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일각수(Unicorn)
데이비드가 아주 재미있는 영상을 보내왔다.
영상은 호텔의 복도에서 시작된다.
조용한 복도에 갑자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잠시 뒤 호텔 방 문들이 열리며 사람들이 뛰어나온다.
화면이 돌아가고, 막 열리고 있는 문이 비춰진다.
삼십 대 즈음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동양 여자와 사십 대 즈음의 동양인 남자가 허겁지겁 방을 나서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고, 각기 옷가지와 가방 따위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옷차림이 꽤 눈에 띈다.
간신히 속옷만 걸치고, 나머지 옷가지를 주섬주섬 손에 쥐고 있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고, 여자는 한 손으로 남자의 허리를 껴안은 채였다.
누가 보아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방을 나선 그 두 남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호텔 직원이 나타나 방금 울린 화재 경보는 장치의 고장이었다며 사과를 하고, 투숙객들에게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자 두 남녀는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그걸 보고 나서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다가 데이비드에게 전화했다.
“이건 어떻게 찍은 거지? 설마 무슨 불법적인 행위가 있던 것은 아니지?”
유진은 늘 모든 직원에게 합법적인 테두리를 절대 넘지 말 것을 지시해 왔다.
사소한 탈법 행위야 쓸 만한 변호사만 고용하면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겠지만, 나중에라도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은 질색이다.
“물론 불법적인 행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고객 중 누군가가 실수로 비상벨을 눌렀고, 또 고객 중 누군가가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녹화를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뻔한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예를 들어 과욕을 부려 다른 사람의 방에 침입한다든지 하는 과격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스위트룸이 아닌 것 같던데?”
“네. 사위가 같은 호텔 아래층에 방을 하나 구해 놓고 먼저 들어간 뒤, 조금 뒤에 장모가 내려와 그리 들어가더군요. 그렇게 사흘 정도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대양 그룹 회장 부인의 미국 방문에는 몇 명이나 되는 수행원이 딸려 있었다. 당연히 수행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화재 경보가 울렸으면 투숙객들의 항의가 심했겠네?”
“호텔에서 쓸 수 있는 바우처를 지급하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숙박하는 룸에서 바우처만으로 하룻밤 묵는 게 가능할 정도로 제공했으니 딱히 불만은 없는 모양입니다.”
사소한 것까지 알아서 처리한 것이 마음에 든다. 바우처를 제공하며 비용이 나가기는 했지만, 얻어 낸 성과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데이비드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유진은 이 영상으로 과연 무얼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LA에 머무는 겨울 동안 다시 몇 명의 특별한 손님들이 방문했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몇몇 왕실 자산 관리인들과 노르웨이와 두바이의 국부 펀드에서 찾아왔다.
목적은 모두 동일했다. 유진이 운영하는 펀드에 자금을 투자하고 싶다는 것이다.
유진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부로 알려지며 얻은 명성 이상으로, 투자 계통에서 그가 쌓아 올린 명성은 확고한 것이었다.
윌리엄의 자산관리회사에 두 개의 국부 펀드에서 원하는 투자금을 받아 주었고, 스웨덴 왕실과 노르웨이 왕실의 자금은 요안나가 운영하는 펀드에 받아 주었다.
이로써 윌리엄의 자산관리회사에서 운용하는 외부 자금은 200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유진은 앞으로도 그런 대형 투자기관의 자금은 계속 받아들일 생각이다.
자산관리회사는 운용하는 기금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유진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유진을 포함해 투자자로 명성을 올린 스타급 투자자들이 외부 자금을 운용하는 데에는 사실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자신의 자금으로 선행 투자한 상품을 외부 자금으로 만든 투자기금에 떠넘기기 위한 것이다.
일종의 설거지라고 볼 수 있었다.
유진의 개인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회사는 내부적으로 다시 여러 개의 펀드로 나뉘어 있다.
1번 펀드는 유진 개인 자금, 2번 펀드는 유진과 A투자자의 자금, 3번 펀드는 유진과 B투자자의 자금…… 이런 식이다.
그리고 한 가지 종목이 정해지면 무조건 1번 펀드에서 먼저 투자를 선행한다.
1번 펀드가 투자를 마칠 때쯤이면 처음에 비해 이미 어느 정도 가격이 올라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다시 2번 펀드가 투자하고, 다시 그게 끝나면 3번 펀드가 투자한다.
그러니 후순위로 갈수록 수익은 낮아진다.
그렇게 요안나를 통해 운영하는 펀드의 투자가 끝나면 윌리엄에게 정보를 준다.
윌리엄은 다시 자산운용사에게 운영하는 기금을 선순위와 후순위로 나누어 투자에 들어간다.
그때쯤이면 이미 유진의 펀드는 슬슬 엑시트를 준비하고 있을 때이다.
윌리엄을 통해 운용하는 자금이 크면 클수록 유진의 개인 자금은 위험부담 없이 원하는 수익을 올리고 안전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후순위 투자자들은 돈을 내고 유진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게 된다면 불평을 할 수는 없다.
투자의 세계는 심오하면서도 심플하다. 내게 이득을 준다면 날 이용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유진이 운용할 자금은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이 투자할 곳은 아직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유진이 LA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뉴욕에서는 투자를 집행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력을 확충하느라 바빴다.
요안나의 사무실에도, 윌리엄의 사무실에도 매일 새로운 인원이 합류했다. 어느덧 1,000억 달러라는 거금을 굴리는 만큼, 필요한 인원도 투자은행 수준을 넘어선다.
당연히 아무렇게나 직원을 뽑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조직을 구축하는 과정이라 신입 사원을 뽑아 교육할 여유도 없었다.
