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브렉시트
“어차피 지금 내 상황은 당신들한테 목줄이 잡혀 끌려다니는 강아지 꼴이 아니겠습니까?”
허대웅의 말에 데이비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부정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선처를 바라는 편이 낫겠지. 안 그래요?”
“선처라? 무언가 요구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우선…… 당신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유진 그 사람이 대양 그룹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싶습니다.”
“대양 그룹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양 그룹과 대양 그룹 사주 일가는 전혀 다르니까요.”
“그래. 대양 그룹 사주 일가 말이요. 나도 일가에 포함되는 거겠죠?”
허대웅이 조금은 위축된 눈으로 물었다.
“그건 제가 판단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지. 여하튼 난 그 일가에서 빼 줬으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강유진 그 사람이 하려는 복수에서 빼달라는 말이에요. 나와 우리 집사람은 그 일가가 한 행위와 관계가 없으니까.”
“이건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사주 일가의 일원으로서 누린 혜택은 무시하고, 책임만 면제해 달라는 것은 꽤 무리한 말씀 같군요.”
“그렇지만…….”
“하지만 제가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적어도 허대웅 씨와 부인께서 우리 보스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실 겁니다.”
데이비드는 허대웅이 다시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데이비드가 정말로 자신이 보스에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자리에서는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당신 보스가 원하는 것은 우리 장인과 처남들을 처분받게 하고, 대양 그룹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걸 이룰 수 있게 최대한 도와드릴 생각이에요. 대신 나와 우리 집사람은 건드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겠죠.”
데이비드는 모호하게 표현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한국의 법정에서는 그다지 큰 처벌을 받지 못할 겁니다. 기껏해야 집행유예 정도로 끝나겠죠. 그러고 나면 그들은 여전히 지금까지 쌓아 온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부 누리며 살아가겠죠. 그건 제대로 된 결말이 아닙니다.”
데이비드는 유진이 대양 그룹을 인수하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십조 원을 써서 대양 그룹을 빼앗는다고 해도, 사주 일가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뿐, 그들은 다시 대양 그룹 지분을 판매한 돈과 세계 곳곳에 감춰둔 비자금으로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IMF로 무너진 많은 대기업의 사주 일가들도 그랬다. 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막상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그동안 쌓아 올린 자금으로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해외에 빼돌린 자금을 사모펀드를 통해 한국으로 들여와 부동산을 구입하고, 기업을 인수해서 IMF 전보다 오히려 더 잘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분식회계, 로비, 청탁, 탈세, 해외자금 은닉.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재벌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만일 평범한 국민이라면 그중 한두 가지만으로도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범법행위지만, 지금까지 그런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재벌 기업은 없다.
1조 원이 넘는 탈세나 횡령에도 법원은 언제나 집행유예로 면죄부를 내려 주는 것이 전부다.
대양 그룹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족 중 한두 명이 법정을 드나들며 창피를 당할 수는 있지만, 최대한으로 쳐도 한두 해를 구치소에서 머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결국엔 그들을 대양 그룹에서 쫓아낸다 해도, 해외에 감춰둔 비자금으로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유진이 원하는 결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최대한 증거를 모아보지요. 그리고 우리 장인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해외의 자산관리 업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대웅은 대양 그룹 사주 일가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의 처남들이 그리 대단치 않은 학력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허대웅은 서울대 상대를 나와 하버드에서 MBA까지 마친 재원이었다.
그는 유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고, 자신이 무얼 얻어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 왔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커다란 약점을 잡혀 목줄에 매여 끌려다니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자신의 살길을 열어야 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범법 행위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데이비드는 여전히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허대웅을 사주하는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허대웅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사람과 근석이도 건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가 말한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데이비드도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장모. 그러니까 대양 그룹 회장의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제가 여기서 어떤 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은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가셔서 당신 보스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요.”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유리할 거예요. 그 사람과 우리 집사람은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을 약간씩 가지고 있어요.”
대양 그룹은 아직 순환출자 구조를 완전하게 해소하지 못했고, 대양인터내셔널은 그런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이 되는 회사이다.
“내가 최대한 우리 장인과 처남들의 취약한 부분을 모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아까 말했듯이 법정 증언도 하지요. 대신 그 사람과 우리 집사람에게 최소한의 보장을 요구할 거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데이비드는 끝까지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가 어떤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확답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영리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역경을 헤쳐나가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본 허대웅에 대해 보고했다.
“허대웅이라면 대양 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대양상사를 맡겨도 좋을 만한 사람이지.”
유진도 허대웅이라는 사내의 가치는 인정했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내는 아닙니다. 야망을 위해서 자기 애인을 회장에게 접근시키고, 자신은 회장의 딸을 노린 사람이니까요.”
데이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의 조사 결과로 20여 년 전의 일에 대해 조금은 파악할 수 있었다.
허대웅은 자신의 부하 직원이던 여자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면서도, 대양상사에 사원으로 들어왔던 회장의 딸에게 접근했다.
미남에 엘리트인 허대웅은 회장 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어서 회장의 눈에도 들 수 있었다.
“위험한 인물이야.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지.”
약점을 확실하게 잡고 있다고 해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남자는 아니다.
유진은 데이비드에게 좀 더 주의하며 일을 진행시킬 것을 지시했다.
“국민투표 결과가 브렉시트 찬성으로 나올 가능성은 18% 정도입니다.”
리서치 팀은 잔류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예측 결과를 내놓았다.
