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구원
“영화 촬영은 즐거우셨나요?”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에밀리에게 물었다.
“네.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굉장히 보람 있는 시간이었어요. 샤젤 감독은 굉장한 사람이에요. 에너지가 넘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좀 많이 엄격하기는 하지만.”
“샤젤 감독의 이번 영화에는 기대가 아주 많아요.”
지금 사젤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유진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영화였다.
물론 아직도 유진은 그게 이 영화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 잠시라도 얼굴을 내비친 에밀리 때문인지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쨌든 영화 자체는 아주 훌륭할 것이 틀림없고, 에밀리가 나오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나도 기대가 커요. 제가 나오는 장면이 잘릴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요.”
에밀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잠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풀사이드를 걸었다.
30미터에 달하는 풀에는 파티에 초대된 젊은 남녀들이 뛰어들어 정신없이 즐기고 있었다.
한쪽에는 유명 DJ를 섭외해 신나는 음악으로 파티의 분위기를 북돋웠고, 다른 한쪽에는 다양한 주류를 구비해 둔 바가 있어 쉴새 없이 술을 공급하고 있다.
유진은 에밀리와 함께 번잡스러운 파티의 중심지를 지나 LA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정원 한쪽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랑 대화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걸까요?”
에밀리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서로가 통하는 게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찾아보면 공통점이 꽤 많을 거예요.”
“당신은 세계적인 부자이고, 난 그저 무명의 배우에 불과한데 공통점이 있을까요?”
에밀리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에밀리는 이 영화에서 그저 백여 명의 댄서 중 하나로 참여했을 뿐인 무명의 여배우이다.
영화에 얼굴이 딱 세 번 스쳐 가듯 나올 뿐이라 이 영화로 대단한 커리어도 쌓을 수 없고, 개런티라고 해 봐야 한 달 생활비도 나오지 않는다.
현재 에밀리의 직업은 무명 배우이자 카페테리아의 여급이다.
실제로는 카페테리아에서 일하며 언젠가는 제대로 된 배역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고 있는 지망생에 가깝다.
할리우드에는 그녀와 같이 꿈을 좇는 재능 있고 매력 있는 젊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번 공통점이 있나 알아볼까요?”
유진이 에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요? 어떤 거요?”
“난 스콧 피츠제랄드를 제일 좋아해요.”
그녀와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다.
“음. 난 윌리엄 포크너에요.”
“난 살사 소스를 잔뜩 얹은 타코로 점심을 즐기죠.”
“난 퀴즈노스의 토푸 샌드위치에요.”
“코카콜라.”
“미네랄 워터.”
“아델.”
“테일러 스위프트.”
“마론 파이브.”
“브루노 마스.”
여전한 그녀였다. 아니, 시간적으로는 6, 7년쯤 뒤의 일이니까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 하겠지만.
“뭐예요. 공통점 따위 하나도 없네요.”
에밀리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잘 어울린대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묘한 느낌을 받는다.
원래는 에밀리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말들을 서로 반대로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척이나 즐겁다.
* * *
에밀리와 만나게 되는 것은 그가 한국에서의 불행했던 결혼을 끝내고, 명성을 떠나 뉴욕에 도착한 뒤의 일이다.
그때의 유진은 계속되는 불행과 배신감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 칼과 같았다.
그나마 일을 할 때는 최대한 스스로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우울하기 그지없고 난폭하기까지 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에밀리를 만났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의 오랜 무명 배우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에 와 있었다.
한 시트콤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배역을 맡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큰 결심을 하고 날아왔다.
하지만 그 시트콤은 한 시즌 만에 캔슬되었고, 그녀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밀리도 어떻게 보면 그다지 행복할 시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LA를 떠나기 전 사귀던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면서 영 좋지 않게 끝나 버린 것을 생각하면 유진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진처럼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세상의 밝은 면을 찾으려 노력했다.
두 사람은 오프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에서 만났다. 무척이나 전위적인,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한 마이너 뮤지컬 공연이었다.
유진은 그저 귀를 찢을 것 같은 음악 속에 자신의 분노를 침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뮤지컬은 훌륭했고, 공연이 끝났을 때, 유진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멋진 공연이었지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유쾌하고, 심각하고.”
“에밀리예요.”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구원을 얻었다.
에밀리와 함께하며 유진의 지친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한국에서의 결혼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뒤, 유진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성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 건너와 유진은 다시 여러 사람을 만났고, 여러 번 사랑에 빠졌다.
그가 다시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에밀리가 미친 영향이 컸을 것이다.
지금도 유진은 에밀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여자에 대해 미움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에밀리는 유진에게 한 줄기 구원을 내려 주었다.
이제 유진은 그녀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받은 구원에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어째서 나한테 말을 걸었었지?”
언젠가 유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나랑 비슷한 사람 같았으니까요.”
“비슷하다고? 어디가?”
잔뜩 화가 나 있던 자신과 항상 명랑하기만 하던 에밀리가 대체 어디가 비슷했다는 걸까?
“우리 둘 다 이방인이잖아요.”
에밀리가 웃으며 말했다.
* * *
“하나도 비슷한 게 없잖아요.”
에밀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이방인이잖아요.”
유진이 대답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에밀리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 말투를 들으면 누구라도 알 거예요.”
에밀리는 영국식의 악센트를 조금도 고치지 않았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아요. 열심히 노력을 해 보는데도 말이지요.”
다른 나라 말이라면 몰라도, 영국식 악센트는 그다지 흠이 될 것이 없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는 누구라도 이방인이잖아요.”
