는 이 나라 국민치고 대양의 행동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유진의 기사가 뉴스에 오를 때마다 대양의 이미지는 한 발 한 발 나락으로 떨어진다.
뉴스에 달린 댓글에는 대양 그룹을 성토하는 욕설투성이였다.
대양 그룹 홍보실에서 어떻게든 이미지의 반전을 노려보고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상대방의 홍보팀이 잘한다기보다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느낌이다.
대양 홍보실의 사주를 받은 여론조작 팀이 아니고서야 대양 그룹 편을 들어주는 이가 드물다.
대양 그룹 임직원들에게도 뉴스에 유진을 비난하고 그룹을 지지하는 댓글을 달라고 독려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도저히 대양을 지지할 수 있는 논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회장의 막내아들은 미국에서 여자를 폭행해 송사에 휘말렸고, 손자 하나는 성폭행과 산업스파이 혐의로 법정 분쟁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몇 달이 지났지만, 유진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항상 그 두 사람이 벌인 짓거리가 다시 소환된다.
“IMF 때보다 더 힘들어.”
대양자동차 사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양중공업 류근수 사장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속이 타서 어쩔 수가 없다.
그룹이 망할 것 같았던 IMF도 무사히 넘기고, 그 와중에 쓰러져 버린 다른 그룹들의 주력 기업들을 삼키며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몸집을 불렸던 대양이지만, 이번 사태는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였지만, 부친과 함께 IMF라는 파고를 넘으며 수많은 역경을 극복했던 형제들도 유진과의 전쟁에는 막막함을 느껴야 했다.
“이번에는 정부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말이지.”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은 사실 정부의 보호 아래 커 왔다고 할 수 있다. 공기업을 저렴한 가격에 불하받고, 산업에 위기가 오면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는다.
대기업들이 정치권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상 그러한 혜택들을 받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많이 달랐다.
강유진이라는 개인과의 갈등에 공적자금을 받을 정당성도,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먼저 잘못을 한쪽은 대양 그룹이다. 적어도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뭔가 수를 내야 하는데 말이지…….”
“오 실장이 그 녀석 주변을 파 보고 있다고 하던데, 쉽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회장의 비서실장은 상당한 수완가로 알려져 있다.
“주변이라…… 그게 확실히 제일 좋은 방법이기는 한데.”
정공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미국 쪽과 한국 양쪽 직원들을 모두 뒤져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미국 쪽도?”
“네. 마침 성규가 미국에 있을 때 그쪽으로 연줄을 쌓아 둔 게 있어서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뭐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성규는 조용히 지내고 있나 보더군.”
“네. 당분간은 그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반대 증거도 충분히 있는 모양입니다.”
류근수 사장은 자신의 아픈 손가락인 성규의 문제 해결에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어디서 완전히 정신 나간 여자 하나가 꼬여 가지고. 쯧!”
대양자동차 사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의 약혼녀가 터트린 일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휴우……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미친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류근수가 얼굴을 붉어지며 말했다.
성규가 성폭행으로 처벌을 받는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요즘 아버지가 기력이 많이 약해진 게 눈에 띄게 보인단 말이야.”
“걱정입니다. 아직 지분 정리도 안 됐는데 말이죠.”
형제의 대화는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에게는 강유진이라는 외부의 적도 큰 문제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대체 그 여자한테 얼마나 넘겨 준 건지 알 수 없으니 말이야.”
부친인 류 회장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형제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부친이 쥐고 있는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의 향방이었다.
대양 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회장의 손에 달려 있다.
세 형제가 지닌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은 모두 합해 대략 15% 내외, 그리고 부친인 회장이 15%를 갖고 있다.
거기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모펀드 등을 통해 다시 15% 내외가 감춰져 있다.
형제들은 부친이 죽을 때까지 자기가 쥐고 있는 그 15%의 지분과 사모펀드를 통해 행사하는 나머지 15%의 지분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형제가 우려하는 것은 혹시라도 부친이 사망했을 때, 부친의 후처에게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이 얼마나 돌아가느냐였다.
“아무래도 근석이한테는 그다지 크게 줄 거 같지 않아.”
후처 소생인 4남 근석은 미국에서 거하게 사고를 친 뒤로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게 은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다른 형제들은 사실 이 사건을 무척이나 반겼다.
“그 여자가 제일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점점 쇠약해져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면, 그 여자가 마음대로 할 텐데 말이죠.”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오면 마음이 약해져서 아내에게 지분을 덜컥 넘겨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두 형제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거야말로 두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또한 두 형제에게는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근일이 이 자식, 요즘 하는 행태가 이상해.”
대양자동차 사장은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은 둘째에 대해 언급했다.
“전에 없이 그 여자한테 사근거리고, 둘이 자주 붙어 다니는 거 같아.”
“아무래도 그 여자를 포섭하려는 모양입니다. 둘이 한 패가 되면 아주 골치 아파지는데 말이죠.”
“당장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말이야.”
“둘째 형도 어지간해요.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데요.”
“그녀석 원래부터 그랬어. 한 번 혼쭐을 내줘야 하는데.”
두 사람이 모인 것은 사실은 이 때문이다. 부친의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는 가운데, 만일 둘째가 계모와 연합을 펼치게 되면 대권이 넘어가게 생겼다.
장남과 셋째가 각기 자동차와 중공업의 사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대권이 넘어가면 둘 다 빼앗길 것은 눈에 보듯 훤한 일이다.
