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선구안
“대체 원하는 게 뭐요?”
상처 입은 한 마리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사내가 물었다.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데이비드가 대답했다.
“이따위 비열한 짓을 해 놓고도 원하는 게 없다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허대웅 씨와 대양 그룹의 명예를 위해 이걸 수거해서 돌려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영상은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유일한 원본 영상입니다. 이걸 파기하면 모두 깨끗하게 끝납니다. 그냥 이걸 가지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내가 세 살 먹은 아이로 보이는 거요?”
“진심을 믿어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제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허대웅 씨께 약간의 호의를 보여 드리고, 또 약간의 호의을 얻을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이걸 가지고 돌아가셔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에 감사하며 편안한 잠자리에 드시면 됩니다.”
데이비드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위협도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를 의심하시는 것 같으니, 앞으로도 허대웅 씨께는 따로 연락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허대웅 씨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세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데이비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에게 그렇게 통보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비드가 방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방문을 바라보던 사내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양 그룹 회장의 사위인 허대웅은 대양 그룹의 가장 큰 적에게 자신의 인생이 덜미를 잡혀 버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동영상이 밖으로 유출되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단순히 대양 그룹에서 쫓겨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비참한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자 호텔의 한 방에서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가 절망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세 사람뿐이었다.
지미 탕이 주도하는 아시아 VC가 싱가폴에 설립되는 사이, 미주와 유럽의 스타트업에 투자할 두 개의 VC도 지미 탕에 못지않은 경력자들을 영입해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미주의 VC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테크 기업이 몰려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그리고 유럽의 VC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세율로 글로벌 기업들을 유혹하는 아일랜드에 설립했다.
이제 한국을 포함해 모두 네 개의 벤처캐피털이 각 지역의 스타트업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서 보고하면 유진은 그중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이름을 들어 본 회사를 찾아내어 투자를 지시하는 방식으로 업무가 돌아간다.
유진이라고 해서 세계 모든 유니콘 기업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아마 놓치는 대어들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지 않은 기회들을 손에 넣을 기회였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만한 투자 상품도 따로 없다.
유진은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같이 한 시대를 풍미할 거대 기업이 될 수 있는 몇 개의 기업들을 알고 있다.
또 야후나 AOL처럼 잠시나마 산업계를 폭풍처럼 뒤흔들고 사라지게 될 기업들도 기억한다.
어느 쪽이든 투자에 적당한 시기와 빠져나오기 적당한 시점을 알고 있으니, 유진에게는 마찬가지로 소중한 자산이다.
그렇게 해서 뉴욕과 LA, 샌프란시스코, 싱가폴, 더블린, 그리고 서울까지 전 세계에 걸쳐 다양한 투자를 진행할 기지들이 하나씩 준비되어 갔다.
유진이 만든 벤처캐피탈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국제적인 금융투자 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진이 과거로 돌아온 지 1년 반만의 일이다.
그해가 가기 전에 유진은 직원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여전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공연 중인 뮤지컬 해밀턴의 공연을 선물한 것이다.
물론 아무리 최대의 투자자라 해도 이미 다음 해 6월까지 매진되어 버린 표를 그렇게 많이 구할 수는 없었기에 린마누엘 미란다에게 양해를 얻어 특별 공연을 편성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평시에는 1회 공연만 있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두 주 동안 각기 한 번씩의 공연을 추가해서 오직 유진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초대했다.
대신 유진은 각 공연에 대해 원래 얻을 수 있는 티켓 매출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유진의 직원들도, 극장도, 그리고 공연 배우와 스태프들도 모두 만족할 수 있었다.
4회의 공연에 300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한 유진도 비용 대비 굉장한 효과를 보았다.
이 특별 공연은 여러 미디어에도 기사화되며 다시 한번 유진의 명성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요안나의 말에 따르면 뉴욕에 있는 두 개의 오피스에서 새롭게 직원을 모으는 데에도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 모양이다.
