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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79화 (79/363)

79화 이성과 감성

“1,000억 달러를 한 종목에 투자하는 것인가요?”

요안나가 꽤나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한 종목의 투자에 담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이기 때문이다.

“물론이야. 제법 큰 건수가 있으니, 제대로 한번 해 봐야지.”

“제법 큰 건수라…… 대체 어디에 투자하시려는 건가요?”

“유럽에.”

“유럽이요? 유럽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죠?”

요안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브렉시트 투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요안나는 이내 유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난 2월,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영국이 유럽연합에 잔류할 것인지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의사를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발효되며 탄생한 EU(유럽연합)에 참여했지만,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과 거리를 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영국 국민들은 유럽과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해 왔다.

더군다나 정치적 목적을 지닌 몇몇 집단과 외국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유럽연합 때문에 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에 큰 손해를 보며, 정작 국민들은 건강보험의 혜택을 볼 수 없다는 음해를 널리 퍼트렸다.

실상은 그러한 주장과 거리가 멀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외부인에 대한 혐오는 항상 먹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영국인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조국이 더 이상 EU에 잔류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정치권에서는 그러한 국민의 염원을 계속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영국이 계속해서 유럽의 일원으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그 결과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것 말고 유럽에 대단한 이벤트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유진이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그렇기는 한데…… 브렉시트가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잠시만요. 음…….”

요안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투표가 잔류 쪽으로 결정되면…… 큰 변화는 없을 거예요. 그나마 불안 요소가 해소되니 유럽연합 구성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는 정도? 주식시장도 어느 정도 상승세를 보일 테고, 유로화도 강세를 보이겠지요.”

“요안나는 투표 결과가 잔류로 결정 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국민투표 결과가 EU 탈퇴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이 영국 경제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으니까요.”

요안나는 내심 확신하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는 유럽 각국과 무역장벽 없이 무역할 수 있었는데, 만일 탈퇴를 결정한다면 당장 관세 문제 때문에 엄청난 악영향을 받게 될 거예요. 영국에서 수출하는 물량의 대부분이 유럽이라는 걸 생각하면 말할 나위 없지요. 영국이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데요.”

그녀는 잠깐 사이에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몇 개나 들 수 있었다.

“정말로 그런 선택을 한다면……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영국을 지탱하는 가장 큰 산업은 금융이에요. 영국은 유럽의 금융 허브 역할을 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어요. 무역과 금융에 올 타격만으로도 영국에게는 엄청난 손해예요. 그리고 그 결과는 국민들에게 돌아갈 거고요.”

역시 금융계에 종사하고 있는 만큼 그녀는 금융가의 입장에서 영국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안나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무시하고 있네.”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감정이요? 물론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감정 때문에 자신의 목을 조르는 행위를 한단 말인가요?”

“물론이지. 사람은 기분이 나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본다고 해도, 내가 싫어하는 놈에게 더 큰 손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걸?”

“조금 손해라고요?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입혀요?”

“영국 국민들은 그 대단한 런던의 금융가들을 무척 증오하지. 영국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면서 말이야. 런던의 금융가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아주 기분 좋게 탈퇴 찬성에 투표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의 요안나를 보며 유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외국인들. 꼴 보기 싫은 외국인들을 엿 먹일 수 있다면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되는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

“하아……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영국 국민들이 전부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둘째치고, 우리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해. 만일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런 경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 낼 수 있을지 말이야.”

“음, 맞아요. 제가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렸어요.”

요안나가 바로 납득했다.

하지만 사실 요안나를 탓할 일은 아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브렉시트는 영국에게, 나아가서 영국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것이라 경고하고 있었고,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분간 언제든지 투입할 수 있도록 1,000억 달러의 현금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나올 때와 그 반대일 때 어떤 상품에 어떤 포지션으로 투자할지에 대해 분석하는 데 최대한의 자원을 투입하도록 하지.”

그날부터 오피스의 리서치 팀에 속한 애널리스트들과 퀀트(Quant, 금융공학자)들이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로 인한 영향을 예측하고, 최선의 결과를 낼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보장하며 긁어 모은 최고의 인재들이 밥값을 할 차례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수익을 볼 수 있는 분야는 환율(foreign exchange) 상품일 것 같습니다.”

유진과 요안나도 매일 리서치 팀의 분석 자료를 검토하며 투자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수없이 투자 상품들이 새롭게 탄생하는 21세기에도, 역시 가장 많은 거래가 일어나는 상품은 주식과 외국환거래다.

특히 외국환거래의 양은 이미 2000년 초반에 하루에 1조 달러를 넘어섰고, 2020년에는 일평균 7조 달러라는 무시무시한 액수가 넘나든다. 그중 상당 부분은 은행 간 거래인 장외 거래가 차지하고 있지만, 수익을 노린 소매거래의 양도 만만치 않다.

벌써 1,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중점적으로 투자해야 할 분야였다.

더군다나 지난 삶에서 수십 년 동안 국제적이고 대규모의 자본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온 유진이 유가 시장과 함께 가장 많이 관심을 두고 있던 금융 분야이기도 하다.