당연히 외부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경력직만을 모집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유진의 명성 덕분에 JP모건, 뱅크 오브 아메리카, 골드만삭스 같은 정상급 투자은행의 엘리트들을 스카웃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두 오피스의 필요에 따른 인원 확충이지만, 몇몇 분야는 유진이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이다.
특히 최근 유진이 가장 공을 들인 분야는 VC였다.
지금까지는 주로 금융투자에 힘을 실어 왔지만, 운용자산이 커져 가면서 투자를 분산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투자 비용 대비 높은 수익을 올리려면 역시 태동하는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적격이다. 더군다나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VC팀은 크게 국내 팀과 유럽 팀, 그리고 아시아 팀으로 나누어 조직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팀은 아시아 지역을 맡게 될 팀이었다.
아시아 팀의 주축이 될 지미 탕은 중국계로, 빅4 벤처캐피털 중 하나인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앤 바이어스와 보스턴에서 설립되어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투자 펀드인 IDG캐피탈을 거쳐, 다시 세콰이어캐피탈에서 일하고 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원하는 아시아 지역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 유진은 직접 멘로파크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 쪽에는 훌륭한 스타트업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기업들에 꼭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과 보살핌을 주는 일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미만 승낙한다면 싱가폴에 본부를 세우고 제대로 된 VC를 만들 생각입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입니까?”
“적어도 100억 달러를 시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벤처캐피탈인 세콰이어캐피탈의 운용 자금이 그 정도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에서만요?”
“아시아 한정으로 100억 달러입니다.”
“VC의 공룡이 나타났군요. 어지간한 아시아계 유망 기업은 전부 망라할 수 있겠어요.”
이어서 유진은 지미에게 300만 달러에 성과급이 추가되는 제안을 했다.
평균적으로 VC 파트너들이 받을 수 있는 연봉의 열 배쯤 되는 금액이다.
지미 탕이 일반 파트너에 비해 월등한 경력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한 제안이었고, 또한 그가 충분히 구미가 당기게 할만한 액수였다.
“솔직히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관대하신 제안이군요.”
“최고의 자원이 필요하니까요.”
유진은 직원으로 영입할 사람이라 해도 필요하다면 추켜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세콰이어를 마지막으로 슬슬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이제 조금 쉬고 싶을 때도 되었으니까요.”
“이제 겨우 쉰을 넘어서지 않으신가요? 은퇴하시기에는 너무 아깝지요.”
지미는 이른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유진이 영입하려는 사람 중에는 가장 연장자이다.
그만큼 연륜이 있고, 그만큼 풍부한 인맥을 가진 사람이다.
지미에게 맡기려는 아시아 투자 분야는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나 바다 건너 유럽 투자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늘 투자 대상 기업이 속해 있는 국가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데다, 지미는 중국 현지에 아주 풍부한 꽌시(关系)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방면으로 확인해 보니 지미만한 사람이 없더군요. 꼭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사람을 보내셨어도 되는데. 직접 찾아오셔서 이런 제안까지 주시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겠군요.”
초대형 VC를 책임지게 된 것이 유효했는지, 아니면 거액의 연봉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둘 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지미는 당장 세콰이어캐피탈에 사표를 내고 자신의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벤처캐피털은 다른 투자금융 기업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 영업할 수 있다.
이제 곧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금융의 중심이 될 싱가폴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투자에 나서려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중국의 디디추싱(滴滴出行)과 바이트댄스(北京字节跳动科技有限公司) CATL(宁德时代新能源科技股份有限公司), 다장촹신(大疆創新). 네 개의 기업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그랩, 인도네시아의 고젝도 중요하고요.”
유진은 지미에게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다.
이중 디디추싱, 그랩, 고젝은 모두 우버와 같은 차량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각각의 지역에서 우버와 경쟁하며 세를 불려가고 있는데, 앞으로 1, 2년 뒤에는 우버가 중국에서는 디디추싱과 합병을 하고 동남아시에서는 그랩과 합병을 하며 철수하게 된다.
바이트댄스는 2년 뒤에 출시할 숏폼 동영상 기반 모바일 SNS 틱톡을 개발하게 될 업체이다.
틱톡은 몇 년 만에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바이트댄스를 유니콘 기업의 수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배터리 제조 회사인 CATL은 전기자동차 산업의 성장에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될 회사로, 몇 년 뒤에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DJI 브랜드로 이미 드론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다장촹신 역시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다.
첫 번째 리스트에 오른 회사들은 모두 몇 년 안에 각기 적어도 수백억 달러에서 수천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지니게 될 회사들이다.
그 외에도 중국에서는 틱톡의 경쟁자를 자처하는 콰이쇼우(快手) 테크놀로지, 자율주행 스타트업 쭝무커지(縱目科技), 인도네시아의 학습 기업 Byju's 등 아주 다양한 스타트업의 리스트가 지미에게 주어졌다.
유진의 요구는 단순했다. 최대한 많은 지분을 확보할 것.
어차피 몇 년 사이에 적어도 열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기업들이다. 투자 금액을 아끼기보다 조금이라도 많은 지분을 손에 넣는 쪽이 이득이다.
유진이 지미와 아시아 스타트업 투자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시간, 대륙 저편에서는 데이비드가 40대의 나이 치고는 꽤 젊어 보이는 말쑥한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대체 이걸로 원하는 게 뭡니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영상에서 눈을 돌리며 사내가 거칠게 물었다.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사내의 몸은 조금씩 떨려 오고 있었다.
“달리 원하는 것이 있어서 대웅 씨를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이 불미스러운 동영상이 손에 들어와 대웅 씨를 도와드리고자 하는 것뿐이지요.”
“도와준다고? 허!”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떨리고 있을 뿐이다.
완벽한 함정에 빠져 버렸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이다.
허대웅은 이미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