그리고 나서는 기껏해야 실속 없는 계열사 한두 개를 손에 쥐는 것이 끝일 것이다.
“김 서방과 오 서방은 대충 이야기가 되고 있어.”
대양자동차 사장은 누이들의 남편을 포섭하고 있었다.
“에너지와 건설 쪽 사장들도 대충 우리 손을 들어 줄 것 같습니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이 결정적이지만, 만일 비슷한 지분을 물려받는다면 그룹의 다른 계열사 사장들도 대권에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형제들은 지금 부지런히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앞으로 2, 3년 후에나 벌어졌을 일들이다.
하지만 유진의 등장으로 대양 그룹 회장의 노기가 그의 건강을 좀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형제들은 외부의 적인 유진과의 싸움은 제쳐 두고 집안싸움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프리스케일이 그렇게 된 게 다행인지도 몰라.”
대양자동차 사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프리스케일 인수는 대양전자에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크게 보면 대양자동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자동차 사장은 형제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조만간 중국 쪽에서 철수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디스플레이 공장을 그쪽에 지은 게 실수였습니다. 아마 그걸로 전자 내부에서 피바람이 한바탕 불 것 같습니다.”
류근수 사장도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형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많은 공작을 펼치고 있었고, 그중에는 대양전자 이사진의 포섭도 들어 있다.
둘째 류근일이 전자의 사장에 오른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사 전원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첫째와 둘째는 전자에 불어 올 거친 바람을 이용해, 전자 사장의 심복을 하나라도 더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모레 회의에서 김 서방이 전자에 대해 한 마디 할 거야. 올해 실적이 최악이야. 국내도 그렇고 미국 시장도 그렇고 말이야.”
유진의 인기가 높아지는 여파로 대양 그룹 이미지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전자가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두 형제는 그런 면에서는 내심 유진의 존재가 반가웠다.
원인이 외부에 있어도, 실적의 책임은 사장에게 돌아간다.
한동안 두 형제는 아주 은밀하고 음흉한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둘째의 대권 장악을 막아야 했다.
“전 크게 원하는 거 없습니다. 중공업과 에너지만 독립시켜 주십시오.”
류근수가 다시 한번 자신의 조건을 확인한다.
“그 정도로는 안 되지. 3대 2. 그래도 내가 큰형이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하하.”
대양자동차 사장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대권을 손에 넣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분쟁이 시작될 것이다.
두 형제 모두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겉으로라도 협력을 해야 할 때였다.
물론 두 사람은 내부의 커다란 지뢰는 따로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대양 그룹 회장 부인이 뉴욕에 방문했습니다.”
대양 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을 감시하고 있던 탐정에게 연락이 왔다.
몇 달 전에 사고를 치고,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막내아들은 소송이 끝나자 다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언제라도 또 문제를 일으키리라 생각한 유진은 브롱크스의 탐정 사무실에 항상 감시할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엔 탐정 사무실에서 유진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했다.
“플라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쪽은 저희가 감시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도 최고급 호텔이다. 그런 곳을 감시하는 것은 탐정 사무소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건은 우리 쪽에서 해결하지요.”
마침 플라자 호텔 인수가 거의 끝난 시점이다.
계약서에 사인은 끝났고, 아직 외부에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플라자 호텔은 유진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셈이다.
유진은 데이비드에게 연락해서 프레지던트 스위트에 새로 묵게 된 손님에 주의를 기울이라 지시를 내렸다.
딱히 대단한 정보를 얻어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손님을 모르는 체할 생각도 없었다.
“데미언 샤젤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유진이 올해 투자한 영화 중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뭐라고 하지?”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고 합니다. 보스 덕분에 쾌적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답니다.”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잘됐군. 편한 시간에 들러 달라고 해. 사인이라도 받게.”
“누가 누구의 사인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전할게요.”
“기왕이면 배우들하고 스태프들도 함께 부르지. 촬영이 끝났다니 모두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는 게 좋겠어.”
유진은 아예 하루를 비워 새 영화에 관련된 인사들만 부르는 파티를 계획했다.
“우리 스태프들을 위해 이런 멋진 파티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샤젤 감독은 유진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유진의 투자 덕분에 자신이 원하던 장면을 자금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의 예산은 3,000만 달러에 불과한 소규모 영화였다.
하지만 유진이 2,000만 달러를 더 지원했고, 마지막에 1,0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무려 두 배의 예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런 큰 금액을 투자하면서 단 한 번의 간섭도 없었다.
간섭은커녕 수표를 끊어 주면서 얼굴 한번 보자는 소리도 없었다. 전적으로 감독에 대한 신뢰만을 보냈을 뿐이다.
대학 시절부터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 샤젤 감독으로서는 유진이 은인과 같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천만에요. 전부터 샤젤 감독의 팬이었습니다. 이번 신작에도 아주 기대가 큽니다.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니 조금이나마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전작이라고 해 봐야 둘 뿐인데요.”
“전작이 대단히 감명 깊었습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신 클로버필드도 좋았구요. 이번에도 기대가 큽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데미안의 얼굴은 꽤 자신만만했다.
스태프들을 위해 준비한 파티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유진은 모두를 위해 최고의 음식과 술을 잔뜩 준비했다.
유진 또한 스태프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며 파티를 즐겼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남을 이어 가던 유진은 마침내 오늘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잠시 자리를 할 수 있었다.
“멋진 저택이네요. 그리고 오늘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스물두 살의 에밀리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싱그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