단지 매진이 되어 버린 몇백 달러짜리 공연을 직원들에게 제공한다는 사실보다, 유진의 안목이 그만큼 대단함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월 스트리트의 딜러들과 매니저들은 유진이 단순하게 도박에 가까운 과감한 투자로 잭팟을 터트린 행운아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탁월한 선구안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의미에서 뮤지컬 해밀턴에 대한 약간의 투자는 다른 대형 투자 못지않은 명성을 유진에게 안겨 주었다.
그렇게 2015년이 지나가고 새해가 오도록, 유진은 여전히 LA에 머물고 있었다.
새해가 되어서도 유진은 계속해서 자신이 투자한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을 초대해 격려의 시간을 만들었다.
LA나 미국 서부에서 촬영한 영화라면 스탭 전부를 불러 파티를 마련해 주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감독과 주요 배우들을 불러 만찬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이 투자한 영화에 관련된 인사들을 격려해 줄 때가 아니라면, 보통은 할리우드의 스타들이나, 혹은 캘리포니아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다양한 사교 행사를 가졌다.
유진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계에서, 그리고 영화계에서 그만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과 친분을 맺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유진에게 초대를 요청하거나 자신의 사교 행사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밀려들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온 지 몇 달 만에 유진은 어느덧 사교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2월 8일, 유진이 투자한 데드풀이 개봉되었다.
슈퍼히어로 무비로서는 상당히 저렴한 8,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제작되었는데, 이중 1/3 정도가 유진의 투자금이니 원래였다면 이보다도 훨씬 더 저렴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큰 힘에는 커다란 무책임이 따른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영화는 개봉 당일부터 엄청난 호평을 불러일으키며 흥행 몰이를 시작했다.
LA 직원들과 함께 할리우드의 극장 하나를 전세 내어 개봉한 주에 관람한 유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영화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특히 감독이 돈이 부족해 넣고 싶었다던 캐릭터들은 이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유진의 투자금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라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액션 장면이 유진의 기억에서보다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추가된 자금을 대부분 그쪽에 활용한 모양이다.
추가된 악역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영화의 퀄리티가 조금 오른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다시 며칠 뒤에 역시 유진이 투자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가 개봉했다.
딱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투자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로 다시 극장을 빌려 관람했다.
지난 삶에서도 보지 않았던 탓에 이전과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법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인정할 만했고, 사람들의 반응 또한 무척 좋았다.
“보스의 논평이 필요하다는데요?”
홍보 담당인 모니카가 주토피아 흥행 물결에 유진의 투자를 기사화하기 위해 언론사들과 교감을 하다 물어 왔다.
“무척 재미있게 봤어. 단순하게 재미있는 영화일 뿐 아니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애니메이션이더군. 차별에 대해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자세도 좋았고.”
“알았어요.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요. 하워드 감독의 감사 표시와 함께 보스의 찬사가 올라가게 할 거예요.”
이해 개봉될 영화 중 유진이 투자한 영화는 서른 편이 넘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주 훌륭한 흥행 성적을 거두거나, 혹은 작품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언론에서는 안목 있는 투자가로서 유진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릴 것이다.
영화 산업의 투자는 다른 금융 상품에 비해 그렇게까지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미디어 친화적이라는 면에서는 한 번에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투자 상품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4월에 개봉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관람하는 것을 끝으로, 유진은 드디어 LA의 생활을 잠시 접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얼마 남지 않은 대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에 도착해서는 동생과 코인 투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트코인이 꽤 많이 올랐어. 벌써 600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이번엔 과연 얼마나 올라갈까?”
2016년 4월을 기준으로 유성은 이미 다섯 곳의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이제 유진보다 훨씬 더 전문가라 할 만했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 운영되는 세 곳의 코인 거래소에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지분을 갖고 있고, 세계 각국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코인 거래소 십여 곳의 지분도 확보했다.
모두 앞으로 거래량 20위 안에 들어갈 곳들이다.
코인 거래소의 성장을 생각하면 코인으로 올릴 수익만큼이나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길게 본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더 큰 이익을 볼 수도 있다.
“너희 쪽 예상은 어떤데?”