오피스의 리서치 팀 문제는 아니다.
국민투표를 반 달 앞둔 시점에서 투표 결과에 대한 예측은 대체적으로 부결로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인들 사이에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국 경제에 커다란 악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는 브렉시트를 통과시킬 만큼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브렉시트의 결과에 배팅한 도박사들은 대체로 잔류의 가능성이 7:3이나 8:2 정도로 훨씬 더 높다고 보고 있었다.
오피스의 리서치 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잔류로 결정될 경우 그간의 불안이 해소되며 유럽과 영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이 생길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선 유로화와 파운드화가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생각되고요. 주식시장도 상승세를 보이겠지요.”
“음…….”
“단기적인 임팩트는 확실합니다. 파운드화와 유로화 모두 한 달 이내에 5%가량 상승이 있을 테고, 주가 또한 그 이상의 상승이 기대됩니다.”
요안나는 리서치 팀의 전망을 보고했다.
“반대의 경우라면?”
“유럽의 경제, 특히 당사자인 영국의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이 발생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데, EU에서 탈퇴하면 아주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1년 내로 생산성이 적어도 10% 이상 떨어질 것이고, 수출과 수입은 그 이상 후퇴할 것으로 보입니다.”
요안나는 이전보다도 더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최악의 경우 영국 경제가 아주 심각한 불경기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예상도 가능하고요. 물론 이건 장기적인 영향이고, 단기적으로는 파운드화의 약세, 영국 증시의 동반 하락 등이 예상됩니다. 그에 반해 유럽 증시는 오히려 반등의 가능성도 있고요.”
“파운드화와 유로화에 어느 정도의 영향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지?”
“영국 재무부는 투표 결과가 유럽연합 탈퇴로 나올 경우 파운드화가 2년 동안 대략 12%까지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비슷한 생각이고요. 단기적으로는 일주일 이내로 5%에서 8%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영국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다른 나라 통화들은 어떤가?”
“역시 달러와 엔화의 강세에 무게를 두고 있어요.”
“그렇다면 엔화 상승에도 걸어 볼 만하겠군.”
“보스는 역시 브렉시트가 가결될 것으로 보시는군요.”
요안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지.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야. 영국인들은 유럽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것을 불편해해. 지금까지 유럽연합에 참여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수백 년 동안 영국은 도버 해협을 경계로 자신들과 유럽 대륙 사이에 선을 그어 왔다.
사실 그들이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민자 문제였다.
특히 노동자들과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외부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점점 강해지는 흑인들과 히스패닉의 권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백인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는 이러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파운드화의 매도, 유로화의 매도, 엔화 매수, 그리고 세계 증시의 하락에 최대한의 레버리지로 베팅할 준비를 해.”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베팅이다. 하지만 브렉시트 찬반 투표가 미칠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에 베팅할 곳이 너무 많았다.
“이번엔 조금 위험성이 큰데요.”
요안나가 우려를 표했다. 그동안 유진의 결정에 의문을 가진 적은 없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그녀와 오피스의 리서치 팀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석학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요안나는 외부 인사들의 예측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전했다.
“다행이로군.”
유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이라뇨?”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다들 나랑은 반대로 베팅할 것 아닌가?”
이러한 이벤트를 앞두고 큰돈을 거는 사람은 유진뿐이 아니다.
유럽의 베팅 사이트에는 벌써 수백만 달러가 넘는 돈이 모였다.
그리고 그보다 수백 배 많은 돈이 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베팅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브렉시트 부결에 베팅하고 있다면, 가결 쪽 결과에 걸었을 때의 아웃풋도 커지는 거잖아.”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는데요…….”
요안나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보스가 실패하는 모습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이 내려진 만큼, 그날부터 모든 역량을 다해 베팅의 준비에 들어갔다.
월가의 투자은행들과 접촉해서 다양한 투자 상품을 개설하고, 적당한 비율을 산정하고, 협상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유진 캉이 브렉시트 가결에 큰돈을 걸었다고 합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제 유진의 오피스의 행동 하나하나가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유진은 몇 번이나 말도 안 되는 도박을 성공시켜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는 아주 크게 데이겠군.”
“지금까지 성공해 온 것만 해도 대단하지.”
“행운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니까.”
증권가 사람들은 대체로 유진의 이번 베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 많았다.
그중에는 유진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번에 뜬 놈은 한 번에 가 버리기 마련이지.”
그렇게 브렉시트 가결에 건 베팅은 유진의 명성을 갉아 먹고 있었다.
투표를 열흘 앞둔 6월 16일, 영국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전해졌다.
“노동당 하원의원이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사람에게 총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안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지성적이지 못한 태도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요. 아무래도 찬성파의 위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 오피스는 브렉시트 가결을 상정하고 작업을 진행 중이라, 이 소식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던 모양이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1,000억 달러가 걸린 무지막지한 베팅이다. 이성을 잃은 브렉시트 지지자 한 명 때문에 그런 엄청난 돈을 날려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부터 앞섰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네.”
유진도 얼굴을 찌푸렸다. 브렉시트의 과정과 투표 결과,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고 있었지만, 이날 벌어진 사건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에게는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안타까운 일이야. 언제나 자기 믿음이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있지.”
“어떻게 할까요? 이번 일의 영향으로 여론이 브렉시트 반대에 쏠릴 가능성이 있어요.”
요안나는 이번 일에 있어서만큼은 유진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계속 진행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진이 말했다.