대형 플랜트나 시추 설비 건설에는 다양한 주체들의 파이낸싱이 필요했고, 거액이 들어가는 만큼 시기에 따라 환율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각 프로젝트에서 주로 팀장으로 활동해 왔던 유진은 각 시기에 자신이 담당했던 프로젝트를 떠올리면, 당시의 주요 통화 환율을 얼추 떠올릴 수 있었다.

브렉시트를 결정하게 될 국민투표의 결과와 당시 주요 통화들의 환율을 알고 있는 유진은 이 세기의 이벤트에서도 아주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유진은 데이비드를 불러 또다른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블랙스톤 컨소시엄으로부터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를 인수할 생각이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프리스케일은 지난해 말레이시아 공장이 테러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 아직도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덕분에 지난 한 해 동안 적지 않은 적자를 보아야 했고, 이제는 프리스케일의 인수 가치는 형편없이 낮아져 있었다.

“물론 작년의 그 가격이라면 어림도 없지. 하지만 적당한 가격이라면 사 둘 만해. 자동차용 반도체에서는 여전히 독보적인 기술을 지니고 있으니까.”

유진은 지난 삶에서 대양 그룹이 프리스케일을 인수해서 아주 큰 이익을 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인수해 그 과실을 차지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사 오도록 하겠습니다.”

* * *

“블랙스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겠다는 곳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중년의 목소리가 말했다.

“어딘가?”

노인의 목소리가 묻는다.

“뉴욕의 노이베르거 베르만이라는 사모펀드입니다. 블랙스톤, KKR과 비슷한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 곳입니다.”

“얼마를 낼 수 있다고 하던가?”

“80억 달러입니다.”

“80억 달러?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다.

“블랙스톤에서는 협상을 통해 최대 100억 달러까지는 받아낼 생각이라고 합니다.”

“100억 달러도 말이 안 되는 가격이잖아?”

“지금으로선 100억 달러라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자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매수자가 또 나올지 모릅니다.”

“100억 달러에 넘기면 우리 쪽은 겨우 24억 달러를 받는 거지? 거기서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면 20억 달러를 조금 넘기겠구만. 결국 20억 달러나 손해 보는 거잖아?”

“그러면 이대로 두자는 말씀입니까? 40억 달러 중에 DL의 자금이 10억 달러이고 나머지 30억 달러는 차입한 돈입니다. 급하게 차입하느라 이자도 꽤 세요. 지난 1년 동안 이자만 1억 8,000만 달러나 나갔어요. 그리고 DL 자금도 마찬가지예요. 그걸 운용하지 못한 손해를 1억 달러는 생각해야 합니다. 팔아야 해요.”

논쟁이 격해지는 그때, 그동안 잠자코 있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거라. 당장 결정할 일이 아니니 며칠 두고 보자.”

* * *

“어떻습니까?”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 허대웅이 물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훨씬 더 침착한 얼굴이었다.

“아주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이 녹음테이프는 쓸 수 없습니다.”

데이비드는 빠르게 허대웅이 가지고 온 선물의 가치를 판단했다.

“한국의 법정에서는 결코 이걸 증거로 채택하지 않을 겁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뉴욕의 사모펀드에서 경력을 쌓아온 데이비드이지만, 유진의 오피스에 합류한 뒤로는 한국에 대한 지식을 쌓아 왔다.

특히 법률적인 문제는 주의 깊게 살펴 볼 가치가 있었다.

데이비드는 이제 한국의 법정에서는 미국과는 사뭇 다른 판결이 종종 나온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재계의 거물이 피고가 되는 경우 검사나 판사 모두가 자발적으로 편의를 보아 준다는 정도는 모를 수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녹음에 나오는 인물이 직접 증언을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허대웅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흠…….”

데이비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처럼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가 직접 증언한다면 법정에서도 충분히 먹혀들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주 일가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그룹 계열사의 인수 가격을 높였다는 완벽한 증거가 될 것이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는 프리스케일 인수를 통해 적지 않은 비자금을 챙기려 했다.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의 지분 7%를 메디라이프로부터 12억 달러에 인수했고, 다시 유진에게 17%의 지분을 35억 달러에 인수했다.

그리고 프리스케일 인수에 286억 달러라는 거액을 써 내는 것으로 무려 24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비자금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의 테러로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는 다시 얼마라도 손해를 줄이기 위해 30억 달러의 계약금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포기해 버렸다.

방금 데이비드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법정에서 증언한다면 아무리 위세 좋은 대기업 사주 일가라 해도 법의 심판을 피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한 해 동안 유진 덕분에 엄청난 악명을 쌓아 온 대양 그룹이니 충분히 대단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데이비드는 자신을 부른 허대웅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몇 달 전, 데이비드가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사위에게 아주 은밀하며 위험한 동영상을 건네준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허대웅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날 말했던 자신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거의 육 개월 만에 허대웅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기에 조금은 기대를 하며 약속 장소로 찾아왔다.

하지만 상대가 꺼내 놓은 것은 데이비드가 기대하던 그 이상이었다.

데이비드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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