“2013년 전고점은 틀림없이 넘을 거라는 예상이 많아. 그리고 이번엔 10,000달러까지 보자는 사람도 있어. 암호화폐에 점점 더 관심이 쏠리는 게 느껴져. 사이트마다 유입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 암호화폐 수량은 한정적인데, 수요는 증가하니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겠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코인이 얼마나 되지?”
“비트코인만 100만 개가 조금 넘어.”
1년 동안 여러 개의 거래소를 통해 꾸준하게 매집해 온 결과이다.
그리고 비트코인 가격의 상승에는 유진 형제의 코인 매집도 적든, 크든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 유진이 투자하지 않았던 지난 삶과 지금 가격은 꽤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총 4억 1천만 달러를 썼으니까 평단가는 410달러 수준이야. 5월 27일 현재 비트코인 발행 수량은 대략 1,350만 개, 그리고 시가총액은 84억 달러 정도니까, 형이 보유한 비트코인은 총 발행 수량의 7.5% 수준일 거야.”
“그럼 계속 매수해. 10%를 목표로 잡고.”
“알았어.”
“다른 코인들은?”
“알트코인 중에는 역시 이더리움이 제일 많아.”
형제는 2014년 7월 프리세일 기간 동안 570만 달러를 들여 1,500만 개의 이더리움을 매수했다.
“요즘 조금 떨어져서 11달러 수준을 오가고 있어. 보유 중인 이더리움의 총액은 1억 6,500만 달러 수준이야. 개당 매수 단가가 0.4달러에도 미치지 않으니까 대략 27배의 수익이지.”
“그 외에는?”
“라이트코인은 2달러에서 3달러 사이를 오갈 때만 사들이고 있고, 이때까지 매수한 수량은 600만 개정도야. 리플은 0.01달러 미만일 때만 매집하고 있고 지금 대략 20억 개 정도 갖고 있어. 스텔라루멘은 0.002달러 미만일 때만 매집해서 지금 대략 30억 개 정도 갖고 있고.”
유성이 보유하고 있는 코인의 수량을 보고했다.
서른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코인들을 셀 수 없이 많은 개별 지갑에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겨우 1년 반 뒤에 적어도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 배의 가치로 팔 생각을 하면 그러한 노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유진은 앞으로 1년 반 뒤에 벌어질 대폭등 사태를 대비해, 다양한 코인의 보유 수량을 대략 10% 선까지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요안나에게 그동안의 투자에 관해 보고를 받았다.
“유가가 50달러에서 25달러까지 50%가량 떨어졌습니다. 선물과 옵션을 포함해 모두 550억 달러의 수익입니다.”
200억 달러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유가 선물이 역시 가장 큰 수익을 올렸다.
지난번과 비슷한 비율의 하락이었지만, 투입된 액수가 많으니 수익이 엄청나다.
다음은 50억 달러를 투자한 외환 거래에서의 수익이다.
“파운드화는 1.6달러에서 1.35달러까지 15%가 떨어졌습니다. 엔화는 20%상승했고요. 파운드 화에서 40억 달러, 그리고 엔화에서는 5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리 많은 액수를 투자하지 않은 만큼 수익도 그리 크지는 않다. 하지만 유진이 기다리는 다음 이벤트가 여기에서 발생할 것이니만큼, 수익의 크기와 상관없이 가장 많은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주식에 투자한 것도 순항 중입니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넷플릭스, NVIDIA, Broadcom, EA, 엑타비전블리자드, 나이키, 스타벅스, 홈디포 모두 열한 개 종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37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습니다.”
윌리엄이 책임지고 있는 자산운용사의 자산을 제외하고도, 벌써 육 개월 동안 벌어들인 돈이 1,000억 달러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전만큼 투자 액수 대비 수익 비율이 높지는 않지만, 투자하는 액수가 늘어나면서 수익의 크기가 커진 탓이다.
이제 유진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제일의 부자라고 자처해도 조금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우선 1,000억 달러를 준비해 둬. 다음 달에 아주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요안나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칭찬을 표시하고 다시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대규모의 투자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