유진이 덧붙였다.
“음, 그렇죠. 그럼 여기 있는 모두가 공통점이 있는 거겠네요.”
“할리우드 생활은 만족하고 있나요?”
“그럭저럭요.”
그렇게 말하는 에밀리의 얼굴에 살짝 불안감이 스쳐 갔다.
“사실은 이번에 영화 찍으면서 조금 겁이 났어요.”
“어떤 이유로요?”
“뭐랄까? 엠마가 맡은 역할 말이에요. 사실은 여기 있는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예요. 언젠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없어져요.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거죠. 극 중 엠마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 우리 중 그렇게 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나오기 힘들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꿈을 좇아 할리우드를 방황하는 거잖아요.”
“네. 그런 거죠.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영화가 나한테 맞는 것인지. 저 노래도 굉장히 잘하거든요. 춤도 잘 추고요.”
에밀리는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발을 놀렸다.
“영화가 아니라면 어떤 쪽인가요? 뮤지컬?”
“네. 이번에 그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연기도 좋지만, 노래도 좋고, 춤을 추는 것도 즐거워요.”
“에밀리 양이라면 뮤지컬도 잘 어울리겠네요.”
“고민이 많아요. 그쪽으로 도전해 봐도 될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뉴욕으로 가서 뮤지컬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은 아닐까? 하는 거죠.”
“혹시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약간의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어떤 도움이요?”
“린 마누엘 미란다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에요. 원한다면 오디션에 추천해 줄 정도는 되죠.”
유진은 언젠가 에밀리가 자신이 더 어렸을 때 뉴욕에 와서 뮤지컬에 한 번 도전해 봤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진 자신도 궁금했다. 확실히 에밀리는 영화보다는 뮤지컬이 잘 어울린다. 그녀의 폭발적인 성량도 좋았고, 그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아름답게 흔드는 모습도 좋았다.
“정말요?”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음. 뉴욕까지 가는 비행기 표와 당분간 머무를 여비도 함께 지원해 드리고 싶군요.”
“조건이 뭔가요? 물론 당신은 매력적인 남자이지만…… 뭔가 조건이 있는 거라면…….”
에밀리가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음흉한 생각 같은 것은 없어요. 절대로.”
“정말요? 이상한 요구 같은 거 없이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주 많은 행운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약간의 행운을 나눠 줄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 기회를 잡아 봐요. 그저 삶의 어느 순간에 찾아온 작은 행운이고, 기회라고 생각해요.”
“꼭 키다리 아저씨 같네요.”
에밀리가 살짝 안도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거 아주 좋군요. 키다리 아저씨라. 요즘도 그런 고전을 읽는 소녀가 있을 줄 몰랐군요.”
“요즘도 읽어요.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제가 제공하는 기회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기로 해 줘요.”
“알았어요. 그럼 당신의 그 호의 기쁘게 받을게요. 난 내게 찾아온 기회를 걷어찰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다행이군요. 내일 중으로 우리 스탭이 연락 드릴 겁니다. 그럼 뉴욕에서 멋진 시간 보내기를 기대할게요.”
유진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계속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그녀를 보내기 싫어질 거 같았다.
“근데…… 진짜로 이상해요.”
“제 호의가요?”
“아니요. 당신이 나 같은 여자에게 이상한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가 이렇게 금세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방금도 보았잖아요. 우리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데 말이에요.”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뭔가가 말이죠. 다음에 만나게 되면 다시 한번 고민해 보죠.”
“그렇게 해요. 정말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늘의 호의에 감사도 드려야겠고요.”
에밀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에밀리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끌려와 유진에게 안겼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마법처럼 서로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
잠시 뒤에 입을 뗀 에밀리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이러면…….”
“미안해요. 정말로 이런 걸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유진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녀에게는 정말 호의만 베풀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이건 사라한테도…….”
에밀리는 무척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유진과 사라 델비안은 공인된 사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유진이 알기로 에밀리는 결코 다른 여자의 남자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비밀인데요.”
유진이 에밀리의 귀에 속삭였다.
“사라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거짓말쟁이.”
당황하던 에밀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하튼 이건…… 사고라고 생각할게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밀리가 허겁지겁 말했다.
“네. 사고였죠.”
정말로 사고였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의 구원이었다.
“안 되겠어요. 나 가 볼게요.”
에밀리가 유진의 품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진짜로…….”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꾹 삼키고 뒷걸음쳤다.
“뉴욕에 가면 꼭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게요.”
유진이 멀어지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에밀리가 다시 웃음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유진은 그녀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파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귀여운 아가씨네요.”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런 거 같지?”
유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지나만 아니었다면…….”
사라가 말을 꺼내다가 말았다.
“다행이로군. 당신과 경쟁하지 않을 수 있어서.”
“농담이에요. 진짜. 절대 지나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사라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양 그룹 회장 부인에 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다음날 오전, 데이비드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이비드는 플라자 호텔에 탐정 사무소 조사원을 임시 직원으로 채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조사원이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청소원으로 드나들며 대양 그룹 회장 부인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 여자의 호텔 방에 회장의 사위가 자주 방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보고이다.
대양상사 미주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는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장모가 뉴욕에 방문했으니 사위가 찾아가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단지 그 장모와 사위의 나이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사위가 장모보다 세 살 정도 많은 정도인 게 특이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사위가 장모의 호텔 방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지 않다는 것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대양 그룹 회장 부인이 결혼 전에는 셋째 사위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던 유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데이비드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걸 알려 주려 전화했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